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5>제6대 태조왕(1)"에서 발췌했습니다.
《삼국사》(삼국사기)와 고구려 건국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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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건국 기년에 대해 찝찝한 구석이 있다. 《삼국사》나 《삼국유사》에선, 부식이 영감이나 일연 땡중 모두 고구려 건국이 태세 갑신, 즉 BC. 37년에 있었던 일이라 했는데, 《후한서》엔 “한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는 말이 나온다. 조선 즉 고조선이 패망한 것은 BC. 108년인데, 현도군은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무제 원봉 4년(BC. 107년)에 설치한 것이라 한다. 고조선 패망 1년 후로 아직 고구려는 건국되지도 않은 시점이다.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이전에 《한서》지리지의 현도군 속현 3개소 가운데 고구려현이 보이고 있는 것도 그렇고(안정복 영감도 이 점을 기이하게 생각해서 기록해두셨다.) 조선의 멸망시점과 함께 고구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삼국사》의 고구려 및 백제 건국년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김부식이 신라보다 고구려를 뒤에 두고자 그 건국연대를 삭감했다는, 오늘날에는 거의 '정설(?)'로 굳어져있는 듯한 이 학설을 최초로 제기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다. 일찌기 『광개토태왕릉비』를 직접 답사했던 단재는 『광개토태왕릉비』가 전하고 있는 '(추모왕으로부터)17대를 전하였다'는 말이나(《삼국사》나 《삼국유사》 모두 고구려의 12대 왕이며 13대손이라고 한 광개토태왕이 어떻게 17대 손이 될수 있는 걸까) 《당서》에서 가충언이 고종에게 고려(고구려) 공격을 진언하면서 인용한 《고려비기》는, 왜 하필 "고려가 지금 건국된지 9백년이라" 운운했을까? 이러한 근거들을 바탕으로 단재는 《삼국사》에 기록된 것보다 고구려 건국 연대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광개토태왕이 동명왕의 17대 손이라는 『광개토태왕릉비』의 기록을 토대로,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기년을 《삼국사》보다 240년이나 더 올려잡은 기원전 277년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를 비판한 것은 단재 선생만이 아니었다.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도 《삼국사》의 건국연대가 조작되었다고 비판했는데, 이마니시 류(今西龍)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같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지금 우리 나라에서 《삼국사》초기기록을 부정하도록 만든 기본뼈대를 제공한 것은 츠다 소키치(津田左右吉)였다.(이병도는 이 사람 제자다) 이 남자는 일본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덴노의 나라'라고 전제하고서 역사를 해석하는 소위 황국사관(皇國史觀)이 지배하던 당시, 꽤나 파격적인 주장을 했는데, 그것은 일본의 황국사관이 성경처럼 떠받드는 《고지키》와 《니혼쇼키》에 대한 사료적 가치에 "NO!"를 외친 것이다. 그때까지 아무도, 일본의 덴노가 세상의 여러 나라에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었다는 (개)소리를 진짜랍시고 늘어놓은 《니혼쇼키》 기록을 비판하긴커녕 의문 하나 제기하지 못했다.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고 헌병대 끌려가 개병신 다돼서 오던 시대. '신성하신 신의 후손인 덴노헤이카(天皇陛下)가 다스리는 나라 일본'을 외치는 황국사관을 무슨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던 학계풍조 속에서 이 남자는 대담하게도 《니혼쇼키》의 '틀린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초기 기록에 대해서는 아예 "있지도 않았던 허구다!"라고 외쳤다.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 '황실모독죄'로 대학 교수직까지 박탈당하고 금고형까지 받는다.
지금은 츠다의 학설이 이겼고 《니혼쇼키》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내에서조차 신빙성있는 역사책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애초 당연한 일인데도 그걸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수직을 박탈하고 금고형에 처한 일제도 일제지만, 그렇다고 츠다 소키치 이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해보지 않고 그저, 《니혼쇼키》를 비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츠다 소키치를 '황국사관과 식민사학에 맞선 양심있는 일본 학자'로 추켜세우는 우리 나라 사학의 풍조도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니혼쇼키》를 비판하면서 덩달아 '피본' 것이 《삼국사》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애초에 츠다 소키치는 《니혼쇼키》를 비판할 때 '황국사관' 자체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니혼쇼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가지고 '황국사관'을 주장하기에는 《니혼쇼키》기록에 허점이 많다는 것을 먼저 발견했고 그것을 보완해 보다 '합리적인' 황국사관을 정립하려고 했을 뿐이다. 눈가리고 아웅.
