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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9>제28대(마지막) 보장왕(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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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시성은 옛날 고려와 당이 만주 대륙의 패권을 놓고, 나아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타이틀을 걸고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 비단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가 아니라, 나처럼 그저 이리저리 이야기 모으러 다니기 좋아하는 정신나간 야사가로서도 꼭 한번쯤은 찾아가보고 싶은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고려 변경의 중요한 요새였던 이곳은, 645년 당 태종의 공격을 받았고, 이미 많은 요새를 빼앗긴 고려로서는 이 안시성을 지켜내기 위해 어떻게든 손을 써야만 했다.

 

당군으로서도, 요동성(오열홀)을 차지함으로서 일단 주요 공격축선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천산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궁장령에서 고려군과 싸워 크게 당했고 머리 맞대고 작전 궁리한 끝에, 당초 계획했던 바, 천산산맥을 넘어 고려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그들 배후의 백암성을 쳐서 후방위협을 없애고 안시성을 쳐서 요동방어선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천산산맥을 넘어서 평양성으로 진격하기로 전략을 수정한 다음 '선(先) 요동방어선 장악, 후(後) 평양성진격'의 기치를 걸고 안시성 방면으로 진격해 나아갔다.

 

그런데 《책부원귀》에 보면 이때, 6월경에 당 태종이 어차(御次)에서 내린 전지(傳旨)의 내용이 실려있다.

 

옛날 선대의 제왕들은 정벌(征伐)하는 일이 있었는데, 요(堯) 임금은 단포(丹浦)에서 싸웠고, 순(舜) 임금은 유묘(有苗)를 정벌하였으며, 문왕은 여(黎)를 정죄(定罪)하였고, 성탕(成湯)은 갈(葛)을 정벌하였다. 위에서 말한 네 분 임금이 어찌 바람결에 머리 빗고 비로 목욕하는 것을 즐기고, 군사들을 수고롭게 하며 백성들을 시달리게 하는 것을 즐겨 그랬겠는가. 흉특하고 잔악한 자를 주벌하지 않으면 교화가 흡족하게 펴지지 않고, 사납고 난폭한 자를 죽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다고 여겨서 그랬던 것이다.
저 고려의 막리지(莫離支)는 임금을 포악하게 시해하고 대신들을 모두 다 쳐 죽였으므로, 남아 있는 백성들은 원망하는 마음이 골수에까지 파고들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힘으로는 그를 제압할 수가 없어서 도적의 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마치 가뭄에 단비가 내려 주기를 바라듯이 짐의 군사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러니 고려가 멸망할 조짐을 그 누가 보지 못하겠는가.
시기는 놓쳐서는 안 되고 천도는 어길 수가 없는 법. 짐이 어찌 두터운 장막 안에서 잠자는 것을 싫어하고 노숙하는 것을 편안히 여기겠는가. 화려한 궁전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풍진 속으로 나가는 것을 즐길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짐은 젊은 날에 전쟁에 나아가 본 경험이 있어서 자못 임기응변의 방도를 알고 있다. 지금 사졸들이 모두 모였고, 병장기가 산처럼 쌓여 있으며, 충거(衝車)와 운제(雲梯)가 있으니, 날짜를 꼽아 가며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농부가 봄에 부지런히 농사짓는 것이 가을날의 수확을 거두는 시초인 것처럼, 사졸들은 먼저 힘을 다한 연후에야 상을 받을 것이다. 만약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적의 성을 무너뜨리고 함락시킨다면 높은 관직과 후한 작질을 내릴 것이다. 짐은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 감히 도망쳐 영오(營伍)를 버리고 이탈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 자신은 주륙을 당할 것임은 물론 처자식에게까지 죄가 미칠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모두 나라의 전형(典刑)이 있으며, 예로부터 지금까지 일상적으로 시행해 온 일이다. 짐이 맹세하는 말을 잘 기억하여 마땅히 스스로 힘쓰도록 하라.

