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2197951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6>제28대(마지막) 보장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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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대동문. 보장왕 3년 정월 당에서 온 사신이 고려 수도에 닿았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命司農丞相里玄奬, 賚璽書賜王曰 "新羅委質國家, 朝貢不乏. 爾與百濟, 各宜戢兵. 若更攻之, 明年發兵, 擊爾國矣."]

3년(644)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황제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해 조서를 갖고 와서 왕에게 내렸다.

“신라는 우리 나라[國家]에 충성을 다짐하여[委質] 조공을 쉬지 않는다. 너희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두어야 하리라.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내년에는 군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치리라.”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자치통감》에 보면 상리현장이 당 태종의 조서를 갖고 고려에 도착했을 때에, 고려는 막 신라를 때려서 성 두 개를 빼앗은 다음이었다고 했다.

 

[玄奬入境, 蓋蘇文已將兵擊新羅, 破其兩城. 王使召之, 乃還.]

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두 성을 깨뜨렸다. 왕이 사람을 시켜 불러 들이니 이에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연개소문의 관직은 대막리지. 앞서 말했지만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총재이자 고려의 모든 병권을 틀어쥔 직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가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거나 전쟁을 벌인 기록은 많지가 않다. 《삼국사》를 통틀어 연개소문의 직접참여는 딱 두 번, 보장왕 3년(644)과 22년(662년)의 기록들인데 그 첫번째는 신라와의 전쟁으로 두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 연호로는 선덕여왕 인평 10년. 지금 충북 청원에 있는 개소문성이 이와 관련이 있는건가 싶기도 하지만 몰라. 아무튼 이때 연개소문이 신라를 쳐서 2성을 빼앗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玄奬諭以勿侵新羅, 蓋蘇文謂玄奬曰 "我與新羅, 怨隙已久. 往者, 隋人入寇, 新羅乘釁, 奪我地五百里, 其城邑皆據有之. 自非歸我侵地, 兵恐未能已." 玄奬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諸城,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且不言, 高句麗豈得必求故地?" 莫離支竟不從.]

현장이 신라를 침략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개소문은 현장에게 말하였다.

“우리와 신라는 원한으로 틈이 벌어진 지 오래다. 이전에 수인(隋人)이 쳐들어 왔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 우리 땅 5백 리를 뺏고 그 성읍을 모두 차지했다. 스스로 빼앗긴 우리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

현장이 말하였다.

“어차피 그렇게 된 걸 뭐하러 추구하여 논의하시오?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은 오히려 말하지 않는데, 어찌 고려만이 옛 땅을 굳이 찾으려 하시오?”

막리지는 마침내 듣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기실 연개소문이 아니어도, 온달 장군이 아차산성으로 싸우러 가면서는

"계립현과 조령의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떠났고, 또 신라를 치지 말라는 당 태종의 경고를 받고도, 일찌기 김춘추에게 그랬던 것처럼 신라가 고려에게서 빼앗아간 남쪽의 땅을 다시 찾아야만 그만둘 것이라고. 무슨 이 땅에 꿀 발라놨나. 왜 이렇게까지 그 땅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요동이 본래 한 군현의 땅이긴 개뿔? 원래부터 우리나라, 고조선 땅인데)


[玄奬還, 具言其狀,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虐其民, 今又違我詔命, 不可以不討."]

현장이 돌아가 그 실상을 갖추어 말하니, 태종이 말하였다.

“개소문은 그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해쳤다. 백성을 잔인하게 대하고 이제는 또 내 명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도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2월 을사 초하루

 

《삼국사》는 이렇게만 적어놨지만, 《자치통감》에는 이때에 태종과 신하들의 대답이 보다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하긴 자기네들 얘기니까 적어놨겠지)  


[上曰 "蓋蘇文弒其君, 賊其大臣. 殘虐其民, 今又違我詔命, 侵暴鄰國, 不可以不討." 諫議大夫褚遂良曰 "陛下指麾則中原清晏, 顧眄則四夷讋服, 威望大矣. 今乃渡海遠征小夷, 若指期克捷, 猶可也. 萬一蹉跌, 傷威損望, 更興忿兵, 則安危難測矣." 李世勣曰 "間者, 薛延陀入寇, 陛下欲發兵窮討, 魏徵諫而止, 使至今為患. 向用陛下之策, 北鄙安矣." 上曰 "然. 此誠徵之失. 朕尋悔之而不欲言, 恐塞良謀故也."]

황제가 말하였다.
“개소문은 그 임금을 죽이고 그 대신을 해쳤다. 그 백성에게 잔학하게 굴면서 이제 또 조서를 어기고 이웃 나라를 침공하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러자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褚遂良)이 아뢰었다.

“폐하께서 지휘하시면 중국이 평안하고, 뒤돌아보시면 사이(四夷)가 습복할 것이니, 위엄과 명망이 아주 대단합니다. 지금 바다를 건너 원정하시면 작은 오랑캐를 즉시 쳐부술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차질이 생길 경우엔 위엄과 명망이 손상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다시 분노하여 군사를 일으킨다면 안위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세적(李世勣)이 아뢰었다.

“지난번에 설연타(薛延陀)가 침입해 왔을 때, 폐하께서 군사를 일으켜 끝까지 토벌하고자 하다가 위징(魏徵)이 간하자 그만두는 바람에 지금까지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번 폐하의 계책대로 했더라면 북쪽 변방이 안정되었을 것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그렇다. 그 일은 참으로 위징이 잘못한 것이다. 짐이 몹시 후회하고 있지만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좋은 계책이 진달되는 것을 막게 될까 걱정해서다.”

