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3>제27대 영류왕(1)
당 고조 이연. 당의 개국자이자 수 양제의 이종사촌형.
고려 원정에 실패한 수양제가 주색잡기에 빠져 사느라 나라안이 온통 피폐해져있던 617년,
태원유수로서 전국 각지에서 터진 반란에 가담하여, 수도인 장안으로 들어가 양제를 폐위시키고,
황태손인 양유를 공제(恭帝)로 즉위시킨 다음 스스로 대승상의 자리에 올랐다가,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의 손에 목졸려 살해당한 뒤,
공제(恭帝)에게서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로 즉위,
국호를 당(唐), 연호를 무덕(武德)이라 정한다.
이때가 고려 영양왕 29년, 건무왕 원년의 일이었다.
[榮留王, 諱建武<一云成>, 嬰陽王異母弟也. 嬰陽在位二十九年薨, 卽位.]
영류왕(榮留王)은 이름이 건무(建武)<또는 성(成)이라고도 하였다.>이며, 영양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고려에서도, 영양왕이 죽고 그의 아우 건무가 27대 영류왕으로 즉위한다.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다른 이름을 건세(建歲)라고 했고, 평원왕의 왕자이자 영양왕의 이복 아우로서, 일찌기 수와 전쟁할 때에는 평양성을 방호하는 수륙군 대원수로서 수의 장수 내호아가 이끄는 전함을 패수 하구에서 궤멸시킨 용장. 을지문덕 못지 않은 공을 세운 자이니만큼 왕위 계승에는 별다른 하자가 없었겠다. 29년을 살면서 태자 책봉도 안 한 영양왕이 좀 의아스럽기는 하다만....
[二年, 春二月, 遣使如唐朝貢.]
2년(619) 봄 2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즉위한 뒤 건무왕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에 조공하는 것? 그리고 태왕의 주요 의례인 졸본시조묘 행차는 그 다음이었다. 이 해는 간지로 태세 기묘, 건무왕의 실질적인 즉위가 완료된 해다.
[夏四月, 王幸卒本, 祀始祖廟. 五月, 王至自卒本.]
여름 4월에 왕은 졸본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5월에 왕은 졸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2년(619)
전쟁의 참화가 쓸고 간 곳이 어디 수 뿐이었으랴. 고려 역시 계속되는 전쟁으로 민심이 흉흉해져 있던 터. 흩어진 민심과 신하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태왕은 홀승골성으로 향했다. 시조 대왕께 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던가.
왜국에서는 좋지 않은 일이 하나 일어났다. 구호(우마야도) 왕자가 죽은 것이다. 추고(
"해와 달이 빛을 잃고, 하늘과 땅이 무너졌다. 앞으로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구호(우마야도) 왕자의 죽음을 우러러 말한 왜인들의 탄식이었다. 그리고 이 소식은 고려에도 전해졌다.
[當是時高麗僧惠慈聞上宮皇太子薨, 以大悲之. 爲皇太子請僧而設齊. 仍親說經之日, 誓願曰 "於日本國有聖人, 曰上宮豈聰耳皇子. 固天攸縱, 以玄聖之德生日本之國. 苞貫三統, 纂先聖之宏猷, 恭敬三寶, 救黎元之厄, 是實大聖也. 今太子旣薨之. 我雖異國心在斷金. 某獨生之, 有何益矣. 我以來年二月五日必死. 因以遇上宮太子於淨土, 以共化衆生." 於是惠慈當于期日而死之. 是以時人之彼此共言 "其獨非上宮太子之聖. 惠慈亦聖也."]
이때에 고려의 승려 혜자(慧慈)는 상궁태자(上宮太子, 우에노미야노 미코)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황태자(미코)를 위하여 승려를 모아 재(齋)를 설하였다. 몸소 경을 강하는 날에 서원(誓願)하여 말했다.