 

뭐 격려차 내린 전지라는 건 알겠는데 잘 이야기 늘어놓다가 왜 갑자기 얘기가.... 영오를 버리고 이탈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帝至安市城, 進兵攻之.]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군사를 보내 공격하였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20일 병진(양력 7월 18일)

 

《신당서》에 보면 6월 11일 정미(양력 7월 9일)에 요동성을 출발해서, 아흐레만에 안시성에 이르러서 공격을 명했다고 했다. 백암성을 함락시켰는데 왜 주력군을 안시성으로 곧장 진격시키지 않고 요동성으로 다시 빼버린건지 참. 곧장 천산산맥 넘어서 오골성으로 쳐들어갔으면 당의 전략목표도 달성하고 고려를 더 빨리 무너뜨렸을 텐데, 어째서 당군은 그러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안시성 싸움에서 한 사람의 당장이 나타났다. 설인귀. 중국에서는 연개소문에 비길 만한 장수로 꼽히며, 수많은 경극에서 연개소문을 물리치고 위기에 처한 당 태종을 구하는 정의의 사도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구당서》에서는 그를 강주(絳州) 용문(龍門) 사람이라고 적었다. 지금의 중국 산서성 하진에 해당하는 곳이다.

 

[貞觀末, 太宗親征遼東, 仁貴謁將軍張士貴應募, 請從行. 至安地, 有郎將劉君昂為賊所圍甚急. 仁貴往救之. 躍馬徑前, 手斬賊將, 懸其頭於馬鞍, 賊皆懾伏, 仁貴遂知名.]

정관 말년에 태종이 친히 요동을 정벌할 때, 인귀는 장군과 장사를 찾아가 모병에 응하여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안시에[安地] 이르렀을 때, 마침 낭장(郞將) 유군앙(劉君昻)이 적(고려군)에 포위되어 매우 위급하였다. 인귀가 가서 구하였다. 말을 타고 달리며 스스로 적장을 베고, 그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고 돌아오니, 적들은 두려워 엎드렸고, 인귀는 마침내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구당서》권제83, 열전제33, 설인귀

 

연개소문과도 비길 만한 용장이라고 해봐야 사실 개코도 없지만, 당군을 끔찍하게 괴롭혔던 안시성에서 유일하게 건질만한 건수 가운데 제일 괜찮았기에 당에서는 설인귀를 연개소문에 필적할 무장으로 기리고자 했던 것 같다. 실상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서로 직접 맞붙었다는 기록은 역사에 없지만, 붙었다고 해도 사실 연개소문이나 설인귀 두 사람의 무예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었겠나. 틀림없이 나는 연개소문이 이겼을 거라고 자부하는 바이다.

 

<중국의 경극에 나오는 연개소문과 설인귀. 왼쪽에 칼을 등에 멘 쪽이 연개소문이다.>

 

그리고 이 설인귀의 활약상을 보면, 고려군이 안시성을 공격한 당군 장수를 거의 단체로 둘러싸고 갈구는 와중에 공을 세웠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이 일은 설인귀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때 안시성에서 쫓겨난 이후 당군은 한동안 안시성을 공격하지 못했고, 이때다 싶었는지 연개소문은 15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해 안시성 구원 및 당군 축출에 나섰다. 한편 당군은 안시성 공격에 실패하고 안시성 북쪽 교외로 물러나 진을 치고 있었다.

 

[北部耨薩高延壽 · 南部耨薩高惠眞, 帥我軍及靺鞨兵十五萬, 救安市. 帝謂侍臣曰, "今爲延壽策有三, 引兵直前, 連安市城爲壘, 據高山之險, 食城中之粟, 縱靺鞨掠吾牛馬, 攻之不可猝下, 欲歸則泥潦爲阻, 坐困吾軍, 上策也. 拔城中之衆, 與之宵遯, 中策也. 不度智能, 來與吾戰, 下策也. 卿曹觀之. 彼必出下策, 成擒在吾目中矣." 時, 對盧高正義年老習事, 謂延壽曰 "秦王內芟雄, 外服戎狄, 獨立爲帝, 此命世之才. 今擧海內之衆而來, 不可敵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糧道. 糧食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 延壽不從, 引軍直進, 去安市城四十里.]

북부(北部) 욕살(耨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은 우리와 말갈의 15만 연합군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근신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연수에게는 책략이 세 가지 있을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와서 안시성을 연결하여 보루로 삼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며 말갈 군사를 풀어 우리의 소와 말을 빼앗으면 공격해도 갑자기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요, 돌아가려 하면 진흙으로 막혀, 앉아서 우리 군사를 피곤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다. 성 안의 군사를 뽑아 함께 밤에 도망치는 것은 중책이다. 자기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나와 우리와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 경들은 보라. 그들은 필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내 눈 앞에 있다.”

