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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5>제28대(마지막) 보장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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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 諱臧<或云寶臧>. 以失國故無諡. 建武王弟大陽王之子也. 建武王在位第二十五年, 蓋蘇文弑之, 立臧繼位.]

왕(王)은 이름이 장(臧)<혹은 보장(寶臧)이라고도 하였다.>이다. 나라를 잃었으므로 시호가 없다. 건무왕의 아우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 건무왕 재위 25년(642)에 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장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고려 마지막 왕 보장왕.

중학교 국사 시간에 국사 선생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고구려의 멸망을 보장한 왕"이라고 가르쳐주셨었지.

이 왕 때에 이르러서 나라가 망해버렸기에, 보장왕은 고려 왕으로서 시호도 받지 못했다.

연개소문의 위세에 눌려 자기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했던 왕. 

 

[新羅謀伐百濟, 遣金春秋乞師, 不從.]

신라가 백제를 정벌할 것을 꾀하여 김춘추(金春秋)를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원년(642)

 

이 왕이 즉위한 그 해에, 신라에서 사신이 찾아왔다.

왕족으로서 신라에서 벼슬하고 있던 김춘추.

이때의 일이 《삼국사》 김유신열전에 《고기》를 인용해서 제법 상세하게 실려있다.


[善德大王十一年壬寅, 百濟敗大梁州, 春秋公女子古陁炤娘, 從夫品釋死焉. 春秋恨之, 欲請高句麗兵, 以報百濟之怨. 王許之.]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쳐서 깨뜨렸을 때, 춘추공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으로 여겨, 고려에 청병하여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했다. 왕이 허락하였다.

《삼국사》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

 

딸과 사위가 백제 의자왕의 손에 죽었다는 이 처참한 소식을 듣고

김춘추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슬퍼했느냐면,

《삼국사》가 전하는 것처럼 하루종일 기둥에 기대선 채,

멍한 얼굴로 자기 눈앞으로 사람이 지나가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를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서 그는 백제를 기필코 멸하겠다는 복수심으로,

다른 나라에 군사를 청할 생각을 했다. 분노하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신라로서는 백제의 맹렬한 공격 앞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기에,

다른 우방 세력의 원조를 얻어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김춘추는 고려로 간 것이다.

 
[春秋與訓信沙干, 聘高句麗, 行至代買縣. 縣人豆斯支沙干, 贈靑布三百步. 旣入彼境, 麗王遣太大對盧盖金館之, 燕饗有加, 或告麗王曰 “新羅使者, 非庸人也. 今來, 殆欲觀我形勢也. 王其圖之, 俾無後患.”]

춘추가 사간(沙干) 훈신(訓信)과 함께 고려에 예방하러 갈 때 대매현(代買縣)에 이르렀다. 현 사람 두사지(豆斯支) 사간(沙干)이 청포(靑布) 3백 보(步)를 주었다. 경내에 들어가니, 고려왕이 태대대로(太大對盧) 개금(蓋金)을 보내어 객사를 정해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다. 식사 대접을 특별하게 하였다. 어느 사람이 고려왕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신라 사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은 아마 우리의 형세를 살피려는 것 같으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소서.”

《삼국사》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

 

한 보가 여섯 자니까 3백 보면 1800자. 암튼 로비 비용으로 청포, 푸른 베를 실어갖고 갔다.

저기서 고려왕에게 김춘추의 위험성을 고한 저 '어떤 사람' 말인데,

단재 선생은 저 '어떤 사람'이 다름아닌 백제의 충신 성충이었다고 하셨다.

이 무렵 성충은 연개소문이 고려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신라가 고려의 위세를 빌려 자신들에게 복수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에 백제 의자왕에게 아뢰어 고려와의 동맹을 추진하고자 고려에 와서 연개소문을 만났는데,

마침 그와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서 김춘추가 사신으로 도착해서 온 것이다.

