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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8>제28대(마지막) 보장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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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世勣進至遼東城下, 帝至遼澤, 泥○二百餘里, 人馬不可通. 將作大匠閻立德布土作橋, 軍不留行度澤東.]

이세적이 나아가 요동성 밑에 이르고, 황제가 요택(遼澤)에 이르렀으나, 진흙이 200여 리나 되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군대가 지체없이 요택의 동쪽으로 건너왔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5월 3일 경오(양력 6월 2일)

 

그, 이세민이 이른 요택이라는 이곳이, 지금은 개간이 많이 되서 괜찮은데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방이 온통 진흙창이라서 겨울만 되면 사람이 들어가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나? 당시의 태종이나 당군으로서는 고려 요동성(오열홀)에 이를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바로 이 요택이었다. 200리 진흙벌 요택에 다다른 것이 5월 3일 경오였고 도하를 시작한 것이 이틀 뒤인 5월 5일, 당군이 거기를 모두 무사히 건넌 것이 5월 10일. 이미 요하를 건너 요동성 일대에서 활약중인 요동도행군을 막느라 고려군은 당 태종의 요하 도강을 저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요하는 나중에 고려군보다도 당을 더 지독하게 괴롭히는 골칫덩이가 된다.

 

[王發新城·國內城步騎四萬, 救遼東. 江夏王道宗將四千騎逆之. 軍中皆以爲衆寡懸絶, 不若深溝高壘以待車駕之至. 道宗曰 "賊恃衆有輕我心. 遠來疲頓, 擊之必敗. 當淸路以待乘輿, 乃更以賊遺君父乎?" 都尉馬文擧曰, "不遇勍敵, 何以顯壯士?" 策馬奔擊, 所向皆靡, 衆心稍安. 旣合戰, 行軍摠管張君乂退走, 唐兵敗○. 道宗收散卒, 登高而望見, 我軍陣亂. 與驍騎數千衝之, 李世勣引兵助之. 我軍大敗, 死者千餘人.]

왕은 신성과 국내성의 보기(步騎) 4만을 내어 요동(오열홀)을 구원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맞섰다. 군중에서는 모두 군사의 많고 적음이 현저하게 다르니, 도랑을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아서 황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했다. 도종이 말하였다.

“적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깔보는 마음이 있을 것이며, 멀리서 왔으니 피곤해 할 것이다.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긴다. 마땅히 길을 깨끗이 치우고 황제를 맞이할 일이지 적을 임금[君父]께 남겨두려 하느냐?"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장사임을 나타낼 수 있겠느냐?”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와서 치니 향하는 곳마다 다 쓰러지니 여러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맞붙어 싸우게 되자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가 후퇴하여 도망치니 당군이 패하였다. 도종(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군진이 어지러웠다. 날랜 기병 수천 명과 함께 돌격하고, 이세적도 군사를 이끌고 그를 도왔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5월 8일 을해(양력 6월 7일)

 

신성과 국내성 두 성에서 모두 합쳐서 보낸 4만 보기가 당의 4천 기병과 맞붙었을 때, 당의 행군총관 장군예는 겁먹고 도망쳤다고 했다. 사실 당군은 말은 안 해도 고려군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행군총관이라는 벼슬은 휘하에 군사를 적어도 1만 명은 거느리고 있는 직책인데, 그런 직책을 가진 사람이 고려군에게 밀려서 후퇴했으니 당군이 오죽 겁먹었겠어. 숫자가 많든 기세가 충천해 있든 '이겼다'와 '졌다'의 관점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거든. 전쟁이라는 상황에 막상 처하게 되면. 아마 강하왕 도종과 영공 이세적이 나서서 고려군 1천 명을 죽이고 퇴각시키지 않았으면 여기서 또 기세가 꺾였을지 모른다.(4만 명 왔는데 천 명이 뭐냐 천 명이.)