"일본국(야마토)에 성인(聖人)이 계시어 상궁풍총이황자(上宮豊聰耳皇子, 가미츠미야노도요토미미노미코토)라 하였다. 진실로 하늘이 허락한 사람이셨고, 현성(玄聖)의 덕으로 일본의 나라에 나셨다. 삼통(三統)을 아울러 뛰어나셨고, 선성(先聖)의 큰 계획을 이으셨으며, 삼보(三寶)를 공경하여 백성의 액을 구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대성인이시다. 지금 태자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다. 나는 나라는 다르지만 마음은 금이라도 끊을 수 있을 정도이다. 혼자 살아서 무슨 이익이 있으랴. 나는 내년 2월 5일에 반드시 죽을 것이다. 상궁태자(우에노미야노 미코)를 정토에서 만나, 함께 중생을 교화할 것이다."
그리고 혜자는 약속한 날에 틀림없이 죽었다. 때문에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상궁풍총이황자(우에노미야노미코) 혼자만 성인이 아니다. 혜자 또한 성인이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2, 추고기(推古紀, 스이코키) 29년(621) 봄 2월
천년 전에 이미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와 일본, 두 나라의 천리 먼 길 바다를 건넌 마음의 교감이랄까? 일본이라는 나라의 근간을 만들었던 구호(우마야도) 왕자의 곁에 고려의 승려 혜자가 있었고, 구호(우마야도) 왕자가 죽었을 때, 혜자는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이자 지우였던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를 위한 재를 천리 먼 땅 고려에서 열었다. 그리고 그가 태자를 정토에서 만나겠노라 약속한 그 날, 서기 622년 봄 2월 5일에 그는 입적하였다.
구호(우마야도) 왕자를 가리켜 '하늘이 허락한 사람'이라며 성인으로 극찬했던 혜자의 발언은 후대의 윤색이라며 신빙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무렵 고려의 정국, 특히 건무왕의 정책에 대한 혜자과 불교 승려들의 비판이기도 했다. 건무왕이 영양왕과 연결된 귀척 세력들을 점차 배제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연결되어 있던 불교 세력도 약화되었을 것이고, 더구나 영양왕 옆에서 측근으로서 그의 왕권강화책을 도왔던 영양왕 지지세력이 아닌가. 건무왕에게 가장 1순위로 제거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거다.
그런 건무왕에게 구호(우마야도) 왕자를 좀 본받아라, 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왕의 모습을 제시하는 식으로 혜자는 건무왕에 대한 간접비판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런 불재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이벤트 가운데 하나, 평소 알고 지냈던 지우이자 자신이 가르친 제자를 위해서 불재를 베푼다는 명분으로 건무왕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승려와 귀척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과시하고, 뭔가 다른 활동을 해보려는 시도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단 없었다. 기록된 것만 본다면.
[四年, 秋七月, 遣使如唐朝貢.]
4년(621) 가을 7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지금은 서로 부딪칠 때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는 고려와 당이 서로 이해관계가 척, 맞아 떨어졌다. 고려와의 전쟁을 피하면서 민심을 다잡아 나라안을 단속하고 있는 당과, 네 차례의 전쟁으로 나름 지칠대로 지친 고려. 그럭저럭 고려와 당 사이에 화해 무드가 조성되었다.
[五年, 遣使如唐朝貢.]
5년(622)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혜자가 구호(우마야도) 왕자를 만나러 열반에 든 그 해에, 일종의 포로 교환이 고려와 당 양국 사이에 이루어졌다. 전쟁 때 고려에서 잡혀간 포로와, 수에서 잡혀온 포로들. 서로 칼을 맞대고 싸웠던 양국이 화해를 말하면서 포로를 교환한다.