《자치통감》권제197, 당기(唐紀)제13,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 중지하(中之下),

정관 18년 갑진(644) 2월 을사 초하루

 

당조의 수많은 신하들 중 고려 원정에 긍정적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특히나 목청높여 고려 원정을 말렸던 건 간의대부 저수량. 중국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를 보유한, 중화세계의 일부도 아닌 이민족들을 굳이 천자가 정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저수량의 생각이었다.


반대로 당 태종을 적극 지지한 것은 이세적, 훗날 고려 평양성 진격의 선봉장이 되었던 무장. 저수량과는 달리 전쟁 터져야 거기 나가서 군공 세우고 재산 불릴 수 있는 무인의 입장에서 자기가 먹고 살 길이 생기는데 마다할 필요가 있겠나. 다 자기 필요에 따라나라의 정책에 대해서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한다.(물론 찬성한 쪽이 선이고 반대한 쪽은 악이다, 반대한 쪽은 선이고 찬성한 쪽은 무조건 선이다 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결코 용납될 수 없겠지만....)

 

[又遣使蔣儼諭旨, 蘇文竟不奉詔, 乃以兵脅. 使者不屈, 遂囚之窟室中. 於是太宗大擧兵, 親征之.]

또 사신 장엄(蔣儼)을 보내 타일렀으나 소문이 끝내 조칙을 받들지 않고 이에 군사로 사신을 위협하였다. 굽히지 않자 드디어 굴 안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군사를 크게 징발하여 친히 정벌하였다.

《삼국사》 권제49, 열전제9, 개소문

 

두 번째로 당에서 고려에 사신을 보냈을 때, 연개소문은 아예 사신을 동굴에 가둬버렸다. 원래 이 장엄이라는 자는 고려에 사신으로 자청해서 온 사람이었다. 중국 기록에 보면 당 태종이 고려에 보낼 사신을 뽑을 때에 대부분 사신 가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帝將伐高麗, 募僞使者, 人皆憚行. 蔣儼奪曰 "以天子威武, 四夷畏威, ○爾國, 敢圖王人? 如有不幸, 固吾死所也." 遂請行, 僞莫離支所因.]

황제가 고려를 치고자 그 속일 사자(使者)를 모으는데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했다. 장엄(蔣儼)이 분연히 나서서 말하였다.

“천자의 위무(威武)에 사이(四東)가 다 두려워하는데 어느 나라가 감히 명을 받들고 간 사람에게 손을 댈 수 있겠느냐? 만약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진실로 내가 죽을 곳이다.”

마침내 자기가 가겠다고 청해서 갔다가 막리지에게 구금되었다.

 

단재 선생은 장엄이 무슨 사명을 띠고 갔는지는 역사에 기록이 빠져서 모르지만, 장엄이나 상리현장을 빼고 당에서 사신으로 온 사람 중에 죽은 사람이 많았고 그걸 당의 사관이 일부러 숨겨버렸을 거라고 주장하셨다.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서도 지적한 점인데, 장엄이 발탁되기 전에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다들 꺼렸다는 것만 보더라도 믿을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당의 관리들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다들 꺼렸을까. 게다가 평양성이 함락된 뒤에 장엄이 살아 돌아왔고 조산대부 유주사마 벼슬에 임명되기는 했지만, 당 고종은 살아 돌아온 그를 보고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겼다고 했으니, 단재 선생이 지적하신 대로 분명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연개소문에게 죽은 사람이 있었거나, 그 무렵 고려와 전쟁을 벌이는 것에 대해 당 내부에서도 불안감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음을 저 기록은 은연중에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속임수, 다시 말해 심리전이다. 이미 심리적인 면에서 고려는 수의 백만 대군을 작살낸 그 하나로 당의 관리와 백성들에게까지 '공포' 그 자체로 각인되어 있었고 그들의 기를 꺾어놓는데 성공했던 셈이다.

 

[上欲自征高麗, 褚遂良上疏, 以為 "天下譬猶一身, 兩京心腹也, 州縣四支也. 四夷身外之物也. 高麗罪大, 誠當致討, 但命二ㆍ三猛將將四五萬衆,仗陛下威靈,取之如反掌耳. 今太子新立,年尚幼稚,自餘籓屏,陛下所知,一旦棄金湯之全,逾遼海之險,以天下之君,輕行遠舉,皆愚臣之所甚憂也." 上不聽.]

상이 몸소 고려를 정벌하고자 하니, 저수량이 상소하였다.

“천하를 하나의 몸으로 비유하자면 양경(兩京)은 심장과 배가 되고 주ㆍ현은 팔다리이며, 사이(四夷)는 몸 바깥의 것입니다. 고려가 큰 죄를 지었으니 토벌하는 것은 참으로 마땅합니다. 다만 두서너 명의 맹장에게 명해서 4, 5만의 군사를 이끌고 폐하의 위령(威靈)을 떨치게 하시면 고려를 취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울 겁니다. 지금 태자께서 새로 서서 나이 아직 어리고 다른 번병(籓屏)들도 넉넉함을 폐하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하루 아침에 금탕지전(金湯之全)을 내버려두고 요해(遼海)의 험한 곳을 지나려 하십니까. 지금 천하의 군주로서 경솔하게 원정길을 떠나시는 것을 모든 신하들이 심히 걱정하는 바입니다. ”

황제는 듣지 않았다. 

