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1215172758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44) 시베리아의 개척과 러시아의 동진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12.15 17:27


‘미지의 동토’ 몽골 멍에 벗고 마침내 장악


시베리아의 농촌 풍경.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이틀간 머문 다음 시베리아의 서쪽 끝자락 예카테린부르크를 향한 장도에 올랐다. 아득히 펼쳐진 설원과 타이가(침엽수림대), 그리고 스텝(초원지대) 속에 점점이 박혀있는 도시와 마을들, 그 모든 것을 동서로 이어준 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분명 신비의 땅 시베리아가 400여년 전 잠에서 깨어나 문명의 세계를 향해 기지개를 켠 인고의 산물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개척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는 숱한 오해와 왜곡이 난무했고, 피와 눈물, 한이 맺혀 있다. 전설 같은 데카브리스트의 이르쿠츠크 개척사에도 얼마나 많은 애환이 서려있는가. 이 모든 것이 달리는 열차와 함께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16세기 말엽 카자흐 기마병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시베리아는 고요한 잠속에 묻혀 있었다. 모든 것이 신비에 싸여있던 세상이다. 평균 높이가 5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우랄산맥을 사이에 둔 러시아조차도 그 동쪽 세계에 관해선 무지 그 자체였다. 일찍이 11세기부터 노브고로드인들을 비롯한 러시아 사람들이 간혹 모피 같은 토산품을 구하기 위해 우랄산맥을 넘나들었지만, 그 동쪽에 있는 세상에 관해서는 괴담과 수수께끼로만 입방아를 찧었다. ‘머리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어깨 사이에 입이 있고, ‘여름 내내 물속에서 살며’ ‘땅속을 걸어 다닌다’는 등 실로 허무맹랑한 괴담으로만 알고 있었다.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속을 달리는 말 썰매.


이에 비해 서구에서는 일찍부터 이 지역에 관해 관심을 갖고 탐험도 하면서 이러저러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16세기 초 영국은 아시아를 향한 항로 개척을 위해 북빙양을 에돌아 시베리아의 오브 강을 거쳐 중국으로 진입하려는 탐험을 몇 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시베리아에 관한 서방의 최초 기록은 폴란드의 역사학자 마트베이가 1517년에 쓴 <두 싸르마찌예에 대하여>란 논문이다. 그는 당시 폴란드에 온 러시아인들로부터 얻은 자료에 근거해 러시아 동쪽 지역, 즉 시베리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몇몇 곳을 지명하면서 각각 고유 언어와 풍습이 있음을 밝힌다. 그러나 이곳 토착민은 경작을 하지 않고 빵과 금전에 대한 개념이 없으며 동물 가죽을 뒤집어쓰고 사는 ‘짐승 같은’ 원시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대사 시기즈문드가 남긴 단행본 <모스크바에서의 일들에 관한 기록>(1549년)에도 유사한 내용이 실려 있다. 저자는 1516년과 1526년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에 다녀온 후 이 책을 저술했다. 이 책 역시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사이에 시베리아를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오브 강 일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사실적인 것도 있지만 강 유역에 살고 있는 ‘검은 인간’들은 11월 말에 죽었다가 이듬해 4월에 되살아난다든가, 오브 강 상류로 추측되는 ‘꼬싸마’ 강 건너편엔 털북숭이 인간, 때로는 개의 머리를 하고 다니는 원시인이 살고 있다는 등 엽기적인 우화를 전하고 있다. 이렇게 북빙양의 해상탐험에 주안점을 둔 시베리아에 관한 서구인들의 지식은 비록 러시아인들에 비해 약간 앞서고 기록도 남겼지만 내용은 그것이 그것이다.