 

[帝度遼水, 撤橋以堅士卒之心, 軍於馬首山, 勞賜江夏王道宗, 超拜馬文擧中郞將, 斬張君乂. 帝自將數百騎, 至遼東城下, 見士卒負土塡塹, 帝分其尤重者, 於馬上持之, 從官爭負土置城下.]

황제가 요수를 건너자 다리를 걷어치워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치고 강하왕(江夏王) 도종에게 위로하여 선물을 내리고, 마문거는 승진시켜 중랑장을 삼았으며, 장군예는 목을 베었다. 황제가 몸소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서 해자를 메우는 것을 보고 가장 무거운 짐을 덜어 말 위에 얹으니, 시종관들이 다투어 흙을 져다 성 밑에 놓았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5월 10일 정축(양력 6월 9일)

 

사실 당 태종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원정군이라는 성격상 추운 겨울에는 전쟁을 못 한다. 우리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려가 북방에서 정치제도나 문화를 정비하게 도와준 힘은 그 혹한의 추위였단다. 아군도 움직이기 힘들지만 동시에 적군도 움직이기 힘들거든. 겨울 동안은 적이 추워서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 것이고, 적이 안 들어오고 있는 평화시기 동안에 고려는 전투하느라 못하고 미뤄뒀던 여러 일들을 보고 그러는 거지. 추위가 고려의 평화를 보장하고 나아가 고려 문화의 발전에 공헌한 1등 공신이었던 셈이다.

 

5월 10일, 양력 6월 9일에 건넜으니까 겨울이 본격적으로 다가오는 10월까지, 4개월 안에는 당군이 무슨 수를 써서든 고려를 굴복시켜야 했다. 그렇게 요택의 험한 길까지 택해가며 요하를 통과한 당군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왜냐구? 수는 1월에 탁군에 도착해서 출발한지 두 달만에 요하 도강 과정에서 고려군과 충돌했고, 4월 중순에 주력군이 비로소 요하를 건넜어.(출발부터 요하 도강까지 넉 달이 걸린 셈이죠) 당 태종이 1월에 유주 출발해서 5월에 요하 도강에 성공한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수 쪽이 더, 진격 속도는 빨랐던 거지.

 

당군이 이렇게 수보다 늦게 요동성(오열홀)을 공격한 것은 아무래도 요서 일대에 전진기지를 확보해두지 못한 것과 당 내부의 여러 가지 정치적 과제(태자 책봉부터 시작해서 별의 별것들)를 해결하느라 시간이 많이 소모된 것을 들 수 있을 텐데, 전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시간관리'에서 이미 일을 그르치고 있는 주제에 요택 하나 건넜다고 저렇게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신다 참.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는 자존심은 제 명을 재촉하는 법. 그렇게 당 태종은 천신만고(?) 끝에 요동성(오열홀) 아래에 이르러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을 만날 수 있었다.

 

[李世勣攻遼東城, 晝夜不息, 旬有二日. 帝引精兵會之, 圍其城數百重, 鼓○聲振天地.]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12일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황제가 정예군을 이끌고 와서 합세하여 그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니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5월 17일 갑신(양력 6월 16일)

 

수 양제가 어떻게든 뚫고자 했던 요동성(오열홀)은 고려 공격에 앞서 꼭 손에 넣어야 하는 성이었다. 이 성만 차지하면 태자하를 따라서 동쪽으로 천산산맥을 넘는 궁장령과 마주치게 되고, 이곳을 넘어 본계시를 거쳐 남쪽으로 봉성시를 향해서 가면 오골성, 바로 평양으로 갈 수 있다. 더구나 50만 석의 식량과 2만의 고려군이 버티고 있는 이 성을 뒤에 두고서 고려 내지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 이 거대한 성을 함락시켜 배후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요동성(오열홀)은 꼭 손에 넣어야 했다.