[唐高祖, 感隋末戰士多陷於此, 賜王詔書曰 『朕恭膺寶命, 君臨率土, 祗順三靈, 懷柔萬國, 普天之下, 情均撫字, 日月所炤, 咸使乂安. 王統攝遼左, 世居藩服, 思稟正朔, 遠循職貢, 故遣使者, 跋涉山川, 申布誠懇, 朕甚嘉焉. 方今, 六合寧晏, 四海淸平, 玉帛旣通, 道路無壅, 方申緝睦, 永敦聘好, 各保疆埸, 豈非盛美? 但隋氏季年, 連兵構難, 攻戰之所, 各失其氓, 遂使骨肉乖離, 室家分析, 多歷年歲, 怨曠不申. 今二國通和, 義無阻異, 在此所有高句麗人等, 已令追括 尋卽遣送, 彼處所有此國人者. 王可放還, 務盡綏育之方, 共弘仁恕之道.』 於是 悉搜括華人以送之 數至萬餘 高祖大喜]
당 고조(高祖)가 수 말기에 전사들이 우리 나라에서 많이 사로잡힌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은 삼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온 땅에 군림하여, 3령에 공손히 순종하고 모든 나라를 불러 쓰다듬으며, 넓은 하늘 아래를 골고루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을 모두 평안케 하였다. 왕은 요동의 왼쪽을 다스리며 세세토록 번복(藩服)에 머물면서, 정삭(正朔)을 받들고, 멀리서도 조공을 바치려고 사신을 보내 산천을 넘어 정성을 나타내었으니, 짐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이제 천지 사방이 평안하고 사해(四海)가 잘 다스려져서, 옥백(玉帛)이 통하고 도로가 막힘이 없으니, 바야흐로 화목함을 펴서 오랫동안 교분(交分)과 우의(友誼)를 두텁게 하고 각기 강토를 유지하면, 어찌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 말년에 전쟁이 계속되고 난이 일어나, 싸우는 곳에서 각각 그 백성을 잃어, 마침내 골육이 헤어지고 가족이 나뉘고, 여러해 지나도록 홀어미와 홀아비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하였다. 지금 두 나라가 화통하여 의리에 막힘이 없게 되었으므로 이곳에 있는 고려 사람들을 모아서 곧 보내려고 한다. 왕은 그곳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도 놓아주어 편안히 기르는 방도를 힘써 다하고, 어질고 딱하게 여기는 도리를 함께 넓혀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중국 사람을 모아 보냈는데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5년(622) 2월
당의 포로 1만을 당으로 돌려보내고, 고려의 포로도 고려로 돌려주고.... 사실 당의 입장에서 고려에게 이런 이산가족 문제와 군인포로 송환 요청은 고려에 대한 유화책이면서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도 깔려 있었다. 수의 군사로서 전쟁 때에 포로가 되어 여기에 머물러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데려다 본국의 가족들에게 데려다주면 그 백성들은 당 고조를 일컬어 하늘이 내리신 분이라고 칭송할 것이고, 그러면 동시에 온 나라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통치도 정당화될 수 있다. 아울러 세금 내고 군사 징집할 인구가 늘어나잖아. 이게 바로 일석이조지.
그리고 이 이연이라는 사람, 613년에 수가 고려를 칠 때 참전해서 회원진에서 군수품 운송을 감독했던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백만 대군을 거느린 수가 고려에게 패하는 것을 바로 그 현장에서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사람이니만큼 섣부르게 고려를 공격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六年, 冬十二月, 遣使如唐朝貢.]
6년(623)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조공이야 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이렇게 계속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될 수만은 없다는 것은 고려나 당 양자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서로 등을 맞대고 돌아앉은 채, 고개를 돌려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시익 웃으면서 손으로는 몰래 칼을 갈고 활을 당기고 있는 모습. 이 무렵의 고려와 당은 그런 모습이었다.
<평양성 대동문의 문루인 연광정. 이 무렵의 동아시아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과 같았다>
고려로서는 당의 위협이라는 것을 느낄 필요가 없었던 것이, 당은 앞서서 수가 고려와 전쟁하는 틈에 세력을 키운 돌궐과의 복잡하고 어려운 외교관계 때문에 고려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돌궐의 추장 힐리 카간은 수시로 기병을 일으켜 당을 공격해왔고, 아직 중원을 제대로 통일하지도 못한 당으로서는 돌궐의 요구를 거절할 방법이 없어 많은 물자들을 해마다 돌궐에게 갖다 바치고 있었다.
[七年, 春二月, 王遣使如唐, 請班曆. 遣刑部尙書沈叔安, 策王爲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 命道士, 以天尊像及道法, 往爲之講老子. 王及國人聽之.]