《자치통감》권제197, 당기(唐紀)제13,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 중지하(中之下),

정관 18년 갑진(644) 2월 을사 초하루

 

《자치통감》은 확실히 《구당서》의 국서 내용을 축약시켜서 수록했다. 전쟁을 말린 것은 간의대부 저수량 외에도 위지경덕이나 이대량, 강확, 그리고 2차 고수전쟁 때에 우무후장군으로서 참전해 고려와의 전쟁 경험이 있는 정원숙 등이었다.(장량 같은 경우는 아예 '정벌계획 백지화'를 녹음해놓고 수시로 틀어주며 반대했다.) 위징처럼 태종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방현령은 '백성이 힘들고 나라가 망가진다'는 대의명분을 들어 고려 원정을 반대했고, 위지경덕이나 이대량은 태종이 직접 전쟁터에 나가 텅 빈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예전 수 때에 양현감같은 놈처럼) 태종이 직접 참전하지 말라고 했다.

 

[臣聞有國家者譬諸身, 兩京等於心腹, 四境方乎手足, 他方絕域, 若在身外. 臣近於坐下, 伏奉口敕, 布語臣下, 雲自欲伐遼. 臣數夜思量, 不達其理. 高麗王為陛下之所立, 莫離支輒殺其主, 陛下討逆收地, 斯實乘機. 關東賴陛下德澤, 久無征戰, 但命二ㆍ三勇將, 發兵四五萬, 飛石輕梯, 取如回掌. 夫聖人有作, 必履常規, 貴能克平凶亂, 駕馭才傑. 惟陛下弘兩儀之道, 扇三五之風, 提厲人物, 皆思效命. 昔侯君集ㆍ李靖, 所謂庸夫, 猶能掃萬里之高昌, 平千載之突厥, 皆是陛下發蹤指示, 聲歸聖明. 臣旁求史籍, 訖乎近代, 為人之主, 無自伐遼, 人臣往征, 則有之矣. 漢朝則荀彘ㆍ楊僕, 魏代則毋丘儉ㆍ王頎. 司馬懿猶為人臣, 慕容真僭號之子. 皆為其主長驅高麗, 虜其人民,  削平城壘. 陛下立功同於天地, 美化包於古昔, 自當超邁於百王, 豈止俯同於六子? 陛下昔翦平寇逆,大有爪牙, 年齒未衰, 猶堪任用. 匪唯陛下之所使, 亦何行而不克. 方今太子新立,年實幼少. 自余籓屏, 陛下所知. 今一旦棄金湯之全,渡遼海之外, 臣忽三思, 煩愁並集. 大魚依於巨海, 神龍據於川泉, 此謂人君不可輕而遠也. 且以長遼之左,或遇霖淫,水潦騰波,平地數尺. 夫帶方ㆍ玄菟, 海途深渺, 非萬乘所宜行踐. 東京太原, 謂之中地, 東捴可以為聲勢, 西指足以摧延陀, 其於西京, 逕路非遠, 為其節度, 以設軍謀, 系莫離支頸, 獻皇家之廟. 此實處安全之上計, 社稷之根本. 特乞天慈, 一垂省察.]