 

[城有朱蒙祠, 祠有鎖甲○矛, 妄言前燕世天所降. 方圍急, 飾美女以婦神, 巫言 "朱蒙悅, 城必完."]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朱蒙祠]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 말하기를 전연(前燕) 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해지자 미녀를 치장하여 여신으로 만들어 놓고, 무당이 말하였다.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꼭 안전할 것이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5월 17일 갑신(양력 6월 16일)

 

이런 류의 전술은 사실 병법에서는 결코 쓰지 말라고 하는 정말 무지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지만,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고려군은 적군에 맞서는 아군의 사기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勣列砲車, 飛大石過三百步, 所當輒潰. 吾人積木爲樓, 結○罔, 不能拒. 以衝車撞○屋碎之. 時, 百濟上金髹鎧, 又以玄金爲文鎧, 士被以從. 帝與勣會, 甲光炫日.]

세적이 포차를 벌려놓고 큰 돌을 날리니 300보 넘게 날아가 맞는 것마다 이내 부서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밧줄로 만든 그물을 쳤으나 막을 수 없었다. 충차(衝車)로 성가퀴를 쳐서 부쉈다. 이때 백제가 검붉게 칠한 쇠갑옷[金髹鎧]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만들어 바치니, 군사들이 이것을 입고 따랐다. 황제가 세적과 만나니 갑옷 빛이 햇빛에 빛났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5월 17일 갑신(양력 6월 16일)

 

수가 그러했듯 당은 고려의 성을 치기 위한 갖가지 다양한 공성무기들을 전투에 이용했다. 흔히 '투석차'로 잘 알려진 포차(砲車), 돌로 된 성벽에 비하면 약하기 그지없는 성문을 집중공격하는 충차(衝車), 성안을 엿보는 운제(雲梯) 같은 것이 그런 것이었다. 당은 이런 강력한 공성무기를 앞세워 요동성(오열홀)을 마구 때려댔다. 특히나 위력적이었던 것은 포차다. 3백 근이나 되는 돌을 1리(250m)나 날릴 수 있는, 당시로서는 탱크나 미사일에 맞먹는 무기. 수 때에도 물론 발석차(포차) 같은 공성무기를 동원해 요동성(오열홀)을 공략할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포격 거리가 그리 길지 못했다. 더구나 고려의 쇠뇌와 활(특히 '활쏘기'에 있어 고려인들은 거의 '귀신' 아니냐)이 불화살을 날려 공성무기를 불태울까봐 사정거리 안에 접근할 엄두를 못 냈던 수 때의 경험을 살려, 당의 포차는 사거리를 훨씬 길게 개량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요동성(오열홀)을 포위한 당군의 숫자에 비해 고려군의 숫자가 너무도 적었다. 당 태종의 군사까지 합류하여 거대한 요동성(오열홀)을 무려 수백 겹이나 포위했다. 어떤 전쟁이든 포위당하면 지는 거다.

 

[南風急, 帝遣銳卒, 登衝竿之末, ○其西南樓, 火延燒城中, 因揮將士登城, 我軍力戰不克, 死者萬餘人. 見捉勝兵萬餘人·男女四萬口·糧五十萬石, 以其城爲遼州.]

남풍이 세게 불자, 황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 충차의 장대 끝에 올라가 성의 서남쪽 다락에 불을 지르게 하고, 불이 성 안으로 번지자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으로 올라갔다. 우리 군사들은 힘껏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는 1만여 명이었고, 포로된 자는 무적의 군사[勝兵]가 1만여 명, 남녀가 4만 명이었으며, 양곡은 50만 섬을 빼앗겼다. 성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5월 17일 갑신(양력 6월 16일)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수 양제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그 난공불락의 요동성이 함락당하다니. 네 번이나 고려를 침공했던 수 양제마저도 뚫지 못해 고전하던 오열홀을, 단 12일만에 박살내버리는 저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 먹고 저렇게 갑자기 세졌단 말인가? 공성무기를 통한 기술적인 공격과, 때마침 불어온 남풍을 이용해 오열홀에 불을 지르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성벽을 부수고 기어올라가, 기어이 오열홀을 함락시키고야 만다. 고려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당군은 요동성을 함락시킨 기념 겸으로, 이 날 봉화를 올려 승리의 기쁨을 전군과 함께 했다. 애초에 태종은 정주에서부터 수십 리마다 봉수대 하나씩을 설치해 요동까지 이어지게 해놓고, 비열홀을 함락시킨 다음 봉화를 올리기로 태자와 약속했는데, 이날 비로소 봉화를 올렸다. 《책부원귀》에 나오는 이야기다. 