7년(624) 봄 2월에 왕은 사신을 당에 보내 책력을 반포해 줄 것을 청했다. (황제가)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을 보내 왕을 상주국(上柱國)ㆍ요동군공(遼東郡公)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고, 도사(道士)에게 명하여 천존상(天尊像) 및 도법(道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의하게 하였다. 왕과 국인(國人)이 그것을 들었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건무왕 7년 봄 2월. 이것이 우리 나라에 도교가 전래된 공식기록이다. 하지만 건무왕이 당에서 천존상과 도교의 법을 청하기 전에이미 도교의 가르침이 고려에 전래되어 제법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것을, 고려의 벽화나 다른 기록에서 볼수 있다. 을지문덕 장군도 도교의 가르침인 '지족'을 알고서 그걸 인용해 시를 지어 우중문에게 보냈고, 고려의 벽화를 보면 도교에서 받드는 사신(四神)은이미 6세기부터 고분 벽화의 주요 주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강서대묘 북쪽 벽에 그려진 현무도. 고려 벽화미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강서대묘의 주인은 영양왕이라는 설이 있다는데, 어디서 출처를 가져왔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저런 걸작 중의 걸작에 둘러 싸여서 누워 주무실 수 있는 영양왕께선 굉장히 복받은 왕이라 할 수 있을 거다. 별로 그림 보는 안목은 없지만, 나는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본 그 어떤 그림 중에서도, 이 사신도만큼은 세상 어느 나라도 따라가지 못할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자부한다.
현무는 북방의 수호신이면서 동시에 음양조화의 상징이기도 하다(거북이 음이고 뱀이 양). 동아시아에서는 옛날부터 모든 생명은 북쪽에서부터 태어나 북쪽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죽음에서 삶으로, 혼란에서 질서로의 회귀라는 면에서 현무가 지닌 상징성이, 북방민족들이 지녔던 '북방'이라는 방위에 대한 종교적 관념과 어우러진 것(이라고 하더라). 정작 현무라는 그 자체는 '자웅동체(!)'라는 점에서 음양조화라는 동양사상에 혼란을 줄 수도 있지만(....) 현무가 상징하는 '음양조화'의 속성은 곧 지금의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조화'의 논리를 담고 있다.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7년(624)
이미 자생적으로 고려 안에 퍼져 있던 도교가 건무왕 때에 이르면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왕실과 귀척들이 앞다투어 도교를 신봉했던 사실은 《삼국유사》에도 수록되어 있다.
[麗季武德貞觀間, 國人爭奉五斗米敎. 唐高祖聞之, 遣道士送天尊像, 來講道德經, 王與國人聽之. 卽第二十七代榮留王卽位七年, 武德七年甲申也. 明年遣使, 往唐求學佛老, 唐帝許之.]
고려 말인 무덕(武德) 정관(貞觀) 연간에 국인(國人)은 앞다투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받들었다. 당 고조가 그것을 듣고 도사를 시켜 천존상을 보내고, 와서 《도덕경》을 강설하니 왕과 국인이 그것을 들었다. 즉 제27대 영류왕 즉위 7년, 무덕 7년 갑신(624)이다. 이듬해(625) 사신을 보내 당에서 불교와 도교를 배우게 하니, 당 황제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고려본기(高麗本記)》 인용
《삼국유사》 권제3, 흥법3, 보장왕이 도교를 숭상하고 보덕은 절을 옮긴 이야기[寶藏奉老普德移庵]
당 고조가 천존상과 도덕경을 보내기 전에 이미 도교를 고려의 국인들이 앞다투어 신봉했다고 《삼국유사》는 《고려본기》라는 책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다. 《구당서》에는 도교 도사들이 고려에서 《도덕경》을 강설할 때에 모여든 인원이 왕과 도인, 속인 포함해 수천 명에 이르렀다는데, 도대체 왜 이 무렵에 이르러서 이토록, 왕실과 귀척들은 도교라는 것에 대해 눈독을 늘이고, 그것을 배우려고 안달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도교에 대한 당의 각별한 우대정책에 있지 않을까 한다.
당 고조는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가 당 황실과 같은 이(李)씨 성을 쓰는 것을 두고, 도교와 당 황실을 연결시켜 노자를 당의 시조로 칭송하며 우대했다. 무덕 4년(621)에는 도사들이 불교를 당에서 몰아내자고 폐불론까지 주장할 정도였으니(개독의 먹사들이 다른 종교를 금지시키자고 핏대 올리는 것처럼) 그 위세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본기》에서 말한 바 당에 가서 본격적으로 불교와 함께 도교를 배워오기를 청하던 그 해에는 유생들이 가득 모인 국학에서 당 고조가 국학에서 석존(釋尊)의 예를 행하면서 도교와 함께 유교를 나라의 우위로 놓는 모습을 보였다. 이른바 선도불후(先道後佛).