신이 듣건대 국가라는 것은 사람의 몸에 비유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양경(兩京) 등은 심복(心腹)이고 사경방(四境方)은 팔다리이며,지방과 절역(絶域)은 몸 바깥과 같습니다. 신이 좌하(座下)에서 섬기면서 삼가 친히 구칙(口勅)하여 신하에게 하신 말씀 받들자니, 몸소 요동을 정벌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며칠 밤을 생각해도 그 이치가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고려왕은 폐하께서 세우신 바인데, 막리지가 그 왕을 죽였으니, 폐하께서 역적을 토벌하고 땅을 수복하는 것은 실로 제대로 기회를 탄 것입니다. 관동(關東) 지방은 폐하의 은덕을 입어 오랫동안 정벌전이 없었습니다. 단지 두세 명의 용장(勇將)에게 명해 4, 5만 명의 군사를 출동시켰는데도 비석(飛石)과 경제(輕梯)를 이용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사리 차지하였습니다. 무릇 성인께서 하시는 일은 반드시 상규(常規)에 따르는 법으로, 능히 흉란(兇亂)을 평정하고 사나운 자를 제어함이 귀한 것입니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천지의 도리를 넓히고 삼강오륜의 바람을 부채질하여 사람들을 이끌고 장려하였으므로, 모두들 목숨을 바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옛날에 후군집(侯君集)과 이정(李靖)은 이른바 용렬한 사람이었는데도 오히려 만리나 떨어진 
고창(高昌)을 소탕하였으며, 천년이 넘은 나라인 돌궐을 평정하였는바, 이는 모두가 폐하께서 조종하고 지휘하신 것이었으므로 그 명성이 폐하께 돌아갔습니다.
신이 사적을 두루 살피니, 근대에 이르기까지 임금이 직접 요동을 정벌한 사실이 없었으며, 신하가 가서 정벌한 경우만 있었습니다. 한(漢) 때에는 순체(荀彘)와 양복(楊僕)이 가서 정벌하였고, 위(魏) 때에는 무구검(毋丘儉)과 왕기(王頎)가 가서 정벌했습니다. 사마의(司馬懿)는 다른 사람의 신하였고 모용진(慕容眞)은 참호(僭號)한 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그 임금을 위하여 고려로 쳐들어가서 그 인민을 사로잡고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폐하께서는 공을 세운 것이 천지(天地)와 같고 아름다운 교화는 옛날보다 커서 스스로 백왕(百王)들보다 훨씬 뛰어나니, 어찌 위에서 말한 여섯 사람과 같겠습니까. 폐하께서 예전에 도적들을 섬멸하실 적에 보내어서 싸우게 한 용맹한 장수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은 나이가 쇠하지 않아 아직도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폐하께서 이들에게 맡기지 않아서일 뿐이지, 역시 어디로 가서 싸운들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지금 태자께서 새로이 서서 나이가 실로 어립니다. 그 나머지(고려)가 번병(藩屛)임은 폐하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지금 하루아침에 금성탕지처럼 완전한 곳을 버려두고 요해(遼海)를 건너가시니, 신은 거듭 생각해도 번뇌와 근심이 한꺼번에 몰려듭니다. 큰 고기는 큰 바다에 의지하고 신령한 용은 시냇물에 사는 법으로, 이것은 인군(人君)이 함부로 멀리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이른 말입니다. 또한 길고 먼 요동길은[長遼之左] 장맛비라도[霖淫] 오는 날이면 빗물이 땅에서 몇 자나 솟구칩니다. 무릇 대방(帶方)ㆍ현도(玄菟)는 바닷길이 멀고 깊어 만승(萬乘)이 몸소 가시기에는 마땅치 않습니다. 동경(東京)과 태원(太原)은 중간쯤 된다고 할 수 있는데, 동쪽으로는 성세(聲勢)를 도울 수 있고 서쪽으로는 연타(延陀)를 꺾기에 적합하며 서경(西京)과는 멀지 않은 지름길이니 그곳에서 지휘하고 군사작전을[軍謀] 행하면 막리지의 목을 베어 황가(皇家)의 사당에[廟] 바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실로 안전한 데 처하는 상책이고, 사직(社稷)이 있는 데에 처하는 근본입니다. 성상께서는 한번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저수량의 상소,

《구당서》권제80, 열전제30, 저수량

 

하지만 태종 자신의 실추된 권위를 높일 절호의 기회인데 그런 기회에 자신이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 자신이 친히 군사를 지휘해서 전공을 세우면 그동안 실추된 체면도 서고 정국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생각으로 태종은 강력하게 고려 원정을 밀어붙였다. 아무도 못 말리겠지.


[時群臣多諫征高麗者, 上曰 "八堯九舜, 不能冬種. 野夫童子,春種而生. 得時故也. 夫天有其時, 人有其功. 蓋蘇文陵上虐下, 民延頸待救, 此正高麗可亡之時也. 議者紛紜, 但不見此耳."]

이때 신하들 가운데 고려를 정벌하기를 간하는 자가 많았다. 황제가 말하였다.
“아무리 많은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이 있더라도 겨울철에 씨를 뿌려 싹트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들판에 사는 농부나 어린아이라도 봄철에 씨를 뿌려 싹트게 할 수 있는 법. 이는 제때 알맞게 해서 그런 것이다. 무릇 하늘에는 적당한 시기가 있고 사람에게는 그에 따른 공이 있는 법. 개소문이 위를 능멸하고 아랫사람을 괴롭히고 있어 백성들이 목을 길게 빼고 와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고려를 멸망시킬 적기다. 의논하는 자들이 분분하게 떠들어 대는 것은 이 점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그런 것이다.”

《자치통감》권제197, 당기(唐紀)제13,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 중지하(中之下),

정관 18년 갑진(644) 2월 을사 초하루

 

안정복 영감의 말에 따르면 수가 고려에 패한 이래로 중국의 의론은 항상 이랬다. 중국인 모두 고려, 우리 나라를 치는 것을 말렸다. 당 태종도 그랬지만, 훗날 왕씨조 고려 때에도 거란 성종 야율융서(耶律隆緖)가 고려를 세 번이나 쳤지만 결국 강감찬에 의해 귀주에서 패했다지 않나.

 

그러고 보면 한족이 우리 나라를 원정해 성공한 일도 없었고 직접 원정한 일도 별로 없었다. 굳이 들자면 한 무제가 고조선을 친 것 정도? 그 외에는 전부 한족이 아닌 이민족에 의해서 행해졌다. 고려에 패해 결국 나라까지 망한 수, 그리고 당은 모두 한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이 세운 왕조이고, 그 외에는 거란이나 몽골, 만주족(여진족), 그리고 바다 건너 왜(倭). 왜를 차치하고 중국과 우리가 싸워서 패한 일이 많았다고 해도 사실 우리는 중국과 싸운 것이 아니라 몽골과 싸운 것이고 만주족과 싸운 셈이다.

 

한족들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니면서 자기들을 어떻게든 띄워볼려는 경향이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런 한족들에게 자기 말과 풍속까지 빼앗기고 동화되어버린 이민족들까지. 거란, 여진, 몽골족이 세운 정복왕조들은 그래도 동정해볼 껀더기라도 있지만 저 선비족들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한화(漢化)정책을 펼쳐서 '작은 한족'이 되려 했다가 결국에는 역사에서 그 이름까지 말끔하게 지워져버렸다. 동정의 여지가 없다. 저런 것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맞선 역사도 자랑스럽지만, 결국 패한 역사는 또 얼마나 부끄럽고 한심한가. 그래도 우리는 선비족과는 달리 '우린 중국과는 달라'라는 정체성은 잃지 않았는데. 


