출처 :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2809

신들의 귀환, 거대한 굿판 한국 사회, 그리고 대선
박정희 신격화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 사회 자화상
데스크 승인 2012.12.14  19:07:57 최규창 (edit)  

"신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 다만 오늘날에는 질병이 되었을 뿐이다…. 제우스는 더 이상 올림푸스를 다스리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의 신경망을 다스리며, 의사의 상담실을 위한 기묘한 샘플들을 만들어 내거나, 정치가와 저널리스트의 뇌를 혼란시켜 부지중에 온 세계에 심리적인 질병을 퍼트린다(칼 융)."

인류의 역사는 신들의 존재와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문명을 이루기 위해 과학적 실증주의를 수용하는 대신, 비이성적 방법으로 신의 현현을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인간 스스로를 소외의 길로 내몰았다고 보는 G.프로이트와 H.마르쿠제의 견해가 오늘날 신과 인간 사이의 소원한 관계와, 인간과 그 집단의 비과학적인 정신적 방황에 대한 약간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융에 의하면 고대에는 신들을 중심으로 세계가 운행되었으나, 과학적 세계관이 발전하면서 그 실체들은 인간 내면의 그림자로 밀려나 하나의 '집단무의식적 원형(archetype)'을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런 종교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도 신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고 하늘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 공포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원형은 이성과 질서의 세계에는 포함될 수 없는 무질서와 혼돈, 그리고 무작위적인 계시의 형태를 띠게 되므로, 이성과 종교는 근대 이후 적정한 거리를 두고 상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융은 실체로서의 인격적 신의 존재나, 인간 역사에서의 성육신을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론으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영성 상담을 체계화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무의식적 원형들이 오늘날 자신 외의 뛰어나고 초월적인 타자에게 투사(projection)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우리는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전쟁 영웅, 사이비 교주들뿐 아니라, 심지어 스탈린,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이 지난 세기에 현존할 수 있었던 것도, 인간 의식 속에 억압되고 내면화된 어두운 그림자들이 외부의 강력한 타자에게 투사되어 강력한 종교적, 집단적 에너지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외부의 초월적 타자에게 의존함으로써 내면의 혼돈과 집단적 카오스를 극복하는 방식을 습관적으로 취해온 우리 민족에게는, 종교가 곧 삶이고 정치이고 경제였다. 이것이 바람직한 성경적 틀을 갖추어 왔다면 이러한 성향은 우리의 삶이 기독교적 정신으로 개혁될 수 있는 좋은 여건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삶의 체계로서의 종교는 우리가 믿는 인격적 하나님의 성품과는 거리가 있는 복잡하고 난잡한 형태의 집단적 파토스에 가까웠다. 어느 시대, 어떤 종교가 주류를 이루더라도 우리는 초월적 타자에 의존하여 현세적 축복을 구하고, 우리와 다른 타자를 적대시하는 패턴을 항상 고수해 왔다. 오늘날 교회의 형태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한국 기독교는 항상 영웅주의적 인물로 대표되었고, 그들의 카리스마에 의해 단기간에 급격하게 성장하였으며, 이와 병행하여 그들의 도덕적 결함이나 인간적 한계는 관대하게 처우되어 왔다. 수많은 유사 기독교 종파나 이단들도 우리나라에서 파생되었고, 현재도 120개나 되는 종단이 서로를 포용하지 못한 채 존재하고 있다.

만약 신에 대한 의식이 인간에게 원형으로 남아 있고, 그것이 오랜 억압을 깨고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외부에 투사되는 현상이 타당하다면, 그러한 예로 한국 사회처럼 적당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2005년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중 53%는 특정 종교를 믿는 신앙인이다. 나머지 사람들도 무엇인가를 초자연적으로 의존하는 종교 성향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늘 우리를 지켜 주고 복을 내려 줄 대상을 갈구하며, 그 축복의 대가로 충성을 바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집단적 무의식 가운데 '자기 주체성'이나 이성적 질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나는 18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을 앞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를, 초월적 타자에 대한 숭배로서의 영웅주의, 자기 주체성의 탈피, 현세적 기복주의,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 투사된 신격화, 그리고 그로 인한 혼란과 정신적 질병 등으로 보고 싶다.