그리고 그에 따라 불교는 자연스럽게 위축되고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때의 숭도억불(崇道抑佛) 경향과 관련해서 부각되는 인물이 성사(聖師) 보덕(?∼?)이다.
《삼국유사》고려영탑사(高麗靈塔寺)조에 보면 《승전(僧傳)》을 인용해 "승려 보덕의 자(字)는 지법(智法)으로 전고려(前高麗) 용강현(龍岡縣) 사람이다[釋普德, 字智法, 前高麗龍岡縣人也.]"라고 적었다. 전고려라는 말이 재미있다. 중국에서 왕망의 찬탈과 패망까지 16년 정도의 시간을 기점으로, 한(漢)의 역사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누는 것처럼 우리 역사에서도 고려를 가리킬때면 전고려(前高麗)와 후고려(後高麗)로 나누어서 적었다. 단순히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두 나라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영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용어인 셈이다.
게다가... 용강이라는 곳이 그렇게 대단한 곳이었구나. 조선 후기 최대 민란의 주역이었던 홍경래의 고향으로만 여겼는데, 이제 보니 유명한 고승이 태어난 고향이기까지. 그런데 문제는 용강에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모를지 잘 모르겠단 얘기.지금 금강산의 표훈사에는 보덕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1675년에 지은 것으로 1808년에 한번 중수했다니 고려 때의 정취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암자를 보덕이 지었다는 전설이 있기에, 보덕과 연관이 있는 유적지로서 소개한다.
표훈사 남쪽으로 얼마 안 가서 청학대가 있고 그 앞에 두 개의 바위가 서로 마주 보고 서있는데 이것이 내금강 만폭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금강대이며, 그 만폭동에 있는 내금강 8담(潭)의 하나인 분설담의 오른쪽으로 20m쯤 되는 높이에 7.3m 되는 구리기둥과 돌기둥을 박아서 절벽에 매달린 것처럼 아슬아슬한 건물을 지어놨다. 경치도 경치지만 어떻게 저렇게 건물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에 입이 쩍 벌어지기도 한다. 원래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아담한 집도 있고 돌탑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
유명한 곳이다 일단은. 고려 때 졸옹 최해(崔瀣)나 목은 이색, 익재 이제현도 이곳을 찾았는데, 《동문선》에 실려있는 최해의 '송승선지유금강산(送僧禪智遊金剛山)' 서문에서는 그가 보덕암의 승려로부터 받았다는 《금강산기(金剛山記)》라는 책을 인용해서 "황금불상 53구가 서역으로부터 바다에 떠서 전한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에 이 산에 이르렀으므로 절을 세웠다."는 연기설화를 싣고 "근거없는 헛소리!"라고 일축해버렸다. 중국에서도 부처가 있음을 알지 못하던 62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미 부처를 위하여 법당을 세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조선조 《신증동국여지승람》 회양도호부조에는 이곳의 이름을 보덕굴(普德窟)이라고 적었다.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게 구리기둥을 박고 쇠사슬로 묶어서 고정시키고 해놨는데 사람이 들어가면 막 흔들린단다(스릴있겠는데) 위에다 지은 목조건물의 이름이 관음각(觀音閣)으로 안에는 부처를 모신 함을 안치하고 구슬과 옥으로 장식했으며, 그 주변에다가는 철망을 쳐서 사람들이 못 가져가게 해놨다던가. 이 암자를 보덕이 지었다고 하는 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적은 바다. 보덕이 짓기는 지었는데, 지은 시기가 안원왕 때라고 해서 조금 놀랐다가 나중에 시간계산 해보고는 아, 그럴 수도 있겠네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건무왕 때에 이름이 처음 등장하기는 하지만 안원왕이 즉위한 531년부터(안원왕 재위 기간은 14년으로 545년까지) 건무왕이 도교를 수용한 624년은 서로 계산해보면 93년, 안원왕이 죽은 545년을 기준으로 잡아도 79년. 보통 출가하는 나이를 열다섯으로 잡고 계산해도 안원왕 때에 보덕이 저 암자를 지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스님들은 보통 오래 살잖아. 79년, 사람이 그 정도를 설마 못 살겠어? 아참, 옛날이구나.