[秋七月, 帝將出兵, 勑洪 · 饒 · 江三州, 造舡四百艘, 以載軍糧, 遣營州都督張儉等, 帥幽·營二都督兵及契丹 · 奚 · 靺鞨, 先擊遼東, 以觀其勢.]

가을 7월에 황제가 장차 군사를 출동시키고자 홍주(洪州) · 요주(饒州) · 강주(江州) 3주에 명령을 내려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張儉) 등을 보내 유주(幽州)와 영주(營州) 도독의 병사와 거란 · 해(奚) · 말갈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쳐서 그 형세를 보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이 전쟁은 일단 명분상으로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인 전쟁이었다.

 

백제와 고려가 궁벽진 곳에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는 걸핏하면 군사들을 동원하여 침략하고 있다. 이에 신라는 날로 위축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는 사신의 행차가 잇달아 이르고 있다. 짐은 이를 마음속으로 깊이 불쌍하게 여겨 사신에게 명해 고려와 백제 두 나라에 대해 군사를 거두고 우호를 도타이 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선포하였다. 그런데도 고려는 계속해서 무력을 써서 공격하고 있다. 만약 신라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고통받는 자를 구원해 준다는 것이겠는가.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과 수좌종위솔(守左宗衛率) 고이행(高履行) 등으로 하여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 두 도독부(都督府)의 병마(兵馬) 및 거란(契丹), 해(奚), 말갈(靺鞨)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에 가서 고려의 죄를 캐묻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책부원귀》에 나오는 당 태종의 조서 내용이다.

 

[以大理卿韋挺爲墩輸使, 自河北諸州, 皆受挺節度, 聽以便宜從事. 又命少卿蕭銳, 轉河南諸州糧入海.]

대리경(大理卿) 위정(韋挺)을 궤수사(墩輸使)로 삼았는데, 하북에서부터 여러 주가 모두 (위)정의 지휘를 받게 하여, (위정이)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소경(少卿) 소예(蕭銳)에게 명하여 하남의 여러 주의 양식을 싣고 바다로 가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7월


새로 궤수사로 뽑힌 대리경 위정은 마주(馬周)로부터 군량 수송 책임자로 천거된 자다. 위정을 궤수사, 즉 군량 수송 책임자로 삼고서 민부시랑(民部侍郞) 벼슬의 최인사(崔仁師)라는 사람을 도우미로 붙여준 뒤, 태종은 이런 말을 한다.

"유주 북쪽은 요수(遼水)가 2천 리를 흐르며 주현들을 아우르고 있다. 행군할 때 군량을 가져올 곳이 없다. 경이 이번에 나가서 군량이 떨어지지 않게만 해줘도 그 공이 작지 않을 것이다."

《구당서》에 나오는 얘기다. 수 때의 고려 원정 실패 요인이 '군량수송 차질' 및 '고려군의 보급로 차단'에 있었던 것에 착안한, 당 태종의 가슴졸인 신신당부였다. 


8월에 소예가 상소를 올려 아뢰었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고대인성(古大人城)은 서쪽으로 황현(黃縣)에서 23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고려까지 4백 70리입니다. 섬 안에 샘물이 많고 산과 섬이 잇닿아 있어 군량을 저장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조서를 내려 그대로 따랐다. 이에 하남도로부터 군량을 운반해 왔는데 육로와 수로로 잇달아 실어와 모두 이곳에다가 저장하였다.

《책부원귀》


고대인성이라고 하는 데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던 섬이랬는데, 어딘지는.... 모르겠다.


[九月, 莫離支貢白金於唐, 褚遂良曰 "莫離支弑其君, 九夷所不容. 今將討之, 而納其金, 此褚鼎之類也. 臣謂不可受." 帝從之.]

9월에 막리지는 백금을 당에 바쳤다. 저수량(褚遂良)이 말하였다.

“막리지가 그 왕을 죽였으므로 구이(九夷)가 용납치 않는 바입니다. 이제 그를 치려 하는데 금을 바쳐오니, 이는 곡정(褚鼎)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그 말에 따랐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오늘날 '뇌물'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된 '곡정'이라는 말은 《춘추》에 나오는 한 일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춘추시대 송(宋)의 재상이었던 독(督)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모시던 장공(殤公)을 살해하고 옆 나라의 정(鄭)에서 풍(豐)을 모셔다 옹립한 일이 있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혹시라도 자기가 자기 왕 죽이고 딴 녀석을 왕좌에 앉힌 것을 주변 나라에서 알고 욕할까봐, 노(魯)의 환공(桓公)에게 뇌물로 바친 것이 바로 이 곡정. 환공은 이것을 종묘인 태묘(太廟)에서 받으려고 하였는데, 애백(哀伯) 장손달(臧孫達)이 그것을 받지 말라고 간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이라는 사람이 장공을 죽이고서 노에 곡정을 뇌물로 보낸 것과, 영류왕을 죽인 연개소문이 당 태종에게 백금을 보낸 것은 다 똑같이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는 치졸한 속임수이고 비리라며, 저수량은 받지 말라는 거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 바 아니지만.


