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03985283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고구려 2대 유리명왕(1)"에서 발췌


동명왕릉

     동명왕릉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고구려 2대 유리명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고구려 2대 유리명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5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고구려 2대 유리명왕(3)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6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고구려 2대 유리명왕(4)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7


<동명왕릉>

 

동명왕의 무덤은 지금 평양에 있는 것이 유력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에서 진파리 고분군의 이 무덤을 동명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우선 왕릉급의 무덤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해보여도 사실 몹시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로 깎아만든 돌을 무덤 입구에 썼으며, 바닥은 몇 겹으로 숯과 자갈을 섞어 층층이 쌓았다), 금관 조각이 발견되었고(겨우 그것만으로?) 벽화가 왕의 옷과 같은 색인 자색(안악 3호분 주인공의 옷과 같은 색)이 주류를 이루며, 마지막으로 이 무덤을 지키기 위해 지은 원찰 '정릉사'가 발견되었다는 점이 바로 이 무덤을 동명왕의 능으로 보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고 북한 학계는 밝혔다.

 


<동명왕릉 내부구조 실측도>

 

사실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두 번씩이나 무덤이 적들의 손에 훼손당한 뼈아픈 과거가 있었다. 《삼국사》에 기록된 바, 봉상왕 5년(296) 고구려를 침공했던 선비족 전연(前燕)의 모용외가 봉상왕의 부왕이었던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게 했고, 다시 고국원왕 에 쳐들어와서 수도를 작살내고 퇴각하던 모용황의 군사들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아예 시체까지 훔쳐가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전란이 터질 때마다 왕의 무덤이 위협받는 것은 기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임진왜란 때만 하더라도 조선 성종과 중종의 무덤이 왜군에게 파헤쳐진 일도 있었다.)

 

고구려로서는 시조왕의 무덤을 어떻게 해서든 적들의 손에서 지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택한 방법이 무덤을 수도 바로 옆으로 옮겨와서 보호하는 것이었다고 북한의 학계에서는 주장한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던 427년, 졸본에 있던 동명왕릉을 평양으로 함께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 점은 조선조의 실학자 순암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도 주장한 바가 있다.

 

동명(東明) 때 평양은 낙랑(樂浪)의 군치(郡治)가 되었는데, 동명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응제시주(應製詩註)》에,
“주몽이 졸본(卒本)에 도읍하였는데 비록 그 소재는 알 수 없으나, 당(唐) 이적(李勣)이 아뢴 말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평양까지 17역(驛)이다.’ 하였으니 상거가 몹시 멀다. 아마 일찍이 구제궁(九梯宮)을 짓고 와서 놀다가 죽어 이곳에 장사지낸 것이리라.”

하니, 이 말 역시 잘못이다. 대개 고구려가 관구(毌丘)ㆍ모용(慕容)의 난을 만나 도읍이 잔파(殘破)되고 선왕의 능묘가 헐려 나라를 옮길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왕의 능침도 따라 남쪽으로 옮겨서 동명의 묘를 지금의 중화(中和) 용산(龍山)에 장사지냈기로 이르는 말일 것이다. 고려 고종이 몽고난을 만나 강화로 천도하고 태조 이하 모든 능묘를 죄다 이장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상고하건대 《광여기(廣輿記)》에
“요동 복주(復州)에 명왕산(明王山)이 있는데 고구려의 왕자 동명을 이곳에 장례하였다.”

하였으니, 혹시 처음 이곳에 장례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上) 고이(考異) '동명을 용산에 장사지내다'

 

하긴, 나라가 망하는데 시조의 무덤을 그 자리에 그냥 둔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지. 그런데 평양으로 무덤을 옮겨온 뒤에도 졸본으로 사행을 떠나는 기록이 《삼국사》에 나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생긴다. 북한에선 추모왕의 시신이 있는 무덤[墓]는 평양으로 옮기되, 졸본은 추모왕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역사적인 성소라는 점을 감안해서 그곳에다 추모왕을 모시는 사당[廟]을 남겨놓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금관가락국 김수로왕의 시신을 묻은 무덤 역시 사당[廟]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대고 보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장군총 같은 경우를 봐도 무덤과 사당을 함께 두고, 무덤 위에 사당을 만들었던 것이 확인되는데(무덤 위에서 건물 흔적이 발견됨) 어떻게 무덤과 사당을 분리해서 모시는 것이 평양에서 갑자기 나타났겠나.