뉴스타파 34회에서 방영된 박정희 탄신제의 모습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왠지 익숙한 광경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TV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대형 교회의 추태나 유사 기독교 집단의 교주 숭배 모습 등을 익숙하게 봐 온 우리들에게, 박정희 신격화는 충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코미디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참석한 사람들도 경상북도 또는 구미시 내의 고위직들이거나,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하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박정희는 우리 민족을 가난과 공산주의로부터 구한, 신과 다름없는 존재다(구미시장은 박정희를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지도자로 표현했다). 그에게 투사된 집단 무의식의 원형은 어떤 형태의 도덕적 결함이나 독재의 부작용도 모두 초월해 버린다. 참석자들은 심지어 유신 독재가 꼭 필요했고, 이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이들은 빨갱이라고 통칭해 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종교적 열망은, 환인의 아들인 단군이 제정일치 시대의 군주가 되었듯이, 두 대통령이 탄생한다는 '금오산의 급조된 전설'을 힘입어, 이번 대선에서의 박근혜의 필승을 기원하는 염원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된다. 제사를 지내거나 생가를 보존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탄신제나 숭모제는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나 역사적으로 뛰어난 왕, 나라를 구한 장수와 같이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에 대한 영웅적 소환과 신적 지위 부여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감이 있다. 비록 일부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해도 이것은 과거 박정희 향수를 가진 국민들의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수천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국가 지원금 수령을 정당화할 만큼 보편화되어 추진되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사찰 중에는 부처상 대신 박정희의 영정 사진을 모신 곳도 있다고 한다. 또한 박정희 탄신제 개최, 생가 복원 및 체육관 건립뿐 아니라, 생가 공원화 사업, 새마을운동 테마 공원 사업, 박정희 동상 건립(전국에 이미 6개가 있고 2개가 추가될 예정이라고 함), 박정희가 교사 시절 살았던 하숙집을 공원화하는 사업, 그가 방문했던 기차역과 정미소 등을 복원하거나 기념관을 수도 없이 건립하고자 하는 각 도시의 경쟁적 사업에 이르기까지, 현재 박정희를 다시 신격화하는 열기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지방자치단체들의 세금이 막대하게 투입되고 있다. 마치 모택동이나 김일성의 신격화 과정에서 신화적 이야기가 꾸며지고, 국민들이 대장정과 같은 그의 행적을 같이 체험하면서 국가적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확신으로는, 이러한 신격화는 대부분 공식적 종교를 가지지 않은 47%의 국민들이 자신들의 '신(神) 의식'을 투사할 타자로서의 영웅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반공과 경제 발전의 화신으로서 박정희를 추억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기독교와 같은 체계화된 종교를 가진 이들이 인간을 신격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투사할 대상으로서의 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융의 말대로, 우리의 '신 의식'은 결코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치가와 저널리스트의 뇌를 혼란 시켜 부지중에 우리 세계에 심리적인 질병을 퍼트려' 버린 것이다. 숭배가 강요되지는 않지만, 현재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박정희 대통령 숭배와 추모 열기는 다니엘 시대의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논쟁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반대하는 정도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성경의 기록대로 우상은 본디 헛것이며(사 41:29), 아무 것도 아니며(고전 8:4), 사람이 만든 것에 불과하므로(신 27:15), 이것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우리의 자유의 문제로 귀결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과 양심이다(고전 10:25~31). 하지만 그 회색의 영역에서 사탄은 더욱 활발히 활동한다. 그는 우리의 무의식에 불안과 공포를 심어 주며, 마음에 죄책감을 넣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 아닌 것에 우리의 믿음을 투사하도록 만든다.

