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11229192139&section=01

김근태, '반독재 20년'만큼 치열했던 정치역정
[기자의 눈] 김근태가 후배 정치인들에게 남긴 유훈은…
윤태곤 기자  기사입력 2011-12-30 오전 8:21:37                    

투사는 많다. 민주통합당이나 통합진보당에도 많을뿐더러 119에 전화를 걸어 비상근무자에게 "나는 경기도지사요. 이름이 누구요?"라고 따져 물은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비롯해 한나라당에도 수두룩하다.

그들의 현재가 어떻든 간에, 말 그대로 목숨 걸고 군사독재와 싸운 이들은 존중 받아야 한다. 하지만 독재가 무너진 후 그들 중 다수는, 그들이 받아 마땅한 존중을 스스로 걷어차버렸다. 한나라당에 몸 담고 있는 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 "세상이 바뀌었다", "정치란 게 말이지~"를 입에 달고 다니던 이들이 많다.

부동산 값이 들썩거리는 것을 "이제 경기가 풀린다"고 해석하던 사람들, 특목고를 풀거나 대학 등록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게 해놓고선 "교육도 경영마인드가 필요하다"던 사람들, 한미FTA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짓밟으며 "쇄국정책 하자는 말이냐"고 눈에 쌍심지를 켜던 사람들, "조중동에서 중앙은 빼야지"라던 사람들이 그렇단 말이다. 이들 중 또 상당수는 이제 "다른 말 필요없다. 反이명박이 이 시대의 진보다. 우리가 다시 집권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여당 잘하기에 비하면 야당 잘하긴 너무 쉽다.

그래서 김근태의 빈 자리가 크다. 김근태의 아픔이 더 아프다. 김근태는 여당 잘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더 고민하고 노력했고 부딪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당 정치인 김근태는...

▲ 2006년 열린우리당 당권에 도전하던 시절의 김근태ⓒ프레시안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김근태는 뜬금없는 양심선언을 했다. "2년 전 최고위원 경선 때 실세인 권노갑 씨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었다"는 것이었다.

한 때는 너나없이 권노갑 돈 마다치 않았던 대선 주자들 모두가 동교동과 차별화를 시도할 때 나온 바보스런 고백이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자"는 김근태의 제안에 대해선 반응이 없었다.

"혼자 깨끗한 척한다", "바보"라는 비아냥이 동료 의원들에게서 나왔을 뿐이다.

탄핵열풍으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획득한 2004년 총선 후 노무현 대통령이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는 개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대통령의 소신이다"이라며 "장사하는 것인데 10배 남는 장사도 있다"면서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라는 열린우리당 총선 공약을 부인하자 김근태 '의장'은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해보자"고 결기를 세웠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모른 척 했고 김근태의 운동권 후배였던 다른 여당 의원이 "나같이 밑에 있는 사람과 토론하자"고 치받았다.

원내대표 시절 김근태는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지만 역시 또 운동권 후배들이 "청와대와 정부가 정했는데 당론으로 밀어야 한다"고 그를 흔들었다. 김근태를 흔들던 이 중 일부가 국회 표결 때는 '개인 소신'이라며 자기는 반대표를 던진 것, 그리고 지금은 진보정당에 가 있는 건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처음으로 당권을 쥔 김근태는 사회적 대타협을 내걸고 전경련, 민주노총 등을 연달아 방문하며 '뉴딜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때도 '누구 마음대로 그런 약속을 하냐'는 싸늘한 반응은 여권에서 나왔다.

지금 민주통합당 대표 경선에 나섰던 이들 중 상당수가 청와대와 보조를 맞췄던 한미FTA, 김근태 '의원'은 그때도 "나를 밟고 가라"고 맞섰지만 결과는 모두가 아는대로다. 여당 정치인 김근태는 항상 "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했지만 "세상 모르는구만" 내지 "역시 김근태는 안 된다니까"라는 소리는 그의 동지들에게서 나왔다.

몇 안 되지만 소중한 성공의 기록도

'여당 정치인'김근태가 '반대의 기록'만 남기고 항상 실패만 한 것은 아니다. 김근태가 제 몸을 밀어넣어도 신자유주의의 바퀴는 대체로 굴러갔지만, 때론 멈춘 적도 있다.