 

성충이 고구려에 가서 이해를 따져 연개소문을 달래서 동맹의 조약이 거의 맺어지게 되었는데, 연개소문이 갑자기 성충을 멀리하여 여러 날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성충이 의심이 나서 탐지해보니 신라의 사신 김춘추(金春秋)가 와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막고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을 맺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충은 곧 연개소문에게 글을 보내

“공께서 당과 싸우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만일 당과 싸우고자 한다면 백제와 화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왜냐하면 서국이 고구려를 칠 때에 번번이 양식 운반의 불편으로 패했으니 수나라가 그 분명한 본보기요. 이제 백제가 만일 당과 연합하면 당은 육로인 요동에서부터 고구려를 침노할 뿐 아니라 배로 군사를 운반해서 백제로 들어와 백제의 쌀을 먹어가며 남쪽에서부터 고구려를 칠 것이고, 그러면 고구려가 남과 북 양면으로 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위험이 어떻겠습니까? 신라는 동해안에 나라가 있어 당의 군사운반의 편리하기가 백제만 못할 뿐더러, 신라는 일찍이 백제와 화약하고 고구려를 치다가 마침내 백제를 속이고 죽령(竹領) 바깥 고현(高峴) 안의 10군을 함부로 점령하였음은 공께서 잘 아시는 바이니, 신라가 오늘 고구려와 동맹한다 해도 내일 당과 연합해 고구려의 땅을 빼앗지 않으리라 어떻게 보증하겠습니까?”

하였다. 연개소문이 이 글을 보고는 김춘추를 가두고 죽령 바깥 욱리하(郁里河) 일대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성충은 마침내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돌아갔다.

<조선상고사> 12편 中


하지만 단재 선생이 이런 설명을 해주지 않으셔도 고려와 백제는 일찌감치 신라와 당에 맞서 손을 잡을 터였다. 당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남쪽을 진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고, 비대해진 신라를 견제해줄 수 있는 것은 왜와도 화친해서 바다를 제압하고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는 백제라는 것을 고려도 잘 알고 있었다. 일찌기 고려와 화친하면서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버린 신라인데 어차피 배신 한 번 한 놈이 마음만 먹으면 또 배신 못하겠어? 역시 신라와 손잡는 것은 위험하다는 결론을 고려는 머릿속으로 계산한 끝에 얻어낸다.


[王欲橫問, 因其難對而辱之, 謂曰 “麻木峴與竹嶺, 本我國地. 若不我還, 則不得歸.” 春秋答曰 “國家土地, 非臣子所專. 臣不敢聞命.” 王怒囚之, 欲戮未果.]

왕은 무리한 질문으로 대답하기 어렵게 함으로써 그를 욕보이게 하려고 말하였다.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 나라 땅이다.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하리라.”

춘추가 대답하였다.

“국가의 땅이란 신하 마음대로 할수 있는게 아니옵니다. 신은 감히 명령을 따를수 없사옵니다.”

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려 했으나 미처 처형하지 못했다.

《삼국사》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


마목현과 죽령. 옛날 고려의 영토였지만 나제 연합군에 의해 빼앗긴, 온달 장군이 '여길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던 그 땅이다. 아마 연개소문 자신은 그 땅을 다시 되찾아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던지, 아니면 신라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해서 청병을 무시하려고 했던 것인지 둘 중 하나의 이유를 들어서 대뜸 김춘추에게 '그 땅 주면 군사 내주지'하고 말한 건데,신라로서도 이 땅이 백제와의 백년 동맹마저 깨어가며 참 아니꼽게 얻은 땅인지라 쉽게 고려에 내어줄수도 없는 처지 아닌가.(더구나 사신 자격으로 온 자신이 어떻게 해볼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春秋以靑布三百步, 密贈王之寵臣先道解. 道解以饌具來, 相飮酒酣, 戱語曰 “子亦嘗聞龜兎之說乎? 昔, 東海龍女病心, 醫言 ‘得兎肝合藥, 則可療也.’ 然海中無兎, 不奈之何. 有一龜, 白龍王言 ‘吾能得之.’ 遂登陸見兎言, ‘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隼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 因負兎背上, 游行二三里許, 龜顧謂兎曰 ‘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 兎曰 ‘噫! 吾神明之後, 能出五藏, 洗而納之. 日者, 小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底,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則汝得所求, 吾雖無肝尙活, 豈不兩相宜哉?’ 龜信之而還, 纔上岸, 兎脫入草中, 謂龜曰 ‘愚哉, 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 龜憫默而退.” 春秋聞其言, 喩其意, 移書於王曰 『二嶺, 本大國地分. 臣歸國, 請吾王還之. 謂予不信, 有如皦日.』 王迺悅焉.]

춘추는 청포 300보를 왕의 총신(寵臣)인 선도해(先道解)에게 몰래 주었다. 도해는 음식을 차려 와서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이 얼근히 올랐을 때, 도해가 농담조로 말하였다.

