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3] 한반도 대운하 찬반론
경부운하, 노태우에 공식 제안한 적 있다
[일요신문] [제1088호] 2013년03월20일 08시51분

▲ 낙동강살리기 희망 선포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살리기 깃발을 받아들고 흔들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이명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뭘까. ‘4대강 사업’이 아닐까. 4대강 사업은 원래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었지만 좁은 땅덩어리에 운하가 말이 되느냐는 비판을 받으면서 4대강 사업으로 이름을 바꿨다. 지난 1월 감사원의 ‘4대강 사업은 총체적으로 부실했다’는 감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4대강 브랜드’는 실패작으로 평가받는 분위기다. 이명박의 최대 역점 사업이 낙제 수준의 성적표를 받은 셈이다. 사실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이 서울시장으로서의 그릇이었다면, 대통령 정도 되면 운하 정도는 건설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게 임기 내내 밀어붙이기로만 했을 리가 없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건물을 세우며 보람을 느끼던 건설 CEO 출신이었고, 불도저 리더십은 그런 뜻에서 나왔다. 마음을 먹으면 이뤄내야만 분이 풀리는 스타일. 누군가는 그를 두고 ‘작심실천가’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무시무시한 별칭은 작심까지 오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면 실천하는 과정에서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명박의 머릿속에 ‘한반도 대운하’가 전혀 지워지지 않는 연유는 무엇일까. 그 역사를 짚어보자.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1980년대 초다. 이명박은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다. 해외 출장이 잦았다. 한번은 이명박이 네덜란드 헤이그로 출장을 갔다. 그곳에서 바지선이 운하를 오가며 화물을 실어 나르는 것을 목격한 이명박은 “바로 이거다!” 하며 무릎을 쳤다. 

그로부터 얼마 뒤, 이명박은 머릿속에서만 생각하던 대운하 구상을 공식적으로 꺼내놓는다. 1987년 겨울이었다. 이명박은 현대건설 사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이었다. 당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상공회의소를 방문했을 때, 이명박은 경부운하 건설을 공식적으로 제안할 기회를 노렸다. 논리는 이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듯이, 새로 들어서는 노태우 정부에서는 경부운하 건설을 검토해야 합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한 귀로 흘렸다.

이명박은 현대건설에서 물러나 국회의원이 된다. 15대 국회, 당시 신한국당 소속이었던 이명박 의원은 1996년 7월 18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아주 구체적으로 밝힌다.

“철도, 도로의 수송 능력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로스앤젤레스간 해상운송비보다 높다는 사실을 누가 믿겠습니까. 지금도 교통체증으로 연간 13조 원이 넘는 경제손실이 발생하고, 매년 2조 원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부운하가 건설되면 물류비용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습니다. 유지보수비가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운하는 관광·레저산업에도 이용될 뿐 아니라,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겠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를 만들어 놓고 말 것입니다.”

그때 이명박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던 인물이 바로 이재오였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거다. 나라를 다시 한 번 바꾸는 길은 운하 건설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재오는 이명박에게 “형님 대통령 하소. 형님은 국회의원 해 가지고는 평생 그 일 못합니다. 내가 볼 때는 형님 체질이 국회의원 체질도 아니고 서울시장이나 대통령을 해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야 합니다. 국회의원은 내가 뒤를 받쳐 줄 테니 형님은 대통령 하소 그랬다”고 했다.

이명박은 운하 건설을 촉구하고자 ‘경부운하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동료 60여 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하지만 정부는 그의 경부운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명박은 당시 국회의원 모임인 ‘아침공부 모임’에서 줄기차게 운하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고, 토론을 청했다. 세종연구소와 삼성그룹도 비슷한 연구를 하면서 동력을 얻는 듯했으나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이슈화하지는 못한다. 1995년 8월 세종대 부설 세종연구원은 ‘신국토개조전략’이라는 프로젝트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서울과 부산을 운하로 연결해 ‘수상 고속도로’를 만들자”는 것을 골자로 한 프로젝트였다. 

이명박은 2001년 다시 경부운하를 제안한다. 그땐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분과위원장으로서였다 (이명박과 같은 분과에 있던 김형오, 강만수, 백용호 등은 훗날 이명박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이명박은 당시 “2002년 한나라당의 대선 공약으로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내놓자”고 주장하는데, 미래경쟁력분과 간사를 맡고 있었던 곽창규 당시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은 “한나라당에서는 운하처럼 논란이 예상되는 이슈를 먼저 제안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운하 계획을 아웃시킨 바 있다”고 답한다. 이명박은 그 대답을 듣고도 “괜찮다. 안 받아도 된다. 나중에 내가 써먹어야겠다”라고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명박은 집요한 사람이다. 마치 생떼를 쓰듯, 마음먹은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뤄내야 직성이 풀렸다. 누군가는 “지금 생각해보면 청계천 사업은 대운하의 시험무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청계천 복원이 마무리되자 전문가들을 불러 모아 본격적인 운하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영산강살리기 희망선포식이 열린 광주 영산강 6공구 서창지구 입구에서 광주전남지역 환경단체 회원들과 지역 주민들이 4대강 반대 시위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2006년 10월, 이명박은 아예 기자들을 대동해 운하가 있는 곳으로 간다. 독일의 라인-마인-도나우 운하(RMD)를 직접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한반도 대운하를 ‘국운융성’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포부를 밝힌다. 처음엔 물류 효율성을 염두에 둔 ‘경부운하’였지만 점점 생각이 커지면서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개념까지 넣어 ‘내륙운하’로 발전시켰고, 이어 한반도 통일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며 ‘한반도 대운하’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대운하 구상은 대선 정국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거리가 됐다.  