그때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는 연로하여 일을 익히 잘 알았는데 연수에게 말하였다.

“진왕(秦王)이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 사람은 일세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천하의 무리를 데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고 시간을 보내며, 오랫동안 버티면서 기습병을 나누어 보내, 그 군량길을 끊는 것이 낫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할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그제야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연수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까지 갔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21일 정사(양력 7월 19일)

 

보통 고려와 말갈 15만 연합군을 지휘한 것이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 두 사람으로 다들 알고 계시는데, 그들이 15만 대군의 총지휘자일 수는 없단다. 《책부원귀》라는 책에 보면 고연수와 고혜진이 고려에서 맡고 있던 관직에 대해서 나오는데, 고연수는 제5위 위두대형 이대부(理大夫) 후부군주, 고혜진을 제7위 대형 전부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의 지방장관격인 욕살이라는 관직을 대체로 위두대형이 역임했는데, 여기서 고연수에게 당과의 장기전을 건의한 고정의는 《신당서》에서는 대대로라고 기록한다.

 

대대로는 막리지에 버금가는 고려의 1품 벼슬. 대로라는 관직부터가 이미 최하 위두대형 이상의 관직을 가진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고위직으로 고려의 국정을 총괄하는 대로회의(제가회의)의 구성 임원이다. 고연수나 고혜진의 욕살이니 대형이니 위두대형이니 하는 관직과 비교하면 고위직도 이런 고위직이 없다. 1품 벼슬을 지닌 사람이 5품이나 7품 벼슬을 가진 사람들의 휘하에서 보좌관 노릇이나 한다니, 앞뒤가 안 맞잖아? 당군 지휘관인 장손무기나 이세적은 다들 정1품 재상에 병부상서(국방장관)으로 다들 당에서는 한 벼슬 한다는 사람들인데, 나라의 운명을 건 전투에서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군권을 맡기고 그들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보좌관이나 시켜서 내보낸다니. 이것도 연개소문의 거만하기 짝이 없는 성격의 반영이라고 해야 하는 거냐?

 

이들을 고려군의 총지휘관으로 볼 수는 없다는 점은 이 무렵 그들과 같은 욕살 지위에 있던 책성과 오골성의 성주들이 최대 3만 정도의 병력을 거느렸던 것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아무리 특명을 받은 상황이라고 해도 고려군 전체의 1/2 혹은 1/3에 해당하는 15만 군사를 두 명의 욕살이 나누어서 지휘를 했다면 한 사람이 7만 명이 넘는 군사를 나눠 갖고 있었다는 건데, 연개소문이 이들의 능력이나 지위는 가늠하지도 않고 급한 와중에 너무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고 해야 되려나? 그건 아닐 거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군사에 관한 한은 고려 안에서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본인도 《김해병서》라는 병법서를 지었던, 그리고 나중에 사수에서 10만 당군을 거의 '전멸'시킬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지닌 전략가요 전술가인 연개소문이 "군사를 장수에게 맡길 때에는 신중하라"고 한 《손자병법》도 몰랐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서 말한 바, 관직의 급수나 당시 욕살들의 군사 숫자를 감안할 때 15만 고려군의 총사령관은 고연수에게 장기전을 건의했다는 대로 고정의로 봐야 한다. 그리고 '건의'가 아니라 '명령'이고 말이다. 경험이 많은 고정의 대로를 15만 대군의 총사령관으로 삼아 연개소문은 안시성으로 보냈고, 고정의는 휘하에 있던 고연수와 고혜진 두 욕살을 선봉장으로 삼아 먼저 파견해놓은 다음 자신은 차차 뒤따라간 것이겠지. 안 그랬으면 어떻게 15만이나 되는 대군이 하룻밤 사이에 30리나 되는 거리를 갈 수가 있었겠나.

 

[帝恐其低徊不至, 命大將軍阿史那社, 將突厥千騎以誘之. 兵始交而僞走, 延壽曰 "易與耳." 競進乘之. 至安市城東南八里, 依山而陣.]