“그대도 들어보셨겠죠? 거북과 토끼 이야기를. 옛날에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병을 앓았는데, 의원 하는 말이 토끼 간을 얻어 약을 지으면 고칠 수 있다는 거였소. 그러나 바닷속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쩔수 없었지. 거북이 한 마리가 용왕에게 아뢰어 '제가 그것을 얻어 올 수 있습니다' 하고는 육지로 나와서 토끼를 보고 ‘바다 가운데에 섬 하나가 있는데, 맑은 샘물과 흰 돌에, 무성한 숲과 맛있는 과일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도 없고, 매와 새매가 침입하지 못한단다. 네가 만약 가기만 하면 편히 살면서 아무 근심이 없을 거다’하고서, 이어 토끼를 등에 업고 헤엄쳐 2∼3리쯤 가다가, 거북이가 토끼를 돌아보며 ‘지금 용왕의 딸이 병이 들었는데, 모름지기 토끼의 간이 약이 된다고 하기에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널 업고 오는 거란다.’하였다오. 토끼가 ‘허허! 나는 신명(神明)의 후예라, 능히 오장(五臟)을 꺼내어 씻어 넣을 수 있지. 일전에 속이 좀 불편하여 간과 심장을 꺼내 씻어서 잠시 바위 밑에 두었는데, 네 달콤한 말을 듣고 곧바로 오는 바람에 간이 아직도 거기 있으니, 되돌아가서 간을 가져와야지 않겠니? 그렇게 하면 너는 구하는 것을 얻게 되고, 나는 간 없어도 살 수 있으니, 양편 다 좋은 일 아니겠니?’ 하였소. 거북이 그 말을 믿고 되돌아갔지. 겨우 해안에 오르자마자 토끼가 풀속으로 도망치며 거북에게 ‘너 바보냐? 간 없이 사는 놈이 어딨냐?’ 하니, 거북이 멍하니 아무 말 못하고 물러갔다 하오.”

춘추가 그 말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 왕에게 글월을 보내 말하였다.

『두 영(嶺)은 본래 대국(大國)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면 우리 왕께 청하여 돌려 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왕이 이에 기뻐하였다.

《삼국사》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


이른바 귀토지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판소리 '수궁가(水宮歌)'로 각색되어 향연되고 있으며,

흔히들 말하는 '토끼전'의 근원설화라고 할수 있는 이야기다.

인도에서 불교와 함께 건너온 이야긴데, 이 선도해라는 자는

지금 그러한 이야기를 들먹이면서, 은근히 김춘추에게 이 고려에서 빠져나갈

방도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뇌물수수', 다른건 몰라도

공무원들 이 뇌물수수하는 것만은 진짜 쳐죽여야 돼. 진짜.


[春秋入高句麗, 過六旬未還, 庾信揀得國內勇士三千人, 相語曰 “吾聞, 見危致命, 臨難忘身者, 烈士之志也. 夫一人致死當百人, 百人致死當千人, 千人致死當萬人, 則可以橫行天下. 今國之賢相, 被他國之拘執, 其可畏不犯難乎?” 於是, 衆人曰 “雖出萬死一生之中, 敢不從將軍之令乎?” 遂請王, 以定行期. 時高句麗諜者浮屠德昌, 使告於王. 王前聞春秋盟辭, 又聞諜者之言, 不敢復留, 厚禮而歸之. 及出境, 謂送者曰 “吾欲釋憾於百濟, 故來請師. 大王不許之, 而反求土地, 此非臣所得專. 嚮與大王書者, 圖逭死耳.”]

춘추가 고려에 들어간지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국내의 용사 3천을 선발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잊는 것은 열사의 뜻이라 한다. 무릇 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백 사람을 당해내고, 백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천 사람을 당해 내며, 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만 사람을 당해 낼 수 있으니, 그러면 천하를 마음대로 주름잡을 수 있다. 지금 나라의 어진 재상이 다른 나라에 억류되어 있는데, 두렵다고만 하면서 어려움을 당해내지 않을 것인가?”