러시아이건 서구이건 간에 이렇게 시베리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개척할 수도 없었던 것은 몽골에 의한 차단이 그 주요인이다. 바꿔 말하면, 러시아와 서구에 대한 몽골의 유린과 지배가 제거됨으로써 비로소 러시아와 서구는 시베리아를 제대로 이해하고 개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제2차 몽골 서정군이 유럽 전역을 석권하고(1235~1244년) 그 결과로 출현한 킵차크 칸국이 230여년 동안이나 러시아를 지배함으로써 서구나 러시아는 동방 시베리아에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특히 러시아는 인접하고 있음에도 감히 시베리아에 손을 뻗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칭기즈칸의 맏아들 주치의 차남 바투가 이끈 15만명의 제2차 서정군은 일격에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을 초토화시키고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수도로 한 킵차크 칸국(1243~1480년)을 세워 러시아를 지배한다.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러시아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그 굴욕을 표현한다. ‘타타르’라는 말은 원래 몽골의 한 부족명인 달단(달달)의 음사였으나, 러시아에 그 이름이 전해지면서 ‘지옥’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타르타로스’와 연관시켜 몽골인들에 대한 비칭으로 사용했다. 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까지를 포함한 유목기마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통칭으로 되어버렸다. 당시 서구에도 이 이름이 전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경내에는 ‘타타르’라는 이름을 가진 몽골족 후예들이 살고 있다.


‘후회는 동정의 열매’라는 칭기즈칸의 냉혹한 가르침을 받든 몽골 지배자들은 러시아 사회를 무참하게 짓밟고 파괴했다. 몽골의 수탈에 관해 “한 거대한 기생충이 러시아 민중의 생체에 달라붙어 그 즙을 빨아먹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명력을 고갈시켰고 때때로 그 생체 안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고 한 역사가는 묘사한다. 이러한 굴욕적인 ‘몽골의 멍에’가 러시아의 서부 지방에서는 약 1세기, 북부와 중부 지방에서는 약 2세기, 시베리아와 인접한 남동부 지방에서는 근 3세기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일세를 풍미하던 킵차크 칸국의 위세도 내홍과 더불어 러시아 여러 공국들과의 대결에서 전패를 거듭함으로써 ‘몽골 불패의 신화’는 깨진다. 드디어 신흥 티무르 제국의 파죽지세(破竹之勢) 앞에서 칸국은 무너지고 만다. 말 위에서 싸워 제국을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안장에 앉아 제국을 통치할 수는 없다는 유목사의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 킵차크 칸국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이제 러시아의 통치권은 러시아 평원의 중심부에 자리한 모스크바 강변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일어난 모스크바 공국(1271년)의 손으로 넘어간다. 모스크바 공국은 주변의 여러 공국들을 병합하고 정교회를 영입해 급속하게 세를 키운다. 급기야 킵차크 칸국의 예속에서 벗어나 러시아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특히 1480년에 등극해 44년 동안이나 지배자로 군림한 이반 3세는 대통일의 모스크바 시대를 선포하면서 강력한 전제주의적 민족국가 건설을 지향한다. 그는 자기 호칭에 로마의 황제 이름인 ‘카이사르’에서 따온 ‘차르’란 이름을 덧붙여 자신이 전제군주임을 과시한다. 그를 이어 모스크바 시대를 선도한 사람은 그의 손자 이반 4세이다. 3살에 왕위에 올라(1533년) 17살 때 친정(親政)에 나선 그는 러시아 역사에서 뇌제(雷帝, 그로즈니)란 이름을 남긴 유명한 차르이다. 뇌제란 벼락처럼 두려운 군주이자 번개처럼 위광이 빛나는 군주라는 이중적 뜻을 함유하고 있다. 이 뜻이 말해주듯 이반 4세는 자신의 전제주의적 통치를 위해서는 나라를 피로 물들인 폭군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나라를 튼튼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유능한 군주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그의 54년간의 통치시대는 모스크바 시대의 장려한 서막을 장식한 전환기적 시대로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 확장을 수반한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일어난 것이 바로 ‘미지의 세계’ ‘잠자는 미녀’ 시베리아에 대한 동진과 개척이다. 넓이로 보면 유럽 러시아의 두 배가 넘는데 사람은 거의 살지 않고, 간간이 들려오는 풍문에 의하더라도 풍부한 부존자원을 품고 있는 땅, 그것도 나지막한 우랄산맥만 넘으면 가 닿을 수 있는 땅, 시베리아는 하늘이 내려준 ‘복덩어리’이다. 그 매력에 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선봉장의 투입이다.