황제는 그가 머뭇거리면서 오지 않을까봐, 대장군 아사나사이(阿史那社)에게 명령하여 돌궐의 1천 기(騎)를 거느리고 가서 유인하고, 첫교전에서 거짓으로 달아났다. 연수는

“상대하기 쉽구나.”

하고 다투어 나아가 그들을 이기고, 안시성 동남쪽으로 8리 되는 곳에 이르러 산에 의지해서 진을 쳤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21일 정사(양력 7월 19일)

 

고려와 당 양쪽이 선호하는 전술은 서로 달랐다. 고려군 안에서 군사 자문으로 와있던 대로 고정의라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고려의 전통적인 청야수성전ㅡ그와 비슷한 장기전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예전에 후한의 대군을 좌원에서 크게 작살낸 명림답부의 전술이기도 했다. 무턱대고 칼을 부딪치는 불필요한 싸움을 해봤자 칼만 빨리 닳게 할 뿐, 그럴 바에는 칼을 쥔 사람을 우선 지치게 하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이 고려의 전통적인 전술이자 병법이었다.

 

일단 궁장령에서 당군을 저지하는데 성공, 전장 범위를 요동방어선 내로 한정시키는 데 성공한 고려군은 조금 유리한 입장에서 '모루와 망치' 작전을 펼쳤다.(내가 만든 단어가 아니라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라는 책에서 봤음) 요동의 요새들을 모루로 삼고, 15만 대군을 망치로 삼아서 공격한다는 것이 이 작전의 요체였다.

 

사실 고정의의 말은 당의 처지를 어느 정도 꿰고 있었다. 고려의 지원군이 안시성과 연계해서 싸움을 질질 끌었다간, 그렇게 버티다가 고려군이 몰래 보급로를 끊기라도 하면 예전 수 때의 재탕이 될 수밖에 없거든. 쫄쫄 굶은 당군을 고려군이 거의 도살하다시피 다 죽여버릴 것이니....

 

그러나, 예전 수를 이긴 전술대로 당의 군량 보급을 끊고 방어전을 펼치다가 그들이 퇴각할 때에 기습하자는 고정의의 말을 듣지 않고, 고연수는 4만의 선봉대를 이끌고 곧바로 평지전으로 돌입하기에 이른다. 저들이 일부러 싸움에서 진 척 해주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당 태종이 말한 '하책', 가장 불리한 전술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돌궐 기병을 궁수부대를 앞세워서 깨뜨리고, 당의 군사들을 얕보고서 그들의 유인작전에 말려들고 만다.

 

[帝悉召諸將問計, 長孫無忌對曰 "臣聞, '臨敵將戰, 必先觀士卒之情.' 臣適行經諸營, 見士卒聞高句麗至, 皆拔刀結○, 喜形於色. 此必勝之兵也. 陛下未冠, 身親行陣, 凡出奇制勝, 皆上稟聖謀, 諸將奉成○耳. 今日之事, 乞陛下指○." 帝笑曰 "諸公以此見讓, 朕當爲諸公商度." 乃與無忌等, 從數百騎, 乘高望之, 觀山川形勢, 可以伏兵及出入之所.]

황제가 여러 장수를 모두 모아 계책을 물으니, 장손무기가 대답하였다.

“신은 듣건대 ‘적과 맞서 싸울 때는 반드시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이 마침 여러 군영을 지나는데, 사졸들이 고려가 왔다는 것을 듣고 모두 칼을 뽑고 깃발을 매달며 얼굴에 즐거운 빛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이길 군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스무 살 이전에 친히 군진에 나가 기습병을 내어 이겼으니, 모두 위에서 황제의 계획을 받고 여러 장수들이 계책을 받들어 이루었을 뿐입니다. 오늘 일은 폐하께서 지휘하십시오.”

황제가 웃으면서

"경들이 이같이 사양하니, 짐은 마땅히 경들을 위하여 헤아려 생각하겠다."

