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55320&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9


"한국말 쓰지 마세요, 중국 공안이 알면..."
[탐방] 중국 가이저우(개주)시 고려산성과 조선족 마을
11.11.16 15:55 ㅣ최종 업데이트 11.11.16 15:55 최육상 (run63)


▲ 지도 왼쪽 아래 동그라미가 중국 랴오닝성(요녕성) 가이저우(개주)시에 위치한 건안성(고려성산산성). 지도 오른쪽 동그라미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인과 집안. 책 <고구려를 찾아서> 지도 촬영. ⓒ 최육상

고구려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겠다는 일념으로 찾아 온 가이저우(개주)시는 고구려의 낯선 후예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헛걸음을 한 것일까. 중국 랴오닝(요동)성 진저우(금주)시에서 차를 몰고 3시간이나 달려왔는데….'

 

가이저우 시내에 접어들어 시민들에게 '가오리성(고려성)을 아느냐'고 묻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 편이었다. 인적이 드문 좁은 도로를 지나는데 '고려성촌'이라는 마을 표지석이 기적처럼 눈에 들어온 것이다.

 

"여기서는 한국말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 고려성촌 마을 입구(위)와 1998년 5월 1일 연도가 새겨진 표지석. 한적한 2차선 도로 옆을 지나다 기적처럼 발견한 고구려 역사의 현장이었다. ⓒ 최육상

"이곳 고려산성은 외부인의 접근이 차단된 곳이에요. 지금부터는 한국말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중국 공안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 사진부터 찍고 한 바퀴 쭉 둘러보죠."

 

안내를 맡은 지인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구려 역사의 기상과 한이 함께 서려 있을 법한 고려성촌은 한눈에 봐도 삶의 터전을 일구기가 매우 팍팍해 보였다. 평일 정오 무렵, 울퉁불퉁, 구불구불하게 나 있는 마을 길을 따라 오르며 살펴본 고려성촌은 한국의 산간벽지 마을을 보는 듯했다.

 

조그만 돌배를 늘어뜨린 나무들은 윤기가 별로 없었고, 계곡물이라고 하기에는 수량이 턱없이 부족한 계곡의 양편에서는 오리와 닭들이 자유롭게 먹이를 쪼고 있을 뿐이었다. 멀리 무거운 짐을 양쪽 어깨에 짊어진 한 주민의 모습과 대비되며 눈앞에 메마르게 펼쳐진 산등성이들은 고려성촌의 생활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스쳐 지나는 주민들의 생김새는 한국의 여느 읍면 시골에서 마주할 수 있는 어르신들을 꼭 빼닮았다. 신기할 정도로.

▲ 고려성촌의 삶은 척박해 보였다. ⓒ 최육상

▲ 고려성촌 안쪽 산에 자리한 고려산성. 1400여 년의 세월을 견디느라 거의 다 무너져 내린 모습이었다. 건안성의 일부 자락으로 추정된다.  ⓒ 최육상

마을 뒤쪽으로 보이는 산등성이는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어느 곳에 산성이 자리했다는 것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굽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늘이 도왔다. 무작정 오른 한 산의 정상, 눈앞에 1400여 년 세월의 무상함을 알리는 듯 거의 허물어진 산성의 흔적이 보였다.

 

살펴본 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가이저우시 청석령향 고려성자촌에 자리한 건안성 자락일 것이다. 건안성은 645년 여당전쟁 당시 고구려군과 당군 사이에 처음으로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당태종이 "건안성을 얻으면 안시성도 내 손아귀에 든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을 만큼 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실제 건안성은 안시성과 요동성을 잇고 고구려를 방어하는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펴낸 <고구려를 찾아서>에 따르면 고구려의 성(城)은 현재 중국 땅에 약 170여 개, 북한 지역에 40여 개, 그리고 임진강과 한강 유역 등 한국에 작은 성곽과 보루(堡壘) 수십 개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중국, 고구려 유적지 내 조선족 집단 이주시키기도


▲ 고려산성(건안성)에서 내려다 본 고려성촌 풍경. 고즈넉해 보이지만 마을길을 가로지른 느낌은 매우 팍팍한 삶의 터전이었다. ⓒ 최육상

숨 고를 겨를도 없이 우리 일행은 신속하게 고려산성을 내려와 고려성촌을 빠져나왔다. 혹시라도 공안에게 소식이 전해질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안내를 담당하던 분은 "출입이 통제된 중국 내 '고구려 유적지' 답사를 허락 없이 돕거나, 눈 감아 줬다는 이유 등으로 현지 조선족들이 집단으로 이주한 아픔을 겪기도 했다"고 전했다.