 

그래서 그 의문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허묘론'인데, 일종의 '가묘'로서 상징적인 의미로 두는 기념물이 평양과 졸본 둘 중 한 곳에 있었을 거란다. 어쩌면 졸본에 있는 것이 진짜이고 평양에 있는 것이 허묘이며, 북한 학자들 주장대로 평양에 있는 것이 진짜 무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가묘든 아니든, 그곳에 왕의 영혼이 머무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데. 자고로 무덤이니 사당이니 하는 것은 산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위해서 마련된 공간이고 그곳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서 생명을 얻는 공간이다. '영혼'이 머무르고 있다면 그곳이 비록 시신이 없는 사당이라 해도, 실제 시신을 묻은 무덤보다도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동명왕의 무덤이냐 사당이냐를 가릴 것이 아니라 동명왕의 영혼이 어디에 거하셨는지, 좁게는 이곳에 동명왕의 영혼이 머무른다는 믿음부터 먼저 지니지 못하면 허묘설이나 왕릉설도 껍데기뿐인 공리공론에 불과하다.

 


<동명왕릉 내부에는 연꽃무늬가 잔뜩 수놓여 있었다.>

 

1970년대 초엽에 북한 정부에서 동명왕릉 내부를 재조사하면서 벽면을 덮고 있넌 석회가 씻겨 내려갔는데, 그 과정에서 현실(玄室)의 안쪽 벽을 덮고 있던 연꽃무늬 벽그림이 발견되었다. 지름 12cm 되는 보라색 바탕의 붉은 자색 연꽃무늬를 4.2cm 간격으로, 사방연속 무려 6백여 개를 그린 화려하고 장대한 벽그림. 그것이 발견된 것이 1973년 1월 23일의 일로, 처음에 찾아낸 104개의 연꽃 그림을 트레이싱지에 옮겨서 모서리마다 연꽃을 복원해보니 꼭 641개가 되었다고.(동명왕릉 조사에 참가했던 북한 고고학자 리정남 선생의 술회한 내용으로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실려있다)



<동명왕릉 내부>

 

북한 정부에서 나서서 지금의 모습으로 '개건'하기 전에는 봉분 높이가 8.5m에 지름이 22m 정도였는데, '위대한 수령(?)'께서 그걸 보고 '교시(?)'를 하셨단다. 1,500년이라는 세월 동안에 비바람에 깎여서 이만한 크기가 되었으니 본래 크기는 대체 얼마나 컸겠느냐고, 그래 그걸 계산해내라고(그게 근데 계산이 되긴 되나?) 해서 과학적으루다(?) 계산을 해봤더니 원래 높이는 11.5m, 지름이 31m였다는 계산을 얻어낼 수 있었단다.(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계산을 해낸건지 참.)



<동명왕릉 천장>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무덤은 고구려의 대표적 봉분양식을 모두 갖춘 것이고, 축조 시기가 장수왕이 재위하던 5세기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평양 천도 이전의 옛 수도(환도성이나 홀승골성)에 있던 왕릉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다시 만들었다는 주장의 근거인지는 모르지만 통구의 돌각담무덤, 즉 돌을 층층이 쌓아서 만드는 적석총(장군총 같은)의 형태와 평양의 돌간흙무덤(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서 만드는)이 혼합된 소위 '돌각담무덤'의 형식을 동명왕릉은 띠고 있는 것이다. 3단의 정방형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들어서, 안에는 벽그림까지 그려넣은 이런 형태의 무덤은 용강큰무덤 말고는 없다고 한다.



<동명왕릉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도의 기술을 갖고 만들어졌다>

 

동명왕릉의 봉분 밑에 쌓은 축대는 단순한 치장이 아니다. 돌 윗면에다 턱을 주어서 윗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면서, 위쪽으로 각도를 조금씩 좁혀서 쌓았다. 울퉁불퉁한 주춧돌의 단면 그대로 기둥을 잘라 세우는 석축기법을 가리켜서 '그랭이공법'이라고 하는데, 동명왕릉에서도 그러한 공법이 적용됐다. 봉분 역시 직선으로 쭉 네모뿔 모양으로 올라가다가 정상 부분에서 둥글게 마무리했다. 무덤 주위로는 우리나라 다른 왕릉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북한에서 이 무덤을 동명왕의 무덤이라 주장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이 무덤이 속한 진파리 다른 무덤들이 모두 동명왕릉을 향하고 있는 배치라는 점이었다. 동명왕릉을 평양으로 옮겨오면서, 동명왕릉 옆에 함께 묻혔던(혹시 순장?!) 동명왕의 개국공신들의 무덤이 바로 진파리 고분군의 무덤이라는 것이다.(실제로 진파리 고분군 중에는 동명왕의 개국공신 가운데 한 명인 오이와 부분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도 있다) 여타의 근거들을 통해서, 북한은 이 무덤을 동명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1993년 5월 14일(북한에서 동명왕의 2,295번째 생일이라고 말한 그 날)에 개건했다.(동명왕의 생일이 음력 4월 1일이라는 건 대체 어디서 보고 말한 거지?)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