그 당시 이명박의 주장은 이랬다. 

“유럽 국가들은 수만 ㎞에 달하는 운하로 연결돼 유럽연합(EU)이란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한반도 대운하를 통해 해묵은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국민정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대운하는 국운융성, 국민통합을 위해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너무 찌들어 있었던 것 같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희망도 없고, 사람들이 전부 다 그냥 멍해졌다. 짜증만 나는 거다. 국가가 발전하는 데는 뭔가 계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 지도자가 공장 안에 들어가서 물건을 경쟁력 있게 만들어라 하는 것은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 그건 기업가가 할 일이다. 나라 전체 국민이 한 번 국운융성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만드는 게 지도자가 할 일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한반도 대운하가 국운융성의 계기가 될 것이다.”

“자연하천 준설과 인공수로 부분은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동시에 시작하면 2년도 안 걸린다.”

물론 대운하 반대파의 논리도 거셌다. 환경이 파괴된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장담할 수 없다. 예산을 감당할 수 없다. 건설기간이 터무니없다. 고용창출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다 등등. 지도자는 직언과 충언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미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명박은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줄 알았다. 귀를 열어놓지 않았고, 시야는 좁았다. 가슴은 뜨거웠지만 맹목적이었다. 이런 반대파의 논리를 전혀 수렴하지 않았다. 

운하의 나라인 독일의 하우프 전 교통부 장관이 밝힌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다. “마인-도나우(MD) 운하는 바벨탑 이후 인류가 저지른 가장 무식한 사업이다.” 이 말은 독일의 MD운하(일명 RMD)를 모델로 그것을 벤치마킹하겠다는 이명박의 대운하 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하우프 전 장관의 이 발언은 2007년 4월 11일 ‘21세기 한국의 수자원 보전과 한반도대운하’란 주제로 열린 한국 육수학회 창립 40주년 특별 학술심포지엄에서 박창근 관동대 토목공학과 교수가 설명하면서 돌출됐다. 

대운하 반대파의 논리는 “18~19세기에는 토목기술의 발달과 산업혁명으로 인한 증가된 물류를 효율적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운하 건설이 활발했다. 그러나 철도의 출현으로 운하의 역할은 축소됐고, 도로의 건설은 철도의 역할을 축소시켰다. 교통사적 입장으로 보면 18세기까지를 운하의 시대라고 하면, 19세기는 철도의 시대, 그리고 20세기는 도로의 시대다. EU-25개국 화물수송 현황(2005년)을 살펴보면 도로 44.3%, 철도 10.0%, 내륙운하 3.4%, 파이프라인 3.3%, 해운 39%, 항공 0.1%를 점하고 있다. 이 통계는 운하가 물류운송수단으로는 사양사업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귀가 번쩍 뜨이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한 인터넷 진보 매체는 RMD로 취재진을 급파한 뒤, 2006년 이명박과 그 일행이 그곳을 다녀가고서 한반도 대운하연구회발로 낸 ‘한반도 대운하 국운융성의 길’ 팸플릿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을 보도한다. 이명박 측은 듀스브르크 내항을 ‘내륙의 발전을 가져온 대표적 사례’로 소개했지만, 그 매체는 그곳 시민들의 말을 인용해 “완전히 몰락한 도시” “기동성이 좋은 도로가 있는데 왜 운하로 물류를 이동시키겠느냐” “자본주의 사회에선 시간이 곧 돈이다. 운하처럼 한가하지 않다”는 등의 정반대 분위기를 전한다.

최기서 언론인


잠깐 - 국정운영 철학 ‘돌관’

이명박의 국정운영 철학으로 불렸던 ‘돌관’(突貫). 돌관은 ‘하면 된다’로 짧은 기간에 공사를 마치는 건설업계의 정신을 뜻한다. 바로 이명박이 몸담았던 현대건설의 기업정신이다. 이종수 현대건설 사장은 “어떤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목표를 향해 흔들리지 않고 돌진해,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것이 현대건설의 대표적 정신 ‘돌관’이다”고 밝힌 바 있다. 

이명박이 4대강을 집중적으로 개조한 것은 이런 그의 철학에 있다. 장비나 시설이 부족해도 무조건 ‘하면 된다’는 식이다. 이명박은 대운하 반대파들의 논리에는 항상 정면 대응하며 “경부고속도로, 청계천 복원, 서울숲 조성 사업도 반대 여론이 높았지만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하며 반대파들을 돌파해나간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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