1948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진입으로 시오니즘과 전 세계적인 종말론 논쟁이 다시 점화되어 오늘날 아랍 세계의 비극이 시작되었듯이, 이러한 박정희 신격화 현상은 분명 그의 사후 거의 20년간 평범한 여인으로 지내왔던 박근혜의 정계 진출을 계기로 다시 점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박근혜가 정치활동에 입문한 1998년 이전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부활을 '예비한' 인물들이 있었다. <중앙일보>는 1997년에 '실록 박정희 시대'를 연재했고, 조갑제는 <조선일보>에 3년간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제목의 박정희 일대기를 연재하여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작가 이인화도 박정희를 소재로 한 소설 '인간의 길'을 같은 해에 출간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몇 년에 한 번씩 시행하는 역대 대통령 업적 평가나 선호도 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기록해 왔다. 그러나 그의 신격화가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지자체의 예산을 끌어 갈 정도로 노골화된 데에는 역시 박근혜의 정치 등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의정 활동이나 두드러진 정치적 업적이 없는 박근혜는 박정희의 초월적 카리스마 이미지를 그대로 걸치면서 대선후보로 '무혈입성'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가 박정희를 부활시키고 신으로 귀환시킴으로써 상호 시너지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와신상담하면서 15년을 기다려 왔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대선은 온 나라가 오랜만에 맞이하는 거대한 굿판이요, 영웅주의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박근혜가 정수장학회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1억 5000만 원짜리 굿을 벌였다는 소문이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아직 사실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고, 새누리당은 이를 최초로 유포한 승려 원정을 검찰에 고발했다. 자비를 들여 굿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므로 이를 종교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도에 지나친 인간 숭배 또는 우상숭배라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소문에 대한 새누리당의 민감한 반응은 사실 보수 기독교인들의 표를 의식한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으로 가장 큰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특히 중산층 이상의 오피니언 리더들 가운데 기독교인의 비중은 매우 높은 편이다. 이러한 소문이 확산되면, 기독교의 적인 공산주의를 반대한 반공의 화신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에 대한 지지와, 우상숭배를 금지한 율법 간의 심각한 인지부조화가 발생할 것이 분명하다. 현재의 지지율로 보건대 이러한 조기 차단은 성공적으로 먹히고 있는 것 같다. 과거에 사이비 목사와 오랜 인연을 맺어 왔고, 아버지 탄신제에 매년 참석하여 절을 해 온 박근혜의 종교관을 보면, 정말 굿판을 벌였는지, 본인이 직접 참여한 것이 맞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로 생각되지 않는다. 이번 대선은 교인들도 후보들의 종교관을 보고 표를 주는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아직도 우리나라가 정치 담론과 종교 담론이 분리되지 않은 거대한 무속적 종교 사회요 카오스의 굿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상을 잘 섬김으로써 후손이 복을 받는 것처럼, 민족의 어버이인(실제 탄신제에 참석한 한 노인은 박정희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사와 탄신제를 잘 치름으로써 우리 민족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인 것이다. 현세적 기복주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무속의 몸뚱이에 어떤 옷을 입히더라도 그 내용은 다시 무속화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기독교뿐 아니라 천주교, 불교, 유교 역시 자신들의 기복화와 세속화를 개탄하고 있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개종되지 않은 우리 사회의 타자들과 타 종교가 벌이는 굿판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의 능력이 이러한 집단적 그림자의 영역을 극복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우리의 깊이 없는 삶과 얕은 수준의 회심을 가슴 아파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본격적인 신격화 움직임은 이번 대선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때아닌 영웅주의의 대결 또는 신들의 전쟁을 유발시켰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 시 조문객은 200만 명, 1949년에 암살당한 김구 선생의 경우는 100만 명,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은 각각 170만, 40만 명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는 500만 명이 조문했고, 고향 봉하마을에는 120만 명이 다녀갔다. 특히 장례식 이후 노제에는 한 장소에 50만 명이 운집함으로써 보수적 기득권층의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혼란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전에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다. 노무현은 이미 '마음속의 대통령'으로서 내재화된 영웅주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민주통합당 경선에서의 문재인의 압승은 이미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대(大)결집을 예고하고 있었다. 노무현이 부활했으므로 박정희도 더욱 강하게 부활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와 노무현을 '신 의식'의 투사 대상으로 삼기를 거부한 이들은 안철수에 열광했다. 그때까지 아무런 정치적 업적과 검증 과정을 보여 주지 않았던 안철수의 엄청난 지지율 역시, 우리의 '종교적 메시아주의'의 또 다른 형태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번 대선과 같이 진보와 보수가 총집결 했던 선거는 지난 40년간 없었다. 은퇴한 노정치인들과 문화예술인, 학자들까지 지지 선언을 이어 가고 있다. 양 진영 모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본의 아니게 박정희와 노무현을 소환함으로써 신들의 전쟁을 유발시켰다. 이 두 인물이 역대 대통령 선호도 조사에서 항상 1위와 2위를 차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강력한 '탈주체 성향'과 '초월적 존재에 대한 동일시' 욕망과 겹쳐지면서 전례 없는 이념 갈등의 양상을 낳고 있다. 이전에도 이념의 갈등은 항상 있었으나, 국민들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대통령을 선택하는 시대에 이런 첨예하고도 거의 대등한 수준의 대립을 경험하는 것은 분명 이례적이다.

이번 선거에서 한국교회는 뚜렷한 개입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맹목적으로 헌신했던 일부 대형 교회들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현재의 기독교적 분위기는 다소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또한 박정희 신격화와 같은 기형적 현상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이나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비기독교인들을 적으로 규정하는 과거의 무례한 행태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능과 욕망의 투사로 일어나는 온갖 절망적 형태의 카오스적 신호에 귀를 막아서도 안 된다. 고대 히브리인들도 이웃 국가의 신들이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바알은 가나안뿐 아니라 중근동 지방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고의 이방신이었고, 구약의 역사는 야훼와 바알의 전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히브리인들이 가졌던 믿음은 야훼 하나님이 신들 중의 신이며(시 95:3), 가장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분이며(출 15:11),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유일신에 대한 주관적 해석으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영적인 현상과 신격화의 문제를 무조건 정죄하고 단순하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실체적 체험, 희생과 자아극복의 노력이 전제되지 않은 신앙은 이 세상에서 또 다른 질병을 만들어 낼 뿐이다.

우리는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성경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가장 타당한 형태의 합의점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영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노력 역시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신격화, 정치의 종교 담론화, 선거에서의 영적 이미지 전쟁은 분명 비정상적인 것이며,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진정한 모습이다. 야훼 하나님이 수없이 실재하는 신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부르셨고, 끊임없는 배교와 회개의 과정을 통해 구속사를 이뤄가셨듯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에 순종해야 할 동일한 과제가 주어져 있다. 하나님이 주신 명확한 기준, 즉 공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참여하고 독려하고 설득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사명이다. 그럼으로써 더 이상 초월적 인간에게 신적 지위를 투사하거나, 질병으로 귀환한 신들을 찾지 않아도 되는, 누룩과 같이 보이지 않으면서 서서히 자라나는 그 분의 나라가 우리 사회 속에 드러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최규창 /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저자, (주)포리토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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