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9064
용담산 산기슭을 따라 축조..산세가 험요해 난공이수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30>
데스크승인 2010.08.30
옛적 요남의 격전지
중국 장편소설 《수당영웅방명보(隋唐英雄芳名譜)》에는 수나라와 당나라에 걸쳐 요동지역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곳 득리사산성에서 벌어졌던 일부 전쟁도 묘사되어 있다. 그중 제175장의 한 단락을 살펴보자.
“득리사산성은 용담산 산기슭을 따라 축조되어 있다. 성은 그리 크지 않아 성벽이라야 4리(2km) 남짓할 뿐인데 산세가 험요해 난공이수의 형국을 하고 있었다…. 산성을 둘러싼 수군(隋軍) 대장은 벌써 여러 번 바뀌었고 매번 낭장(郞將)급의 고급 군관이 투입되었다. 이번에 투입된 장수는 두락(杜樂)이었는데 그가 아무리 해도 즐거워할 낙(樂)은 조금도 없었다. 이륵(李勒)이 산 아래 널린 수군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군이 어찌 이리도 많이 죽었는가. 고구려인들이 이렇게 잘 싸운단 말이냐.’
두락이 울상을 하고 말했다. ‘싸움은 잘 합니다만 이 성이 평원에 있다면 무섭지 않은데 산기슭을 타고 있으니 우리는 서쪽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파른 산비탈을 타야 하니 군사들이 어찌할 수가 없군요. 그러니 고구려인들이 더욱 날뛰잖습니까.’
이륵은 안서군에 명해 임시로 주둔하도록 하고 장수들을 데리고 성을 둘러보니 과연 두락의 말처럼 산성은 험한 산기슭을 타고 축조되어 있었고 오직 서쪽으로 길이 있을 뿐이었다. 이 길은 좁아 한 번에 300명이 채 못 되는 군사밖에 투입할 수 없어 고구려인들은 군력을 집중시켜 지킬 수 있었다….”
소설에서 이야기한 성문은 두 말할 것 없이 서문이다. 산성 동문은 비록 산성의 정문으로 평지에 가까운 곳에 있지만 이곳에는 성 안 고구려군의 주력이 배치되어 있을 것이고, 주요한 방어시설들을 설치해 놓았을 것이다. 이를 피해 당군은 서문을 택했을 것이고, 서문에서는 가파른 산세에 옹성문 구조까지 갖추어 놓았으므로 고구려인은 많지 않은 군사로도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다.
소설의 또 다른 한 장절을 보기로 하자. 제177장 ‘성을 훼멸시키다(毁城)’의 한 단락이다. “이륵은 말채찍을 들어 성을 가리키며 외쳤다. ‘내 명령을 전하거라. (성을 함락하면) 성 안의 양식을 내놓고 모든 재물과 사람들은 몽땅 용사들에게 나누어줄 것이니라.’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안서병 장졸들은 사기가 솟구쳐 함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득리사산성을 공격했다. 성문 앞에는 돌과 모래주머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성문으로 쳐들어갔지만 성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때 그들은 이 성을 차지할 수 있을지에 관심을 가진 게 아니라 전리품을 얼마나 차지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 격렬한 싸움 끝에 (당군은) 성문 쪽의 고구려 군사들을 절반이상 죽였다. 득리사산성을 지키던 장수와 부장이 치열한 싸움에서 차례로 사살되자 수하 군사들은 싸울 투지가 해이해져 뿔뿔이 성 안으로 도망쳤다.
안서병은 입성한 후 추풍이 낙엽을 쓸 듯 성 안의 사람들을 보이는 족족 죽이고 닥치는 대로 재물을 약탈했다. 눈이 벌게진 안서병들은 도망치는 고구려 군사들을 따라가며 죽이고 가는 곳마다 불을 질렀다. 자그마한 득리사산성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때는 한겨울인지라 수풀들이 말라있어 불길은 세차게 번졌다. 불은 그 이튿날 오후까지 이어져 산성은 거의 타버렸다. 성 안의 고구려 군사들은 성을 빠져 달아난 일부만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에 타죽거나 항복하였다. 이 전투에서 득리사선성을 지키던 고구려 군사는 거의 전멸했다….”