대통령부터가 "감전된 것 같다"고 극찬하고 정부와 여야 정치권의 '묻지마 지원'이 이어지던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신중론을 펼쳤던 몇 안되는 고위 인사가 '김근태 장관'과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이었다. 김근태는 이후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나는 진실이 국익에 우선한다고 이야기 했다가 네티즌들에게 몰매를 맞았다"고 회고했다.

김병준, 황우석, 노성일(미즈메디 병원 원장), 이상호(우리들 병원 원장) 등 노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인사들이 포진한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에서 영리병원 도입의 저지선 역할을 했던 것도 '김근태 장관'이었다.

김근태가 앞장서 2007년 개정된 지방세법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과 강남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통과된 법이었다. 공동과세를 통해 강남의 세수를 강북에 지원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서울시에 소득재분배 기능을 도입한 획기적인 법안이다. 김근태 지역구였던 도봉구만 따져도 일년에 200억 원의 추가 세수가 들어왔다. 다른 강북지역에도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여당 정치인 생활 10년 간 실패와 좌절은 많았고 성공은 적었다. 그래도 김근태의 반독재 투쟁 20년 만큼이나 여당 생활 10년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근태 빠'라는 이야기 들어봤나?

하지만 이런 것들이 대중적 인기로 연결되진 못했다. '김근태 빠'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18대 총선을 이틀 앞둔 2008년 4월 7일 김근태와 신지호가 맞붙은 도봉을 선거구를 돌아봤었다. 김근태 사무실이나 홈페이지, 홍보물에는 지방세법 개정안이나 영리병원 저지 같은 건 안 보였다. 대신 "법조타운을 유치했습니다", "학교를 지었습니다", "뉴타운을 건설하겠습니다" 같은 차별성 없는 공약만 넘쳐났더랬다. '왜 그러냐' 물었더니 김근태의 측근들은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 뉴타운이나 특목고가 아니면 안 먹힌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지호는 "여당 정치인인 내가 뉴타운도, 삼성 계열사도 유치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신지호는 당선되고, 김근태는 낙선했다. 물론 도봉을에 뉴타운이나 삼성 계열사가 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김근태는 투병에 들어갔다.지난 6. 2 지방선거 당시 김근태는 딱 한번 일반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원순의 도봉 지역 유세에 함께 했던 것이다. 초췌한 모습으로 손을 한 번 흔들었을 뿐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김근태의 사람들은 "사진은 내지 말아 달라"고 언론에 협조를 요청했고 거의 모든 언론이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한 표 달라기 전에 김근태와 자신을 비교해보길

정치활동을 활발하게 할 때도 김근태는 늘상 손수건을 들고 다녔다. 물고문 와중에 고춧가루 탄 물을 코로 너무 마셔서 만성 비염을 달고 살았던 것이다.

언젠가 김근태가 "나는 정치에 안 어울리는 사람인가 싶을 때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김근태는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때 아홉 명이 한줄로 앉아있으면 한 명 씩 차례로 나가서 연설을 하고 들어왔다. 차례로 나가서 뒤에 있는 사람들을 신나게 조지고 뒤돌아서선 웃으면서 악수하고 자리에 앉더라. 나는 신나게 조지지도, 웃으면서 악수하지도 못하겠더라"고 말했다.

자신의 회고대로 김근태는 최소한 한국정치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니면 한국정치에 적합하기엔 너무 맑고 곧은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근태는 가장 높은 존중을 받아야 할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가 좀 더 나은 사회란 점이다.

민주통합당 당권 경쟁이 한참이다. 야권에서 내년 4월 총선 금배지를 노리는 이들이 1000명은 넘는다. 12월 대선 꿈꾸는 사람들도 몇이 된다. 그중엔 김근태 키즈들도 많다. 당권 주자 중에도, 서울시에도, 민주통합당에도 수두룩 하다. 그들이 김근태를 보면서 "저래선 정치 성공 못하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들 김근태와 자기를 한 번 씩 비교해 보길 바랄 따름이다. 64살이면 아직 이른 나이, 김근태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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