 

당 태종 자신은 분명, 지금은 수 때와 비하면 다르다고 했다. 어찌 보면 사실이었다.

"원근에서 응모한 용사들과 공성기계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부병제이긴 했지만 당군은 강제징집된 병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전쟁 참가자로 이루어져 있었고, 당의 군대는 적의 측면을 포위하거나 후방에서 갑자기 공격하는 기동작전에 능했다. 수 양제 때 대규모 병력이 밀집 대형을 이루어 공격했던 것에 비하면, 당 태종이 이끈 당의 군대는 넓게 흩어져서 유연하고 기동성 있게 작전을 펼쳤다. 더구나 당 태종이 공성무기를 만들게 하면서는 직접 현장에 나가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성능을 직접 실험해보기도 했으니, 오열홀 공격을 위해 들인 공으로 말하자면 수 양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턱대고 머릿수만 늘렸던 수 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대규모 부대가 아니라 소수의 정예병으로 군대를 편성한 것도, 수 때에 비하면 상당히 진보한 수준이었다. 635년 당이 토욕혼을 공격했을 때, 서해도행군대총관 이정이 이끄는 당군은 빠른 기병을 거느리고 토욕혼을 뒤쫓았는데, 이는 돌궐과의 전투를 통해 그들에게서 터득한 기마전법에 힘입은 것이었다(당 태종 자신이 돌궐과의 싸움에 직접 출정해서 이긴 전력도 있다). 그렇게 당군은 퇴각하는 토욕혼을 뒤쫓아 2천 리를 질주해 토욕혼 왕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둔다. 그리고 5년 뒤인 640년, 당은 투르판 분지에 있던 고창을 그야말로 '박살'내버렸다. 당의 군대는 예전 수의 그것을, 아니 지금까지의 중국사를 통틀어 선대의 군사를 훨씬 상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요동성의 싸움에서 고려의 목에 칼날을 들이대는 섬뜩하기 그지없는 현실의 한 장으로 드러난다.

 

[帝之克遼東也. 白巖城請降, 旣而中悔. 帝怒其反覆. 令軍中曰 "得城, 當悉以人物賞戰士."]

황제가 요동성에서 이겼을 때였다.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뒤에 후회하였다. 황제는 그들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에 노하였다.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성을 빼앗으면 반드시 그 사람과 물건을 전부 전사들에게 상으로 줄 것이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1일 정유(양력 6월 29일)

 

 

 

을미(28일)에 군사를 백암성에 주둔시키고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신당서>

 

당군이 백암성 공격에 나선 것이 5월 28일. 그렇다고 해도, 이번에는 어째서 백암성까지 가는데 11일이나 소모한 거지? 지금까지 파죽지세로 잘 밀고 왔잖아 기한 하루도 안 거르고. 그런데 왜 여기서 11일을 소모한 거야?

 

<백암성의 치. 성벽의 툭 튀어나온 부분으로 공격용 장치다.>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이사마(李思摩)가 화살에 맞았는데, 황제가 친히 피를 빨아주었다. 장사들이 그 사실을 듣고는 모두들 감격해 하며 흥기하였다. 백암성은 산을 등지고 물가를 임해 있어 사면이 아주 험하고 가파랐다. 이세적이 충거(衝車)로 때려 부수면서 돌과 화살을 성안으로 비 오듯 퍼부었다.