소설 175장에서 서술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양적으로 많은 군사들이 한꺼번에 공격했다는 점이나 성문 앞에 모래주머니와 돌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번 전투는 동문에서 치러졌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소설에 나오는 전투가 역사사실이었다면 이 전투는 고구려 후기의 일이었을 것이다. 즉, 대련지역의 비사성이나 장하지역의 성산산성 등이 선후로 함락되고 그 후에 일어난 일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천하의 당 태종도 어쩌지 못했던 견고한 고구려산성들은 그 아들 당 고조에 의해 무너지고, 고구려는 서기 668년에 멸망하고 만다.
당시의 격렬한 전쟁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곳 산성 안에서는 화살촉과 말등자 같은 철기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물론 줄무늬 기와조각 등 건축 유물들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뭐니 뭐니 해도 역사유물 중 가장 중요한 실증은 그 당시 여기서 벌어진 사실을 지켜본 산성 성벽 자체가 아닐까 싶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 산성은 여러 왕조를 거쳤지만 그냥 그대로 사용되어 왔다. 《금요지(金遼志)》 기록에 따르면 원(元)나라 때 토착민들이 군사를 피신시키는 곳으로 사용했으며, 명나라 홍무(洪武) 3년 요양행성평장(遼陽行省平章) 유개(劉蓋)가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홍무(洪武) 4년에는 요동위(遼東衛)가 이곳에 설치됐는데 그 관공서가 이 산성 안에 있었다 한다. 원나라와 명나라 시기 이 성을 득리영성(得利瀛城)이라 불렀다.
득리사산성 소재지, 중국 베어링의 고장
와방점시의 본래 명칭은 복주(復州)다. 요나라 거란 신책(神冊) 4년(기원 919년) 아율아보기가 발해국을 멸망시킨 후 여진의 후환이 두려워 수천 가구를 요남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세력을 갈라놓고 서로 통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 부여성(현재의 길림 농안현)의 백성을 복주성으로 이주시키고 부주(扶州)로 칭했다가 후에 복주로 고쳤다. 복주성은 명나라 때 복주위로 되었고, 청나라 때는 복주치소(治所)로 바꿨다. 1913년 복주는 복현(復縣)으로 고치고 현공서는 그대로 복주성에 두었다. 1925년 복현공서를 와방점으로 옮기면서 와방점은 중심지로 변했다. 1948년 8월 요령성정부가 이곳에 오면서 와방점시가 생겨났고 복현 정부기관은 다시 복주성으로 옮겼다. 1949년 요령성정부가 안동(현재의 단동, 1965년에 단동으로 고쳤음)으로 옮겨가면서 와방점시는 취소되고 와방점진(복현 소속)으로 고쳤으며 복현 정부기관은 재차 와방점진으로 옮겼다. 1985년 1월 국무원의 비준으로 복현은 와방점시로 고쳤다.
와방점이란 지명은 청나라 강희(康熙) 연간에 이곳에 곡(曲)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가게를 꾸렸는데 그 가게가 기와집이어서 유래된 이름이다. 와방점시는 인구 102만에 9개 가도(街道: 한국의 동<洞>과 유사), 23개 향과 진을 거느린 현(縣)급 시(市)로 요동만 해변에 위치해 있다. 해삼, 대하 등 해산물과 화강석, 대리석 및 금, 은 등 광산자원이 풍부하다. 특히 베어링제품은 중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이곳에 크고 작은 베어링공장 400여 개가 모여 있어 ‘중국 베어링의 고장’으로 이름났다.
관광자원으로는 득리사산성 외에도 시급 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된 옛 복주성이 유명하다. 그중 1687년에 지어 청나라 팔기군의 지방 최고장관이 사무를 보았다는 복주성수위(守尉) 관아 옛터는 1913년에 민국시기 순방영(巡防營)으로, 위만시절에는 경찰서로 사용됐으며, 1949년 후에 복주성진 소학교로 되었다가 현재는 복주성진 유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복주성 동남쪽 토성 터 위에는 요나라 흥종(興宗) 중희(重熙) 13년(서기 1044년)에 세워졌다는 영풍탑(永豊塔)이 있다. 13층 팔각형 전탑으로 높이가 28.45m다. 2000년 현지 정부에서는 이 탑을 본래 모습대로 복원해 놓았다. 2003년에 이 탑은 성급 문화재로 지정됐다.
영풍탑의 서쪽으로 같은 시대에 세워진 사찰 영풍사(永豊寺)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건축면적이 600㎡로 1993년에 중수했다는 영풍사는 청나라 때 ‘영풍석조(永豊夕照)’라는 이름으로 ‘복주8경’ 중 하나로 지정됐다고 한다. 영풍사 마당에는 4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늙은 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역시 현급 보호문화재로 지정됐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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