이에 뭇 사람들이

“비록 만 번 죽고 겨우 한 번 살 수 있는 곳에 가더라도, 어찌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드디어 왕에게 청하여 군사 출동 기일을 정하였다. 그때 고려의 간첩승 덕창(德昌)이 사람을 시켜 이를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이미 춘추의 맹서하는 약속을 받았고, 또 간첩의 말을 들었으므로 더 잡아둘 수가 없어 후하게 대접해 돌려보냈다. 춘추는 국경을 벗어나자 바래다준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백제에 대한 유감을 풀고자 군사를 청하러 왔던 것이다. 태왕께서 허락하지도 않고 도리어 땅을 내놓으라 하니 이는 신하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엊그제 태왕께 서신을 올린 것은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계획이었을 뿐이다.”

《삼국사》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


와... 약았다. 김춘추라는 토끼가 보장왕과 연개소문을 속일 줄이야.

이때 김춘추가 고려에게 군사를 청했던 것이 성공했더면,

구태여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쳤다고 단재 선생께 그렇게 욕먹을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만....

어쩌겠나. 이미 지나간 이야기인 것을.


아무튼지간에 이 김춘추라는 놈은 겨우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신라와 고려가 영영 원수가 될 수 있는 거짓말을 하고서 간신히 빠져나갔고,

이 일로 고려 안에서는 반신라 감정이 일었을 거다. 연개소문으로서는

신라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그들에게 '신라 공격'이라는 대의를 내세워 군권을 장악하고

국론을 통일시킬 수 있었으니 꽤나 충분한 이익을 얻은 셈.

그리고 신라는 백제와 고려, 왜에 둘러싸여 더욱 당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나중에 가면 연개소문의 선택은 성공한 점보다 실패한 점이 더 부각된다)


[二年, 春正月, 封父爲王. 遣使入唐朝貢.]

2년(643) 봄 정월에 아버지를 왕으로 봉하였다.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아버지라고 하면 보장왕의 아버지, 즉 영양왕과 영류왕의 아우인 대양군을 말하는 것이겠고.

일단 아들은 왕인데 아버지는 아직 왕자 신분이라고 하면 그것도 영 꼴이 말이 아니긴 하다.

연개소문이 권력을 틀어쥔 상황 속에서 이는 그의 정치적 역량이

일정하게 발휘된 것이라 볼 수 있겠지만, 어찌 본다면 연개소문 자신의

정치적 이벤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태왕을 무슨 푸줏간 고기 썰듯이 토막내고

100명에 가까운 신하들을 죽이는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며

정계의 핵심으로 떠오른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는 다른 신하들 앞에서,

자신이 결코 고려 왕실을 뒤엎으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어지러운 조정을 바로잡았을 뿐,

'반역'이 아닌 '혁명'이라는 것을 신료들에게 보이려는,

어려운 말로는 '존왕(尊王)'의 의리를 내세워서 대양군의 태왕 추존을 지지했던 것이다.


[三月, 蘇文告王曰, "三敎譬如鼎足, 闕一不可. 今儒釋並興, 而道敎未盛, 非所謂備天下之道術者也. 伏請遣使於唐, 求道敎以訓國人." 大王深然之, 奉表陳請. 太宗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老子道德經. 王喜, 取僧寺館之.]

3월에 소문이 왕에게 고하였다.

“삼교(三敎)는 비유하자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흥하나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나랏사람들을 가르치소서.”

태왕은 매우 지당하다고 여겨서 글을 올려서 청했다. 태종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여덟 명을 보내고, 겸하여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내 주었다. 왕은 기뻐하고 절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2년(643)


연개소문은 《삼국사》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서도 흘대를 받았다.

그가 왕에게 청하여 도교를 진흥시키게 했다ㅡ고 하는 것은

《삼국유사》에도 실려있는 이야기인데, 일연도 부처를 모시는 승려인지라

유교 윤리에 충실한 부식이 영감만큼 불교 교리에도 충실한 이 일연이라는 중은,

연개소문이 불교를 버리고 도교를 받아들여 진흥시킨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래서인지 그에 대해서 '옛날 수의 장수 양명이 죽어서

고려에 개소문으로 태어나 고려를 멸망시켰다'는 악의적인 내용을

《삼국유사》에다가 실어놨다.(물론 헛소리니까 애써 믿으실 필요는 없다.)


[先是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 有誓曰 "必爲寵臣滅彼國矣." 及蓋氏擅朝, 以盖爲氏. 乃以羊皿, 是之應也.]

처음에 수 양제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裨將)으로 양명(羊皿)이란 자가 있었는데, 군이 불리하여 다 죽게 되자 맹세하였다.