그 선봉장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4년간(1579~1582년) 카자흐 부대를 이끌고 시베리아 원정을 단행한 에르마크이다. 카자흐란 한 민족 이름이기도 하지만, 당시는 러시아의 변방에 살던 기마전사 집단을 도거리로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 온갖 압제와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방 지방으로 도망간 농민들도 카자흐라고 불렀다. 아무튼 카자흐는 수렵이나 어업, 약탈을 생업으로 하는 집단들이다. 에르마크는 볼가 강을 항행하는 배를 기습해 약탈하는 카자흐 부대의 우두머리이다. 그의 시베리아 원정은 표면상 당시 러시아 문화예술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진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사촉하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문은 이반 4세의 특허를 받아 우랄지방에서 모피업과 제염업, 광산업, 농림어업 등을 경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스트로가노프는 에르마크에게 후한 대가를 주면서 당시 우랄산맥 너머 오브 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던 시비르 칸국의 쿠춤 칸으로부터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는 일을 맡겼다. 2년 후에는 다시 에르마크를 불러 시비르 칸국을 정복하면 차르가 후한 보상을 해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정부가 원정에 필요한 무기와 식량 일체를 대줄 것이라고 유혹했다. 에르마크로서는 일확천금의 호기라서 대뜸 승낙한다.


1579년 에르마크는 1000여명의 카자흐 부대를 이끌고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다. 오브 강의 지류인 이르티슈 강변에서 벌어진 쿠춤 칸과의 전투에서 초전 대승을 거둔다. 수적으로는 열세이나 화승총으로 무장한 카자흐는 활과 창으로 대응하는 적군을 쉽게 제압한다. 3년 후에 양 군은 시비르 칸국의 수도 시비리에서 다시 대결한다. 에르마크는 후퇴전술로 칸 군을 성 밖으로 유인한 다음 기습작전으로 시비리를 단숨에 함락한다. 그는 시비리 칸국을 통째로 이반 4세에게 헌상하고 후한 상을 받는다. 그러다가 3년 후 에르마크는 칸국의 잔존세력들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해 부상을 입고 도망치다가 이르티슈 강에 빠져 익사한다. 남은 부대는 시비리를 버리고 러시아로 돌아간다. 그러나 유럽 러시아에 대공국의 발판을 마련한 이반 4세에게 시베리아는 ‘낚을 수 있는 사냥감’으로 비쳤다. 그는 정규군을 보내 본격적인 시베리아 진출에 나선다. 1588년과 89년에 튜멘과 토볼스크에 건설한 요새에 의지해 불과 10년 사이에 시비르 칸국을 완전히 정복하여 러시아에 편입시킨다. 일단 전진 기지인 시비르를 장악한 러시아인들의 동진 속도에는 날개가 붙는다. 에르마크의 출전으로부터 70년도 채 안 돼 러시아인들은 5000여㎞를 달려 동쪽 끝 태평양에 다다른다. 그들은 이에 머물지 않고 다시 남하해 중국 청나라 국경 지대인 흑룡강(黑龍江) 일대까지 세를 확장한다. 그러면서 청나라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1689년) 국경분쟁을 해결한다. 저항도 거의 없는 무주공허(無主空虛)의 주인으로 둔갑한 셈이다. 정복사치고는 드문 일이다. 그런가 하면 시베리아 개척사에는 숱한 유형수들의 피와 땀, 한이 서려있다.


시베리아에서 출토된 각종 고대 유물.(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학 박물관 소장)


이 모든 시베리아 개척활동은 우랄산맥 동쪽으로부터 남러시아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지나 부분적으로 북방 침엽수림대(타이가)를 관통해 흑룡강 일원까지 이어지는 시베리아 초원로를 따라 이루어졌다. 이 길의 서단은 전통적인 초원로의 일부이나 동단은 새로 개척된 초원로이다. 러시아는 이 동단 초원로를 통해 시베리아, 특히 동시베리아에서 생산되는 담비와 족제비, 비버 같은 동물의 질 좋은 모피를 대거 수입해갔다. 그리하여 이 동단 초원로를 ‘모피의 길’이라고 부르는데, 이 길은 발해시대의 ‘모피의 길’과 연결된다.


19세기부터 본격화된 시베리아 개발은 오늘날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 각종 광물질, 목재 등 부존자원의 끝모를 보고이다. 더욱이 이 보고 중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20%밖에 안 된다고 하니 시베리아의 미래가 중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찍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시베리아의 자원은 소련의 미래와 우주를 정복할 비밀병기이다”라고 시베리아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한마디로 압축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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