陰風生巖曲 바위 틈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溪水深更綠 깊은 시냇물은 더욱 푸르러만 보이고
倚杖望層巓 지팡이 짚고서 절벽을 바라보니
飛簷駕雲木 높다란 처마는 구름 위에 떠있네.
라고, 고려조의 문인 이제현은 보덕암의 경치를 읊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정말 저 암자를 지은 것이 건무왕 때의 승려 보덕이든, 아니면 동명이인의 고려 승려든, 저 암자가 보덕이라는 승려와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 아직 산속에까지 불교가 퍼지지는 않았던 시대고 하니 강원도가 신라령에 속해있었대도 깊은 산속까지 들어간 승려를 잡아내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한다. 안원왕 말년에 보덕이 살아있었다고 한다면, 건무왕이 도교를 받아들일 무렵 화상의 나이는 칠순을 거뜬히 넘긴 고령의 나이였을 것이다. 보덕암 이야기를 갖고 보덕화상의 탄생연도를 얼추 짐작해봤다.
[常居平壤城, 有山方老僧, 來請講經. 師固辭不免, 赴講經涅槃經四十餘卷.]
항상 평양성에 살았는데, 산방(山方)의 노승이 와서 강경(講經)을 청하였다. 대사는 굳게 사양하다가 마지 못해서 가서 《열반경》 40여 권을 갖고 가서 강경하였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4, 고려영탑사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승전》은 보덕을 《열반경》으로 이름이 높았던 고승으로 그리고 있다. 보덕에게 열반경 강의를 청했던 그 산방 노승이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평양성의 불교 중앙교단에서 활동했던 몹시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인데, 그런 승려가 지방 사람에 불과한 보덕에게 와서 불경 강의를 청했을 정도로 보덕은 《열반경》에 대한 이해 경지가 높았다.
보통 이런 류의 강경(講經) 법회는 불교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편이면서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신라의 경우, 의상 대사가 《화엄경》을 강의하는 법회를 열 때 모인 사람이 3천 명에 달했고, 기간도 보통 두세 달은 거뜬히 넘겼다. 아마 이 법회가 개최된 것을 계기로 보덕의 이름이 일반 서민들에게도 많이 알려졌을 거고(무슨 기발한 방법으로 설법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보덕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평양 안에서 많이 생겼을 것이다.
하고많은 경전 중에서도 하필 《열반경》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담고 있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보덕이나 고려 불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북중국 열반학에서 군주와 승려들에게 불법을 적극 보호해줄 것을 권장하는 규범이었던 '대승율(大乘律)'의 교의를 빌려, 혜자가 그랬던 것처럼 '법회'라는 이름으로 불교를 차별하고 도교를 떠받드는 건무왕 정권에 대한 '규탄'과 함께 불교도들에게 닥친 시국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를 함께 걱정하자는 '불교도 총회', 좀더 거창하게 수식하면 '종교편향규탄 및 불교계 정화를 위한
열반경 특별 강의법회'를 보덕이 개최했던 셈.
<송광사 소장 '대반열반경소'(1099). 보덕이 제창한 '해동열반종'의 중심교의는《대반열반경》에 있었다. 사진은 의천을 통해 수입된 북송 때의 해석본.>
예전에도 말했었지만 《열반경》의 중심사상은 '불신상주(佛身常住)'. 즉 부처의 몸은 갔어도 그의 진정한 몸(불교의 가르침)은 부처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는 불법불멸(佛法不滅)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生)'이라 해서 세상의 목숨 붙은 모든 것은 그것이 비록 하찮은 풀이나 벌레(심지어 무간지옥에 사는 마귀까지)라 해도 모두 성불할 수 있는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는 '불성 평등'의 교리였다. 흔히 불교에서 '백정도 칼을 버리면 부처가 된다'라고 하는 말과 비슷한 것인데 평양성파 신흥귀척들에게는 국내성파 구귀척들에게 사상적으로 맞설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고, 서민 신도들에게는 자신들도 부처와 같은 높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평등'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불성을 구현하기 위해서 계율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평양 사람이 아닌 지방민으로서 강의법회를 열어 중앙 교단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중앙 정부에게 종교편향 중지를 호소하고 역설하려던 보덕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곧바로 고려불교의 중앙교단 및 영류왕 정권(도교도 포함해서)의 반격이 들어왔고, 보덕은 '종교편향규탄 및 불교계 정화를 위한 열반경 특별 강의법회' 이후 곧바로 평양을 떠나야 했다.