[使者又言 "莫離支遣官五十, 入宿衛." 帝怒謂使者曰 "汝曹皆事高武有官爵, 莫離支弑逆. 汝曹不能復讎, 今更爲之遊說, 以欺大國, 罪孰大焉?" 悉以屬大理.]

사신이 또 말하였다.

"막리지께서 관인 50명을 들여 보내어 숙위하겠다고 하십니다."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말하였다.

"네놈들은 모두 고무(高武: 영류왕)를 섬겨 관작을 얻었는데, 막리지가 그를 죽였다[弑逆]. 네놈들은 복수도 하지 않고 이제 또 그를 위해 유세하면서 대국을 속이고 있다. 이보다 더 큰 죄가 있겠느냐?"

그러고는 모두 처벌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9월 을미

 

태종이 고려의 사신을 처벌한 것은, 고려를 도발하여 일전을 치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군선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이민족을 배후에서 조종해서 고려의 변경을 치게 하는 등. 기록에서도 보이듯, 양제 때와는 달리 태종은 조금은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고,그것은 고려로서는 수와 싸울 때와는 그야말로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전쟁은 예고된 것이었다.

 

[冬十月, 平壤雪色赤. 帝欲自將討之, 召長安耆老, 勞曰 "遼東故中國地, 而莫離支賊殺其主, 朕將自行經略之. 故與父老約, 子若孫從我行者, 我能拊循之, 無容恤也." 則厚賜布粟, 羣臣皆勸帝毋行, 帝曰 "吾知之矣. 去本以趣末, 捨高以取下, 釋近而之遠, 三者爲不祥, 伐高句麗是也. 然蓋蘇文弑君, 又戮大臣以逞, 一國之人延頸待救, 議者顧未亮耳." 於是, 北輸粟營州, 東儲粟古大人城.]

겨울 10월에 평양에 내린 눈 빛이 붉은색이었다. 황제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치려고, 장안(長安)의 노인들을 불러 위로하며 말하였다.

"요동은 예전에 중국 땅이었고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로서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근심할 것 없다."

곧 포백과 곡식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군신들이 모두 황제에게 가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황제가 대답하였다.

“나는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달리는 일,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는 일, 가까운 것을 두고 먼 것을 택하는 일, 이 세 가지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고려를 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들을 살륙하고는 만족해 하므로,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목을 늘이고 구원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의논하는 사람들이 살피지 못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북쪽으로 영주(營州)로 곡식을 나르고, 동쪽으로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곡식을 저장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그렇게나 고려를 멸하고 싶었던 것일까. 당 태종은. 그가 직접 고려를 치겠다면서, 10월 계묘에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잔치한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을 때, 당의 대신들은 그런 태종을 만류하기 바빴다. 그러나 당 태종은 막무가내.

 

[十一月, 帝至洛陽. 前宜州刺史鄭天璹已致仕, 帝以其嘗從隋煬帝伐高句麗, 召詣行在問之, 對曰 "遼東道遠, 糧轉艱阻, 東夷善守城, 不可猝下." 帝曰 "今日非隋之比. 公但聽之."]

11월에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宜州) 자사 정천숙(鄭天璹)이 이미 벼슬을 그만 두었으나, 황제는 그가 일찍이 수 양제를 따라 고려를 정벌하였으므로 행재소로 불러서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요동도는 멀어서 군량을 옮기는 것이 어렵고, 동이(東夷)는 성을 잘 지키므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은 수 때에 비할 것이 아니다. 공은 다만 따르기만 하라.”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11월 임신. 일찌기 수 양제를 따라서 고려와의 전쟁에 종군했던 전임 의주자사 정천숙 역시 고려 정벌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며 만류했음에도, 지금은 수 때와 다르다며 자신감을 보인다ㅡ

 

장검(張儉) 등은 요수(遼水)가 넘쳐서 오랫동안 건너지 못하였다. 황제는 겁먹고 건너지 않는 것이라 여기고 낙양으로 불러들였다. 장검이 낙양에 이르러서 산천(山川)의 험하고 평이한 것과 수초(水草)의 좋고 나쁨을 모두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자치통감》

 

정말 요수가 넘친다는 것만으로 안 건널 수가 있을까....?

 

[以刑部尙書張亮爲平壤道行軍大摠管, 帥江淮·嶺硤兵四萬 · 長安 · 洛陽募士三千·戰艦五百艘 自萊州泛海, 趣平壤. 又以太子詹事左衛率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帥步騎六萬及蘭 · 河二州降胡, 趣遼東, 兩軍合勢, 大集於幽州,]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아서, 강회(江淮)와 영협(嶺硤)의 4만 군사와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3천 군사, 전함 500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오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좌위솔(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기 6만과 난(蘭) · 하(河) 2주의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게 하여, 양군이 합세하여 유주(幽州)에서 다 모이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11월 갑오

 

뭐.... 간편해보이긴 하네. 군사들이.