 

'고구려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중국 정부의 비뚤어진 역사 왜곡 작업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더욱이 이제는 죄 없고 힘없는 조선족에게까지 그 폭력이 가해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 왜곡 작업이 어디 중국만의 문제일까. 친일파 문제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한국의 최근 상황은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에 더욱 심각하다. 역사 교과서에서 이승만·박정희의 독재정치 내용을 비롯해 신군부의 폭압에 맞서 일어난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내용을 삭제한다고 하니…. 이것은 스스로 역사 왜곡 자해를 범하는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 지킨다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떠나버린 조선족 마을


▲ 중국 랴오닝성(요녕성) 가이저우(개주)시에 위치한 쌍천안마을 입구 건물에 오성홍기가 걸려 있다. 마을 안쪽에서 오성홍기가 보인다(아래 사진). ⓒ 최육상

고려성촌에서 나온 우리 일행은 이번에도 물어물어 가이저우시의 조선족 집단 주거지를 찾았다. 도로 옆으로 뚝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쌍천안마을'에 도착하니 마을회관과 동사무소를 겸한 듯한 곳에 걸린 '오성홍기(五星紅旗·중국의 국기)'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5개의 노란색 별 중 가장 큰 별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및 중국공산당을, 작은 별 4개는 노동자·농민·지식인·자본가 등 4계급으로 구성된 국민을 상징한다.

 

공산당의 통제 속에 농민과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는 쌍천안마을은 고려성촌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여느 시골 마을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특히, 돈을 벌기 위해 대부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 노인들만이 집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한국의 농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곳의 젊은이들은 중국 내 도시보다 인천, 김포, 서울 등지로 더욱 많이 떠났다는 점만 다를 뿐.

 

"예전만 해도 저 뒷동네까지 합치면 한 500여 호가 살았어. 그런데 10년 전부터인가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면서 지금은 기껏해야 200여 호나 될까? 노인들만 집을 지키는 게 그 정도고, 대부분 젊은이들은 한국으로 일하러 가서 이젠 그마저도 안 될 거야."

 

마을 이장 격에 해당되는 한 어르신의 말씀에서는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이 묻어났다. 그의 말마따나 사람이 떠나버린 지 오래된 몇몇 집들은 이미 군데군데가 무너진 모습이었다. '서울로, 도시로' 향하면서 폐가가 늘어버린 한국의 농촌과 다르지 않은 씁쓸한 풍경이었다.

 

"아들이 한족 며느리만 남겨두고 한국으로 일하러 갔다"는 한 주민의 집은 마치 한국의 시골집 같았다. 활짝 열린 마당 한 편에는 그리 넓지는 않지만, 텃밭도 자리했고, 다소 가문 듯했지만 우물도 있었다. 빨랫줄에 내걸린 옷가지와 콩과 대추를 말리는 풍경은 더욱 한국과 닮았다.

 

▲ 마당에서 콩과 팥 등을 말리는 풍경은 한국의 농촌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람이 떠나버려 폐가로 변해버린 모습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 최육상 


고구려의 후예... 한국에서도 따가운 눈총 받아


▲ 중국 랴오닝성(요동성) 진저우(금주)시에 위치한, 바다쪽에서 바라 본 진저우항 입구. 출입문에 고구려를 상징하는 '삼족오'가 새겨져 있다. ⓒ 최육상

눈으로 확인해 본 중국 내 조선족의 삶은 매우 팍팍했다. 어딘지 모를 산자락에 자리한 고려성촌도 그랬고, 시내가 그리 멀지는 않지만 도로 옆에 섬처럼 뚝 떨어진 쌍천안마을도 그러했다.

 

그러나 한국을 찾은 조선족의 삶도 고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 구로구, 금천구, 영등포구 등 조선족 밀집 지역을 걷다 보면, 한국 사람들은 '조선족이 많이 시끄럽고 촌스럽다'며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조선족들이 즐겨 먹는 양꼬치 등 그들의 음식 냄새도 기피 대상 중 하나다. 한 언론사는 이를 두고, '한(한국)-한(조선족) 갈등 고조'라며 되레 조선족이 한국 내에서 더욱 차별을 받는다고까지 했다.

 

1400여 년 전, 수만 명의 고구려인들은 나라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중국으로 끌려가야 했다. 그들은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땅을 개척하면서도 '개와 돼지만도 못한 고구려 노예놈'이라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21세기 오늘, 고구려 유적지 보존이라는 이유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있다. 그리고 같은 민족이면서도 별다른 이유 없이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아가는 한국의 조선족들이 있다.

▲ 조선족 시어머니와 한족 며느리. 아들은 한국으로 일하러 떠났다고 한다. 매니큐어를 선물하자, "이런 거 사용한 지 오래되었다"며 신기해 했다.  ⓒ 최육상

고구려의 후예면서 조선족으로 구분되는 이들의 삶은 과연 누가,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 것일까. 뜻밖에도 쌍천안마을 주민의 휴대전화에서 들려왔던, 아들이 인터넷으로 해 줬다는 벨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황진이 황진이 황진이 / 내일이면 간다 너를 두고 간다 / 황진이 너를 두고 / 이제 떠나면 언제 또 올까 / 사랑아 사랑아 내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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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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