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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나라에 활약한 발해인들 전편"에서 "왕정" 내용과 서론,결론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숨은 인재 왕정(王政)
금나라에서 활약한 발해인들 2
 
금나라에서 활약한 발해인들

[금나라의 발해인들 1] 아골타의 이상을 바꾼 발해인, 양박 - 동북아역사지킴이  http://tadream.tistory.com/9935
[금나라의 발해인들 2] 숨은 인재 왕정(王政) - 동북아역사지킴이  http://tadream.tistory.com/9936
[금나라의 발해인들 3] 여진의 정계를 좌지우지한 장호 - 동북아역사지킴이  http://tadream.tistory.com/9937
[금나라에 발해인들 4] 거란과 송나라를 호령한 발해인 대호 - 동북아역사지킴이  http://tadream.tistory.com/9938
[금나라의 발해인들 5] 기회를 잘 포착한 곽약사 - 동북아역사지킴이  http://tadream.tistory.com/9939
[금나라의 발해인들 6] 늦게 출세한 고표 - 동북아역사지킴이  http://tadream.tistory.com/9940

926년 갑작스런 거란족의 공격으로 대륙을 지배한 한민족의 고대왕조 발해는 멸망했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그 유민들은 굴하지 않고 200여년 간 복국 운동을 펼쳤다. 발해의 멸망은 우리에게 많은 아쉬움을 가져다 주었다. 발해의 멸망으로 우리 민족이 대륙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발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리고 발해 멸망 후 발해 유민들의 삶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 그러나 발해는 멸망한 후에도 그 혼이 꺼지지 않았고, 발해인의 혼은 금나라로 이어졌다. 미개한 여진족이 금이라는 정복왕조를 건설하고 200년 가까이 중원을 지배할 수 있었던 건 바로 발해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금나라에 활약한 발해인, 그 발해인을 찾아 역사 여행을 떠나 보기로 하자.


숨은 인재 왕정(王政)

왕정은 진주의 웅악에 본향을 두고 있으며, 본명은 남살리이며, 아버지는 영수라 하였다. 그의 조상은 거란의 통치 하에서 발해 관료로 두각을 나타내 거란의 명문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요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발해유민의 복국운동을 이끈 고영창은 왕정을 자신의 거사에 끌어들이고자 했으나 왕정은 고영창의 의거가 성공할 수 없으리라 예견하고 그의 거사에 가담하지 않았다.  
 
고영창의 의거가 실패했을 때 많은 발해인들이 고영창을 잡는데 자신들이 공을 세웠다고 주장했으나 왕정의 태도만은 여느 발해 사람들과 달라 이를 이상히 여긴 여진 사람이 그를 아골타에 추천하였고, 그가 명문 출신임을 확인한 아골타는 그에게 노주발해군모극(盧州渤海軍謨克)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자발적으로 아골타를 찾아간 양박이 적극적이었다면, 왕정은 소극적이었다가 적극성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금나라군이 중국 연운 땅으로 들어가 활주를 점령하자 왕정은 안무사로 남아 치안과 질서 유지에 임했다. 그 때 왕정이 상(喪)을 당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벼슬을 그만둘 것 같다고 예상했으나(상을 당하면 맡고 있는 벼슬을 그만두고 몸을 삼가는 것이 그 당시 전통적 관습이었음), 친상에 구애받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다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자세에 아골타의 둘째 아들 송왕 종망은 큰 감명을 받아 그를 극구 찬양한 바 있다.
 
왕정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인망을 얻기도 했다. 그 대상이 중국 백성이든 거란 백성이든 가리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 창고를 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여진의 통치에 반항적이던 활주의 중국사람과 그 인근 지방의 반항세력까지 스스로 투항해 왔다.
 
왕정은 발해 관료로 여진에 협력한 공적을 인정받아 태종 시대에도 계속 관료로 남아 있었다. 특히 그의 뛰어난 행정적 수완이 재정면에서 잘 나타났다. 천회 4년(1126) 종전(終戰)을 맞이했으나, 나라의 창고를 관할하는 기강은 확립되지 않았다. 왕정은 회계를 정확히 하고 창고를 엄격히 관리하여 출납을 조금도 손실됨이 없게 하였다. 그 결과 창고에는 금과 비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국가의 재정을 충실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청렴결백하여 집안이 가난했다. 그래서 그를 아골타에 추천한 오왕 도모는 그에게 황금 백냥, 은 오백냥과 자신이 타던 말을 주기까지도 하였다.
 
희종 천권 원년(1138), 66세로 사망한 왕정은 금나라의 건국 기초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금사』의 「순리편」에서는 왕정을 우수한 관리로 평하고 있다.


발해 유민

고구려가 망했을 때 당나라에 고선지, 왕모중, 왕사례, 이정기 등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활약했다. 하지만 이들 중 이정기 장군을 빼고 나머지 세 명은 자신들의 조국을 멸망시킨 적국에 큰 활약을 했다.
 
그런데 우리는 발해 유민들의 향후 행방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발해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있었고, 그것이 실패로 끝났다고만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발해 유민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혼을 잃지 않았고, 그들 중 일부는 금나라로 가 자신들의 적국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정복왕조 금을 건설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여진족이 20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국가를 세우고 중원을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발해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금나라 건국의 주역 뒤에는 발해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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