 

[遣行軍摠管姜行本·少監丘行淹, 先督衆工, 造梯衝於安羅山. 時, 遠近勇士應募及獻攻城器械者, 不可勝數, 帝皆親加損益, 取其便易. 又手詔諭天下 "以高句麗蓋蘇文弑主虐民, 情何可忍? 今欲巡幸幽·薊 問罪遼·碣 所過營頓, 無爲勞費." 且言, "昔, 隋煬帝殘暴其下, 高句麗王仁愛其民. 以思亂之軍擊安和之衆, 故不能成功. 今略言必勝之道有五, 一曰, 以大擊小, 二曰, 以順討逆, 三曰, 以理乘亂, 四曰, 以逸敵勞, 五曰, 以悅當怨, 何憂不克? 布告元元, 勿爲疑懼." 於是, 凡頓舍供備之具, 減者太半.]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감(少監) 구행엄(丘行淹)을 보내 먼저 중공(衆工)을 독려하여 안라산(安羅山)에서 사다리와 충차(衝車)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 응모한 원근의 용사들과 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황제가 모든 것을 친히 가감하여 편이한 것을 취하였다. 또 친필 조서로써 천하에 알렸다.

“고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그 실정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느냐? 이제 유주와 계주(薊州)를 순행하고 요동과 갈석으로 가서 그 죄를 물으려고 하니, 지나는 곳의 군영과 숙사에서 노력과 경비가 들지 않도록 하라.”

또 말하였다.

“예전에 수 양제는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했는데, 고려왕은 그 백성들을 인자하게 사랑하였다. 반란을 생각하는 군사로써, 편안하고 화목한 백성들을 쳤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지금 대략 말해서, 필승의 길은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것으로써 작은 것을 치는 것이고, 둘째는 순리로써 반역을 치는 것이고, 셋째는 다스려진 형세로써 어지러운 틈을 타는 것이고, 넷째는 편안함으로써 피로한 것에 대적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기쁨으로 원망에 맞서는 것이다.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할 것이냐? 백성들에게 포고하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로써 무릇 숙사, 공급, 설비의 기구를 줄인 것이 태반이었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11월 경자

 

당 태종이 말한, 그 소위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1)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치는 것.

2)순리로서 반역을 치는 것.

3)다스려진 형세로 어지러운 틈을 타는 것.

4)편안함으로서 피로한 것에 대적하는 것.

5)기쁨으로 원망에 맞서는 것.

 

뭐, 듣기에는 그럴듯해보인다. 하긴 전쟁에 명분이 없으면 자기네들이 나설 깜이 되겠는가. 처녀가 애 낳아도 할 말은 다 있는 법이고, 핑계 없는 무덤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만....

 

그리고 12월 신축, 무양공(武陽公) 이대량(李大亮)이 죽는다. 그는 죽기 직전에 표문을 올려 고려를 정벌하는 군사를 파하기를 청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여기서 관둬도 되었을 것을. 하여튼 욕심많은 사람 치고 잘 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詔諸軍及新羅·百濟·奚·契丹, 分道擊之.]

여러 군대와 신라, 백제, 해(奚), 거란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3년(644) 12월 갑인

 

12월 갑인. 당군은 본격적으로 고려군을 치게 했다.

 