"반드시 그 나라의 총신이 되어 그 나라를 멸하고야 말리라."

개(蓋)씨가 조정을 마음대로 휘두르기에 이르렀다. 개(蓋)로 성을 삼은 것은 양명(羊皿)에서 나왔으니 이는 그 응보였다.

《당서(唐書)》인용(?)

《삼국유사》 권제3, 흥법4, 보장봉노 보덕이암


《당서》에 정말 이런 기록이 있는지는 사실 의문이다.

여기서는 개(蓋)를 성씨로 삼았다고 했지만 개소문이 아니라 '연개소문'이 풀네임이란 건

다 아는 사실이다. 더구나 도교를 처음으로 공식수용한 것은 영류왕 때의 일이지

연개소문이 가장 먼저 주청한 건 아니다. 다만 도교를 진흥시키면서 평양의 절을 빼앗아

도관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불교 세력에 대해 거의 박해에 가깝게 억압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무렵 고려의 불교라는 것이 구(舊) 귀척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그 구 귀척세력이 연개소문에 의해 숙청을 당하면서

동시에 그들과 사상적으로 연결되어있던 불교가 타격을 받은 것이라 한다.


이는 마치, 후고려 때의 무신정변으로 인해, 문벌 귀척들의 후원을 받고

그들과 서로 사상적인 맥으로 연결되어 있던 교종이 선종에 비해 크게 위축되었던 것과

그 원인마저도 비슷했다. 후고려 문벌귀척과 황제의 중앙집권 논리의 정당성을 대주던 교종은,

무신들의 집권 아래서 선종의 위세에 밀려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새로운 세력의 집권을 반대파들에게 머리로 이해가 가도록 설명해주고 정당화해줄

새로운 정신적, 사상적 논리가 필요했다. 그 도구로 연개소문은 도교를 택했고,

연개소문 집권기의 고려 불교는 도교에 밀려 거의 억압당하다시피 했다.

 

평양성파 사람이라고 다 불교만 믿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연개소문의 아버지로 선대 막리지였던 연태조 본인이 영류왕의 도교 수용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당에서 국교나 다름없는 대접을 받는 도교를 수용함으로서,

무턱대고 강경책만 택하기보다는 당과의 우호를 위한 친선대책도 강구해야 된다고,

연개소문은 생각한 것이리라. 그저 강경책만 고수하는

대책없고 무식하기만 한 무인은 아니었던 셈.


[十七年六月.... 太常丞鄧素, 使高麗還, 請於懷遠鎭, 增置戌兵, 以逼高麗. 上曰 "遠人不服, 則修文德以來之. 未聞一二百戌兵, 能威絶域者也."]

17년(643) 6월 정해에.... 태상승(太常丞) 등소(鄧素)가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회원진(懷遠鎭)의 수병(戍兵)을 증원하여 고려를 핍박하자고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먼 나라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는다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오게 해야지, 1, 2백 명의 수병으로 먼 곳에 있는 나라를 쉽게 위협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노라.”

《신당서》

 

당태종도 아직은 고려 침공에 대한 자신의 욕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태상승 벼슬의 등소라는 자가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회원진의 수비병을 늘리자고 말했을 때에도 태종은 겨우 1, 2백 명의 수비병으로

먼 곳에 있는 나라를 위협할 필요가 뭐 있냐며 조소해버린다.

등소라는 자가 고려에서 뭘 보고 왔는지는 생각지도 않은 채.

고려에서 이미 당과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군사력을 기르고 있는 것이

이미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당을 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당 태종은 무시해버린 셈이다.


[閏六月, 唐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而專國政, 誠不可忍. 以今日兵力取之不難, 但不欲勞百姓, 吾欲使契丹·靺鞨擾之, 何如?"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嚴設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必更驕惰, 愈肆其惡, 然後討之, 未晩也." 帝曰 "善." 遣使持節備禮冊命 詔曰 "懷遠之規, 前王令典, 繼世之義, 列代舊章. 高句麗國王臧, 器懷韶敏, 識宇詳正, 早習禮敎, 德義有聞. 肇承藩業, 誠款先著, 宜加爵命, 允玆故實, 可上柱國遼東郡王高句麗王."]

윤6월에 당 태종이 말하였다.
“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국정(國政)을 제멋대로 하니 진실로 참을 수 없다. 지금 병력으로도 고려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다만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고, 나는 거란과 말갈을 시켜 그들을 길들이려고(?) 하는데, 어떤가?”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아뢰었다.