단재 신채호는 《삼국사》가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끌어내렸다고 비판한 반면 식민사학자들은 거꾸로 《삼국사》가 실제보다 연대를 끌어올렸다고 주장했다. 사실 《삼국사》의 초기기록을 믿지 못하겠다는 주장 치고 그 주장이 츠다가 《니혼쇼키》를 비판할 때처럼 합리적이다거나 제대로 된 근거라는 걸 내세우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니혼쇼키》는 일단 실제보다 연대를 120년 끌어올려서 적은 사실이 밝혀졌지만, 엉뚱하게도 '우리가 이 꼴인데 너희라고 별수 있냐?'하는 식으로 《삼국사》까지 엮어들인 것이다 이 물귀신들이. 우리나라 국사학계의 '거두'라는 양반이 그러한 자기 스승의 학설을 배워서 그대로 한국 사학계에 퍼뜨리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우리는 《삼국사》에 기록된 것과는 전혀 다른 역사를 배우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 삼국은 추모왕과 온조왕 그리고 박혁거세가 세운 것이 아니라, 제6대 태조왕(재위 53∼146)과 제8대 고이왕(재위 234∼286), 그리고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 때에야 건국되었다고. 지금도 국사교과서에는 이렇게 가르친다.(그나마 내가 배울 때는 대무신왕까지는 나와줬다.)
그러고 보면 참. 《삼국사》는 비판받는 이유도 가지가지다. 한쪽에서는 너무 빼먹었다고 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늘려 붙였다고 뭐라 하고. 뒷간에서 불알 잡혀 죽은 것도 억울할 사람한테 참 너무하다 싶을 정도. (하긴 그 양반이 좀 얄밉게 생겼긴 했어)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 수도 홀승골성에 이미 졸본부여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삼국사》 백제본기 기록을 생각하면, 추모왕이 졸본부여왕의 둘째 따님(과부)과 혼인한 인연으로 장인으로부터 나라를 물려받아 고구려를 선포했다는 《백제본기》의 기록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고구려 사관들이 고구려 건국 이전의 졸본부여 역사까지 합쳐 9백년이라고 서술한 것은 아닐런지. 광개토태왕이 추모왕의 17대손이라는 비문 내용에서 '17대 손'이라는 말이 단지 왕위계승의 순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혈통상으로 몇대 손이라는 말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하여튼 김부식, 이 영감태기 때문에....)
《삼국사》는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필수자료이면서,한편으로는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발목을 잡는 그야말로 골때리는 역사책이다. 하지만 동명왕 이전의 역사에서 고구려의 이름이 존재했다고는 해도, 그게 꼭 《삼국사》가 연대를 깎아치운 증거는 아니라고 본다. (아니면 김부식 이 영감태기가 정말 뭔가 우리에게 숨긴 것이 있는 걸까?) 대체로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그만큼 오랜 기간 동안 복잡한 과정을 거쳐 건국되었고, 추모왕을 중심으로 역사기록들을 통합하는 와중에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그 설을 따른다.
이 식민사학자들의 행태를 말하자면, 김부식 영감을 무작정 비난할수만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소위 '실증' 운운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의 곁가지로 보던 무뇌충만도 못한 식민사학자들, '실증'을 외치면서 《삼국사》를 프로크라스테스 침대 위에 눕혀놓고 우리 나라 초기 왕대를 근거없는 허구로 몰아붙인 그 미친 놈들 때문이지. 그래놓고, 안 믿는다는 이유가 가당치도 않아. "중국 기록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 초기기록에서 말하는 이 왕들의 이름이나 업적에 대해서 중국 애들이 기록을 안해놨다고. 사실은 임나일본부라는 판타지소설을 진짜 역사로 만드는데《삼국사》가 전혀 도움이 안되거든. 그렇게, 백제는 근초고왕 이전의 역사를 허구랍시고 쳐내버리고, 신라는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허구랍시고 쳐내버리고.... 그리고 고구려는 태조왕 이전의 역사가, 후대의 날조라는 이유로 저 개새끼같은 식민사학자 놈들한테 허구취급당했다. 우리나라의 소중한 추억이. 식구가 모여 찍은 사진과 옛 기억이 새록새록 담긴 일기들을 근거없는 허구라고 무시하면서 찢어버리고 불태워버린 악랄한 식민사학자들과, 그들의 제자로서 지금도 우리 사학계에서 주류로 군림하고 있는 놈들. '실증'이라는 이름하에 고구려 초기 역사가 잘려나가는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 고구려의 6대 왕 태조왕이 있었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5>제6대 태조왕(1)|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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