[罷席, 至城西大寶山穴下禪觀. 有神人來請, "宜住此地." 乃置錫杖於前, 指其地曰 "此下有八面七級石塔." 掘之果然. 因立精舍, 曰靈塔寺. 以居之.]
강경을 마친 뒤[罷席] 성(城) 서쪽 대보산(大寶山) 동굴 아래에서 수도[禪觀]하였다. 신인(神人)이 와서
"이곳에서 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청하면서 석장을 놓고 땅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안에 8면 7층의 석탑이 있을 것입니다."
땅을 파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에 절[精舍]을 세워 영탑사(靈塔寺)라 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4, 고려영탑사
보덕이 세운 절인 영탑사는 어디 있는지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이 대보산은 말법상래(末法常來) 의식과 불법구주(佛法久住)의 정신이 충만한 산으로 여겨졌다. 보덕은 이 시대를 불교가 멸망한다는 법멸(法滅)의 시대, 즉 말법(末法) 시대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불교의 세계관에는 삼시(三時)의 설이라는 것이 있다. 승려들이 불교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느냐, 아니면 그 형식적인 모습마저도 사라지느냐의 문제에 따라 세상의 시간을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 이렇게 세 개의 시간으로 구별한다. '정법'은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승려와 신도들이 수행하고 그를 통해 깨달음까지 완벽하게 얻어 그에 따라 행동하며 살아가는 불교의 '황금시대'이고, '상법'은 가르침과 수행은 계속하고 있지만 그 가르침을 진정 마음으로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은 없는 불교의 '은의 시대', 그리고 가르침만 있지 불교를 믿는 신도들은 없으며 수행도 깨달음도 없는 '말법'의 시대(불교의 '동의 시대')가 끝날 때, 부처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그 가르침마저 말끔히 사라져버리는 '법멸(法滅)'이 오게 되는 것이다.(개독들 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최후의 심판이 눈앞에 왔다'는 말이지. 말법이라는 것은.)
불교 교단의 타락에 대한 반성과 각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등장한 '말법'사상을 빌어 보덕은 당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차별하던 세상에 대한 비판을 가차없이 날렸다. 아울러 불교 교단 안에서의 부패와 타락을 척결하자는 의미로, 말법사상의 성소라고 할 수 있는 이곳 대보산을 자신의 거처로 삼아 《열반경》을 자신의 중지(中旨)로 삼았던 것.
[八年, 王遣人入唐求學佛老敎法, 帝許之.]
8년(625)에 왕은 사람을 당에 보내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워오기를 구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삼국유사》에서는 도교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구해오게 한 것은 보장왕 때의 연개소문이라고 했었는데, 여기 《삼국사》의 기록을 보면 건무왕 8년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삼국유사》에서 보장왕 때의 일과 헷갈렸었던 모양이다. 영양왕을 중심으로 모여서 대수전쟁을 주도했던 평양성파 귀척들, 과거 영양왕의 지지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영류왕을 위시한 국내성파 구귀척들은 평양성파 귀척들을 견제할만한 것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견제할만한 것이 바로 사상이었는데, 불교를 등에 업은 평양성파를 견제하고자 국내성파는 도교를 끌어들였다.
이때의 일을 《동사강목》은 《당서》의 기록에서 인용해와서 추가해 적고 있다.
고구려가 불교와 도교의 법을 당에서 구하였다. 이보다 먼저 황제가 시신(侍臣)에게 말하였다.