천도(天道)에서 살펴보면 뇌정(雷霆)을 울려서 만물을 죽이고, 인사(人事)에서 구해 보면 무기를 벌여 놓고서 사방에 위엄을 보이는 것이다. 비록 느리고 빠른 것이 시대에 따라 다르고, 질박하고 문채 나는 것이 제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잔학한 자를 추방하고 포악한 자를 금지시키며, 법도를 어기는 자를 주륙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는 자를 토벌하는 것은 모두가 의(義)를 일으켜 세워 구벌(九伐)을 펴서 문덕(文德)을 온 천하 안에 밝히고, 때를 인하여 삼령(三令)을 바로잡아서 무공(武功)을 전쟁을 멈추는 데에서 이루는 것이다.
짐이 황제의 자리에 공경히 응하여 천하에 군림하면서 종사(宗社)의 위령(威靈)에 기대고 경사(卿士)들의 힘에 의지하매, 신령과 귀신들이 복록을 쌓고 중화와 오랑캐가 복종하여 귀부하였다. 그러므로 상주국(上柱國) 요동군왕(遼東郡王) 
고건무(高建武)는 일찍부터 충성심을 보이고 일찌감치 조정의 교화를 받들어, 충성스럽고 의로운 절개를 우이(嵎夷)에서 능히 드러내었고, 직공(職貢)을 바치는 전례(典禮)를 왕회(王會)에서 어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신하인 막리지(莫離支) 개소문이 흉특한 마음을 품고 불령스러운 무리들을 불러 모아, 몰래 역모의 계획을 꾸며 문득 시해를 자행하였다. 이에 원통함이 예맥(穢貊)의 지역을 감싸고, 애통함이 중국에까지 스며들었다. 번국(藩國)의 왕통을 찬탈하여 국정(國政)을 농단하매 법령이 문란해지고 상벌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으며,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능멸하매 원근에서 모두 원망하고 탄식하였다. 그런 데다가 난리를 일으키기를 몹시 좋아해 무력을 함부로 써서 전쟁을 쉬지 않아, 여러 흉특한 무리들을 거느리고서 신라의 국토를 자주 침범하였다. 이에 신라는 국토를 잃어 걱정하고 위태롭게 여김이 날로 심해진 탓에, 멀리 있는 짐에게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는 사신을 잇달아 보내왔다.
짐은 신라가 거꾸로 매달린 듯이 위태로운 것을 안타깝게 여겨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지극한 이치를 들어 말해 주면서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일찍이 잘못을 고칠 줄 몰라 조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은 채, 우리의 변경 지역을 몰래 엿보고 쥐새끼처럼 굴속에 숨어 관망하기만 하였다. 그러면서 다시금 성곽을 수리하고 군량을 모으느라 더욱더 번거롭게 세금을 거두어, 장정들은 칼날 아래에서 다 죽어 가고, 노약자들은 성을 쌓는 데에서 피폐해졌다. 오랫동안 농사짓는 것을 폐하여 모두들 기근으로 죽었고, 생육(生肉)이 괴이함을 드러내어 망할 징조가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핏물 같은 비가 내리는 요사스러운 일이 있어 운수가 다했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에 집집마다 수심과 고통 속에 날을 지내고 온 경내가 슬픔과 걱정 속에 날을 보내면서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 가혹한 정사를 감당해 내지 못한 채, 목을 길게 빼고 까치발을 들고는 제왕의 은택이 내리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옛날에 
유묘(有苗)가 따르지 않자 대우(大禹)의 수레가 수고로이 행차하였고, 갈백(葛伯)이 밥을 먹여 주는 자를 원수로 삼자 성탕(成湯)의 군사가 출동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떳떳한 법도를 어그러뜨리는 크나큰 도적이 삼강(三綱)을 문란케 하면서 반역을 행하고, 하늘에 넘치는 큰 죄를 지은 원악(元惡)이 오형(五刑)을 다 써도 모자라는 죄를 지은 경우이겠는가.
짐은 새벽에 일어나 옷을 입고 앉아서 걱정하고, 날이 저물어서도 밥을 먹는 것을 잊었다. 죄를 성토할 뜻은 이미 노하여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는 데에서 깊어졌고, 위급한 사람을 구해주는 의리는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구해 내는 데에 더욱 진념하였다. 이에 상제(上帝)께 제사를 지내고서 출정 길에 올랐으며, 하관(夏官)에게 조서를 내려서 병사들에게 고하였다.
먼저 사지절요동도행군대총관(使持節遼東道行軍大摠管)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과 부총관(副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을 파견하노니, 군사와 말을 구름처럼 몰아 요좌(遼左) 지역으로 곧장 진격하여, 산악을 무너뜨릴 것 같은 위세를 떨쳐서 험독(險瀆)에서 뱀과 돼지처럼 날뛰는 자를 도륙하고, 물을 쏟아 붓는 기세를 타고서 누방(鏤方)에서 큰 고래처럼 사나운 자를 목 베라. 행군총관(行軍摠管) 집실사력(執失思力)과 행군총관 계필하력(契苾何力)은 자신들의 종족을 거느리고서 기회에 따라 나아가 토벌하라. 거란의 번장(蕃長) 어구절(於句折)과 해(奚)의 번장인 소지(蘇支), 연주자사(燕州刺史) 이현정(李玄正) 등은 각자 자신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그들이 도망치는 길을 끊으라. 사지절 평양도행군대총관(使持節平壤道行軍大摠管) 장량(張亮), 부총관 상하(常何), 총관(摠管) 좌난당(左難當) 등은 전함을 잇달아 거느리고 나아가 곧장 평양으로 진격하라.
신라왕 김선덕(金善德)은 신라의 모든 성읍(城邑)의 군사를 내고 모든 창고의 곡식을 꺼내어 출동해서 헤아릴 수 없는 은택을 등에 업고 누대에 걸친 원수를 갚되, 낙랑으로 나와서 고려의 한복판을 치고, 옥저에 임하여 고려의 소굴을 소탕하라. 백제왕 부여의자(扶餘義慈)는 일찍부터 충성심을 드러내었고 시대의 기미를 깊이 알고 있으니, 여러 해에 걸친 사사로운 교제를 끊어 버리고 천도(天道)에 따라 출동하는 공전(公戰)을 돕되, 군량을 운반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오직 나의 명령에만 따르라.
이상의 모든 군대들은 만리 밖에서 일제히 진격하여 해포(海浦)에서 하늘의 그물을 펼치고, 요양(遼陽)에서 땅의 그물을 펼치라. 짐은 그런 다음에 백랑(白狼)의 오른쪽 길을 경유해 나아가 현도(玄菟)의 성을 직접 순시하면서, 큰 북을 잡고서 육군(六軍)을 계칙하고, 깃발을 싣고 가서 팔진(八陣)을 지휘할 것이다. 그리하여 감히 끓는 물에 뛰어드는 자는 물고기처럼 썩어 문드러지게 할 것이고, 감히 뜨거운 불을 잡는 자는 얼음처럼 녹게 하여 악이 여문 데에서 그 괴수를 잡아 죽일 것이고, 목숨이 죽어 가는 데에서 백성들을 조문할 것이다. 그 가운데 혹 군사들을 동원하여 힘껏 공격하거나 몰래 행동하여 스스로 빠져나오는 자에 대해서는 의당 관대하게 대하여 각자 농토를 되돌려 줄 것이다. 공로가 있는 자에 대해서는 마땅히 상을 더 주고, 능력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그 재주를 써먹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악을 돕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지난날의 잘못을 답습하는 자가 있을 경우, 부월(斧鉞)이 즉시 가해지는 형벌이 내려져서 반드시 머리가 잘리는 슬픔을 당할 것이며, 옥석(玉石)이 한꺼번에 타 버리듯 함께 화를 당하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탄식을 곧바로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짐의 뜻을 선포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서 알게 하라.

 

때는 보장왕 3년ㅡ서기 644년. 1차 고당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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