“소문은 스스로 죄가 큰 것을 알고 대국이 토벌할 것을 두려워하여 수비를 엄하게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아직 내색하지 말고 참고 계시면, 저들은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고 반드시 다시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그 악을 더욱 멋대로 행할 것이므로, 그 뒤에 토벌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좋다."

부절을 가진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서 책봉하고 조서를 내렸다.

“먼 나라를 위로하는 것은 전왕의 아름다운 법[令典]이요, 대를 잇는 의는 여러 대의 옛 규례이다[舊章]. 고려국왕 장(臧)은 재능과 생각이 아름답고 민첩하고, 식견과 도량이 치밀하고 바르며, 일찍이 예교(禮敎)를 익혀 덕망과 의로움이 알려졌다. 처음 번방(藩邦)의 왕업을 계승하여 정성을 먼저 드러냈기에, 마땅히 작위를 더하여 예전 사실을 인정하고 상국(柱國) 요동군왕(遼東郡王) 고려왕을 주노라.”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2년(643)


그리고 바로 다음 달에, 아직은 고려와 충돌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당 태종은 일단 영류왕 다음으로 왕이 된 보장왕을 고려왕으로 인정해주는 척,

사신을 보내어 책봉교지를 내린다.

 

여기까지는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를 그리 부정하지는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긴 본인께서 쿠데타로 집권했는데 누가 누굴 욕하겠어. 제 얼굴에 침 뱉기지.

당 태종에게 고려 정벌을 권했는데 태종은 상을 당한 고려를 차마 정벌할 마음이 없었기에(?)

장(보장왕)을 왕으로 제수했던 것이라고 《신당서》에 나온다만.....


태종이 처음 신하들에게 저 말을 했을 때,

태종의 측근이자 명신이었던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은,

"폐하께서 사졸들이 용감하고 힘이 남아도는데도 이를 억제하고서 쓰지 않으시니,

이는 이른바 전란을 쉬어 무기의 사용을 그치는 것이 진정한 무공(武功)이라는 것입니다."

라 하였다고 《신당서》는 말한다. 하지만 《신당서》에서는

"아직 내색하지 말고 참으십시오"라고 말한 장손무기가, 태종에게 또 이런 말을 했다.

"고려가 일찍껏 한 번도 어려움을 호소해 온 적이 없습니다.

조서를 내려 위로하면서 그들의 환난을 불쌍히 여기시고 살아남은 자를 어루만져 주시면,

그 다음부터는 중국의 명을 따를 겁니다."

라고. 말을 이리저리 꼬아서 그렇지 이건 고려를 치지 말고 달래자는 거다.

김부식 영감이 저 대목을 쓰면서 인용했던 《자치통감》의 내용에서,

장손무기의 대답에 태종이 "좋다."라고 대답하는 저 부분에 대해

조선조 한진서는 《해동역사》에서 주석을 달면서

"이것을 보면 태종의 웅대한 뜻(?)이 일찍이 하루도 고구려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라고 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단 한번도 고려 정벌에 대한 욕심을 버린 적이 없다는 말이다.

 

[秋九月, 新羅遣使於唐, 言 "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 乞兵救援.]

가을 9월에 신라가 사신을 당에 보내어

"백제가 우리 나라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다시 고려와 군사를 연합하여 입조(入朝)하는 길을 끊으려 합니다."

라고 말하고,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2년(643)

 

이때의 신라 사신과 당 태종의 대화가 신라본기에 실려있는데,


[秋九月, 遣使大唐上言 “高句麗 · 百濟侵凌臣國, 累遭攻襲數十城. 兩國連兵, 期之必取, 將以今玆九月大擧. 下國社稷必不獲全, 謹遣陪臣歸命大國. 願乞偏師, 以存救援.” 帝謂使人曰 “我實哀爾爲二國所侵, 所以頻遣使人, 和爾三國. 高句麗 · 百濟旋踵翻悔, 意在呑滅, 而分爾土宇, 爾國設何奇謀, 以免顚越?” 使人曰 “吾王事窮計盡, 唯告急大國, 冀以全之.” 帝曰 “我少發邊兵, 摠契丹 · 靺鞨直入遼東, 爾國自解, 可緩爾一年之圍. 此後知無繼兵, 還肆侵侮, 四國俱擾, 於爾未安. 此爲一策. 我又能給爾數千朱袍丹幟, 二國兵至, 建而陳之, 彼見者以爲我兵, 必皆奔走. 此爲二策. 百濟國恃海之嶮, 不修機械, 男女紛雜, 互相燕聚, 我以數十百船, 載以甲卒, 銜枚泛海, 直襲其地. 爾國以婦人爲主, 爲鄰國輕侮, 失主延寇, 靡歲休寧. 我遣一宗支, 以爲爾國主, 而自不可獨王, 當遣兵營護, 待爾國安, 任爾自守. 此爲三策. 爾宜思之. 將從何事?” 使人但 "唯" 而無對, 帝嘆其庸鄙, 非乞師告急之才也.]