《신당서》

 

다음날 당의 우위대장군 이사마가 선봉장이 되어 백암성 성벽 바로 앞에까지 접근해서 고려군을 위협하다가, 고려군의 독화살 쇠뇌를 맞고 땅에 떨어져버렸다. 당군은 이사마를 데리고 급하게 퇴각해버렸고, 다음날 당차와 포차를 이용해 본격적인 백암성 공격에 나섰다.

 

고려의 오골성(烏骨城)에서 1만여 군사를 보내어 백암성을 성원하니, 계필하력(契苾何力)이 8백 기(騎)로 이들을 쳤다. 계필하력이 몸을 날려 적진으로 들어갔다가 허리에 창을 맞았는데, 상련봉어(尙輦奉御) 설만비(薛萬備)가 단기로 달려가서 구원해 고려 군사가 우글거리는 틈에서 계필하력을 구해 돌아왔다. 그러자 계필하력이 더욱 분발하여 창을 꼬나 잡고 나아가서 싸웠는데, 기병을 따라 돌진하여 드디어 고려군을 깨뜨렸다. 수십 리를 추격해서 1천여 급을 목베었으며, 마침 날이 저물어서 파하였다.

《신당서》

 

백암성 교외에서 고려 지원군 1만이 당군 1개 행군과 충돌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당군의 지휘장수는 철륵 출신의 요동도행군총관 계필하력이었다. 그가 이끄는 8백 기가 고려군과 싸움을 벌였고, 이 싸움에서 고려군 장수 고돌발이 계필하력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계필하력은 상처를 띠로 묶고 다시 나와서 당군을 이끌고 싸웠고, 결국 고려군은 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백암성으로 들어갔다.

 

[李世勣進攻白巖城西南, 帝臨其西北. 城主孫代音, 潛遣腹心請降. 臨城投刀鉞爲信曰, "奴願降, 城中有不從者." 帝以唐幟與其使曰 "必降者, 宜立之城上." 代音立幟, 城中人以爲唐兵已登城, 皆從之.]

이세적이 백암성(白巖城) 서남방으로 진공하고 황제가 그 서북쪽에 이르렀다.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성에 이르러 칼과 도끼를 내던지는 것을 신표로 삼고 말하였다.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황제가 당의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말하였다.

“정녕 항복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

대음이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은 당병이 벌써 성에 올라온 줄 알고 모두 그를 따랐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1일 정유(양력 6월 29일)

 

성벽 높이만 15m에 달한다던, 고려의 백암성은 참으로 어이없게 함락당했다. 그 성주 손대음이 당과 짜고 몰래 성에다 당의 깃발을 꽂아두어 그것을 보고 백암성 사람들이 이미 전쟁에서 패한줄 알고 항복해버렸다는 것이다. 아마도 비사성과 개모성, 심지어 요동성ㅡ일찌기 수 양제가 그토록 쳐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성까지 무너뜨려버리는 당의 괴력 앞에, 백암성주는 그만 싸울 의욕을 상실해버렸던 모양이다.

 

[李世勣見帝將受其降, 帥甲士數十人, 請曰 "士卒所以爭冒矢石, 不顧其死者, 貪虜獲耳. 今城垂拔, 奈何更受其降, 孤戰士之心?" 帝下馬謝曰 "將軍言是也. 然縱兵殺人而虜其妻○, 朕所不忍, 將軍麾下有功者, 朕以庫物賞之. 庶因將軍贖此一城." 世勣乃退.]

이세적은 황제가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려는 것을 보고 갑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청하였다.

“사졸들이 다투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이 거의 함락되었는데 어찌 다시 그 항복을 받아들여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황제가 말에서 내려 사과하며 말하였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 못 하겠구나. 장군 휘하의 공이 있는 자에게는 짐이 창고의 물건으로 상을 줄 터이니, 장군은 이 한 성과 바꾸기 바란다.”