“고구려가 수에 신하라 칭했지만 결국 양제에게 맞섰으니 이 어찌 제대로 신하를 칭하였다고 하겠는가? 짐은 만물에게 공경을 받지만 교귀(驕貴)하려 하지 않고, 다만 토지를 지켜 사람들을 편안케 하기에 힘쓸 뿐이니, 어찌 굳이 (고려에게) 신하를 칭하라 하여 스스로 존대한 체하겠는가?”
배규(裴規)ㆍ온언박(溫彦博)이 나아가 아뢰었다.
“요동 땅은 주(周)가 태사(大師)의 나라로 삼았었고, 한가(漢家)의 현도군이었으며 위(魏), 진(晉) 이전은 거의 제봉(提封) 안에 있었으니, 칭신하지 않는 것을 허락함은 옳지 못하옵니다. 만약 고구려가 항례(抗禮: 당과 고려가 서로 대등하게 대하는 것)를 하게 되면 사이(四夷)가 반드시 한을 가벼이 볼 것입니다. 또한 화(華)가 이(夷)와 함께하는 것은 태양이 뭇 별들과 함께하는 것과 같으니, 이치상 내리고 높일 수가 없습니다.”
이에 그만두었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갖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수의 백만대군도 끝내 무너뜨리지 못한 고려의 철옹성같은 국력을 똑똑히 목도했음이니. 더구나 아직 나라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괜히 고려를 건드렸다 수의 꼴이 될까봐 당 고조는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三年春正月壬申朔戊寅, 高麗王貢僧惠灌, 仍任僧正]
33년(625) 봄 정월 임신(壬申) 초하루 무인(7일)에 고려왕이 승려 혜관(惠灌)을 보내왔으므로, 승정에 임명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2, 추고기(推古紀, 스이코키) 33년(625)
고려의 승려 혜관은 일본에서는 삼론종의 개창 시조로 모셔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일찌기 수에 건너가 가상사(嘉祥寺) 길장(吉藏)에게 삼론종을 배웠고, 이 즈음에 왕명으로 왜국에 건너가 내량(나라)의 원흥사(元興寺, 겐코지)에 머물며 불법을 강설했는데,여기는 안 나와 있지만 이때 왜국에는 혹심한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왜왕 추고(스이코)는 혜관에게 기우제를 맡아 지내주십사 청했고, 그가 푸른 가사를 입고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단비가 쏟아졌다나? 이에 왜왕은 크게 기뻐하고 그를 승정(僧正)의 지위에 봉한다.혜관이 머물렀던 원흥사(겐코지)는 지금도 일본의 내량(나라) 현 내량(나라) 시 중원정(中院町, 나카인쵸) 11번지에 남아있는데, 훗날 그는 지금의 대판(오사카)에 정상사(井上寺, 세이조사)를 창건하고 그곳에서 입적할 때까지 삼론종을 펼쳤다. 제자로는 복량(福亮)·지장(智藏)·도등(道登)·혜사(慧師) 등의 승려가 있다고.
사실 건무왕 시대에 수, 당으로 구법하러 갔거나 왜국으로 파견된 승려들 중에 혜자를 제외하곤 대부분 돌아온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혜관도 그렇고, 도등(道登)은 건무왕 11년(628)에 당에 건너가 길장에게 삼론종을 배웠지만 이듬해(629)에 왜로 건너가 아예 거기서 머물러 살았다. 건무왕을 중심으로 한 숭노파(崇老派)가 점차 세력을 넓혀가면서 불교에 대한 통제와 규제, 편향이 갈수록 심해지고 그렇게 불교의 사회적인 위치와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불교 교단 내부에서 변화와 혼란이 나타났을 것이 아닐까 한다.
한가지 더 부기할 것은 사선(沙先)이라는 성씨인데, 《만성통보(萬姓統譜)》라는 책에 보면 당 고조 무덕(武德) 연간에 당조에서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이라는 무관직을 지냈던 사선영문(沙先英問)이 본디 고려의 종족이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고려의 종족인 그가 어째서 고려를 떠나 당조로 갔는가에 대해서는 딱히 내가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대개 두 가지로 추측이 가능하다. 고려에서 쫓겨났거나, 자원해서 당조의 무관직에 지원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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