가을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려와 백제가 우리의 나라를 침범하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 수십 개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두 나라가 군사를 합쳐 기어이 그것을 빼앗고자 장차 이번 9월에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 합니다. 그러면 저희 나라의 사직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므로, 삼가 신하인 저를 보내어 대국에 명을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약간의 군사를 내시어 구원해 주소서."

황제가 사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 나라가 두 나라에게 침략당하는 것을 몹시 가엾게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 세 나라가 친하게 지내라고 했다. 고려와 백제는 돌아서자마자 생각을 뒤집어 너희 땅을 집어삼켜 나눠 가지려 하는데, 그대 나라는 어떤 기묘한 꾀로 망하는 것을 면할 테냐?"

“우리 왕께서는 일의 형편이 궁하고 계책이 다하여 오직 대국(大國)에게 위급함을 알려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변방의 군대를 조금 일으켜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곧장 쳐들어가면 그대 나라는 저절로 풀려 1년 정도는 포위가 느슨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군대가 없음을 알면 도리어 침략을 제멋대로 하여 네 나라가 같이 소란스러워질 것이니, 그대 나라도 편치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계책이다. 나는 또한 네게 수천 개의 붉은 옷과 붉은 깃발을 줄 수 있는데, 두 나라 군사가 이르렀을 때 그것을 세워 진열해 놓으면 그들이 보고 우리 군사로 알고 분명 모두 도망갈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계책이다. 백제국은 바다의 험난함을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어지럽게 섞여 서로 즐기며 연회만 베푸니,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소리없이 바다를 건너 곧바로 그 땅을 습격하려 한다. 그런데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어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되어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왕족 중 한 사람을 보내 그대 나라의 왕으로 삼되, 자신이 혼자서는 왕노릇을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 호위케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 스스로 지키도록 맡길 것이다. 이것이 세번째 계책이다. 그대는 잘 생각하라. 장차 어느 것을 따르려느냐?"

사신은 다만

“예....”

라고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황제는 그가 용렬하여[庸鄙] 군사를 청하고 위급함을 알리러 올 만한 인재가 아님을 탄식했다.

《삼국사》 권제5, 신라본기5, 선덕왕 12년(643)


이 무렵 신라에서 당에 보낸 사신은 김춘추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김춘추는 고려와의 외교를 망치고 돌아온 뒤, 신라에서 일어난 자신에 대한 반발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 탓에 직접 당에 못 가고 다른 사람을 보낸 건데, 좀 제대로 된 놈을 안 보내고 하필이면 저딴 놈을 보내는 바람에 일은 꼬여버렸다. 1차 협상에서 신라가 당 태종에게 기선제압 당하면서 그만 당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처지가 되고 만 것. 하여튼 뭐든지 첫 단추를 잘 꿰야지 처음부터 망가지면 나중에는 아무 것도 안 되고 흐지부지 무너진단 말야.... 그리고 역사의 전개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위의 세 가지 계책 중에서 신라는 결국 세 번째 계책ㅡ당의 군사를 빌어 백제와 고려를 멸한다는 최악의 가상 시나리오를 선택하고 만다.


[十五日, 夜明不見月, 衆星西流.]

15일에 밤에 밝았으나 달이 보이지 않았다. 많은 별들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2년(643) 가을 9월

 

밤은 밝으나 달이 보이지 않으니, 밝지도 않은 별들이 저마다 밝지도 않은 빛을 뽐내면서, 범이 없는 산에서 여우가 왕 노릇 하듯이 할 것이고, 그나마도 그 별들이 서쪽으로 흘러갔으니, 그만큼 고려의 운도 줄어간다는 뜻이었던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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