세적이 그제야 물러났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1일 정유(양력 6월 29일)

 

 

 

[創甚, 帝自爲傅藥. 城拔, 得刺何力者高突勃, 騶使自殺之, 辭曰 "彼爲其主, 冒白刃以刺臣, 此義士也. 犬馬猶報其養, 況於人乎?" 卒舍之.]
상처가 심해지니, 황제가 직접 약을 발라주었다. 성이 함락되자 하력을 찔렀던 고돌발(高突勃)을 잡아, 騶使하여 직접 죽이게 했다. 그가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왕을 위해 새하얀 칼날도 무릅쓰고 신을 찌른 것이니, 이는 의사(義士)입니다. 개나 말도 그 길러준 은혜를 아는데, 하물며 인간이겠습니까?"

라며 풀어주게 하였다.

《신당서》 권제110, 열전제35, 제이번장(諸夷蕃將) 中 계필하력

  

당군이 백암성에서 노획한 것은 《책부원귀》에 기록된 바 남녀 1만과 군사 포로 1,400명, 그리고 양식 2만 8천 석. 계필하력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던 고려군 장수 고돌발은 다른 사람들과 끝까지 싸우다가 수세에 몰리자 차라리 깨끗하게 죽겠노라고 자살을 택했으나 당군에 의해 구조되어 풀려났고, 백암성 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得城中男女萬餘口, 臨水設幄, 受其降, 仍賜之食, 八十已上, 賜帛有差. 他城之兵在白巖者, 悉慰諭給糧仗, 任其所之.]

성 안의 남녀 만여 명을 붙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고 그들에게 음식을 내렸으며, 80세 이상된 자에게는 비단을 차등있게 내렸다. 다른 성의 군사로서 백암성에 있던 자는 모두 위로하여 타이르고 양식과 병장기를 주어 그들이 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1일 정유(양력 6월 29일)

 

가만있자, 당이 요동성(오열홀)을 공격한 것이 4월 29일이었고, 함락된 것은 5월 17일. 요동성 함락 이후 11일이 지나서 당은 백암성으로 진격했었는데, 그 동안에 백암성에서 항복 사자를 보냈다가 다시 말을 번복해버린 모양이다. 아무래도 백암성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던 것 같은데... 항복까지 받아놓고. 설마 이번에도 거짓말인줄 알고 조심한 건가? 그래서 11일을 지체한 건가?

 

[先是, 遼東城長史, 爲部下所殺. 其省事奉其妻子, 奔白巖, 帝憐其有義, 賜帛五匹, 爲長史造靈輿, 歸之平壤. 以白巖城爲巖州, 以孫代音爲刺史.]

이에 앞서 요동성의 장사(長史)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 성사(省事)가 그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도망쳤었다. 황제는 그가 의리가 있는 것을 어여삐 여겨 비단 다섯 필을 내리고, 장사를 위해 상여를 만들어주고 평양으로 돌려보냈다. 백암성을 암주(巖州)라 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5월 28일 을미(양력 6월 27일)

 

이런 자잘한 일을 갖고 기록해놓을 정도로 당 태종을 띄워주고 싶었던 거냐. 너희는.

 

[初, 莫離支遣加尸城七百人, 戍盖牟城, 李世勣盡虜之. 其人請從軍自○, 帝曰 "汝家皆在加尸, 汝爲我戰, 莫離支必殺汝妻子. 得一人之力而滅一家, 吾不忍也." 皆○賜遣之, 以盖牟城爲蓋州.]

이전에 막리지는 가시성(加尸城) 사람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은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희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막리지가 필시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고서 한 집안을 멸망시키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황제는) 모두에게 양식을 주어 보내고 개모성을 개주라고 하였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서쪽 변경의 주요 성들이 당의 손에 떨어졌다. 그렇게 고려의 패전은 불보듯 뻔한 일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안시성(安市城).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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