고 말하고 무기 등 따르는 기병 수백 명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며, 산천의 형세가 군사를 숨길 만한 곳과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21일 정사(양력 7월 19일)

 

고연수와 고혜진의 선발부대를 앞세운 고려와 말갈의 15만 연합대군이 안시성 40리 밖에서 천천히 진군하는 동안, 당군은 주변 지리를 살피고 있었다. 고려군이 속도전으로 승부를 내려고 해준다면야 당으로서는 오히려 더 반가운 일. 보급 문제 때문에라도 고려군과 오래 전쟁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터다. 이런 종류의 속전속결은 주로 기병대를 가지고 많이 쓰게 되는데, 소규모 부대로 적군을 유인해서 포위한 다음에 궤멸시키는 것은 일찌기 《육도》에서도 말한 전술이다.

 

[我軍與靺鞨合兵爲陣, 長四十里. 帝望之, 有懼色. 江夏王道宗曰 "高句麗傾國以拒王師, 平壤之守必弱. 願假臣精卒五千. 覆其本根, 則數十萬之衆, 可不戰而降." 帝不應, 遣使紿延壽曰 "我以爾國强臣弑其主, 故來問罪, 至於交戰, 非吾本心. 入爾境, 芻粟不給, 故取爾數城. 俟爾國修臣禮, 則所失必復矣." 延壽信之, 不復設備. 帝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 陣於西嶺, 長孫無忌·牛進達, 將精兵萬一千爲奇兵, 自山北出於狹谷, 以衝其後.]

우리 군사가 말갈과 병사를 합쳐 진을 치니 길이가 40리에 뻗쳤다. 황제가 그걸 바라보며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강하왕 도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천자의 군대를 막고 있으므로 평양의 수비는 필시 약할 것입니다. 신에게 정예병[精卒] 5천을 주소서. 그 근본을 엎으면 수십 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황제가 듣지 않고 사신을 연수에게 보내 말하였다.

“난 너희 나라의 권신이 임금을 죽였으므로 죄를 묻기 위해 왔는데, 교전하기까지에 이른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국경에 들어오니 꼴과 양식이 부족하여 성 몇 개  빼앗았다.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를 갖추면 잃은 것을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 이세적에게 명하여 보기 1만 5천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 진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이 거느린 정예군 1만 1천 명을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그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21일 정사(양력 7월 19일)

 

요동을 돌아서 평양을 치자는 것은 수 양제가 일찌기 우중문과 우문술을 시켜 별동대 30만으로 감행하려던 작전인데, 이 작전이 실패해서 우리에게 '살수대첩'이라는 승전사만 남겨주고 끝났던, 당으로서는 기억하기도 싫은 처참한 패배의 기억만을 안겨주고 말았던 전례가 있다. 그것을 의식한 당태종은, 우회해서 고려 본국, 즉 평양을 치자는 강하왕 도종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지만 그것을 당 태종은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한다), 
고연수에게 사신을 보내 편지를 전하는데, 그놈의 편지 내용 좀 봐라.

"너희 나라 권신이 왕을 죽였으므로 죄를 물으러 왔다."

"교전하는 데까지 이른 것은 내 본심이 아니다."

"너희 국경에 들어왔는데 마침 말과 사람이 먹을 양식이 없어서 성 몇 개 뺏은 것 뿐이다."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만 갖추면 잃은 것을 반드시 돌려주마."

어쩐지, 당 태종이 고려군에 대해서 엄청, '달래듯이', '사정하듯이',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 한 명 뿐일까?

 

[帝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山. 帝勑諸軍, 聞鼓角, 齊出奮擊, 因命有司, 張受降幕於朝堂之側. 是夜, 流星墜延壽營.]

황제는 스스로 보기 4천을 거느리고 북과 피리를 가지고 깃발을 눕혀 산으로 올라갔다. 황제는 여러 군대에 명하여 북과 피리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와서 힘내어 공격하게 하고, 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조당(朝堂) 옆에 항복을 받을 장막[受降幕]을 설치하였다. 이날 밤 별똥별[流星]이 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21일 정사(양력 7월 19일)

 

그러니까 뭐야, 고려군이 진을 치고 있는 산의 북쪽으로 몰래 올라가게 해서 당군과 고려군이 맞붙어 싸울 때에 고려군을 뒤에서 치라는 말이잖아.

 

[旦日, 延壽等獨見李世勣軍少勒兵欲戰. 帝望見無忌軍塵起, 命作鼓角, 擧旗幟, 諸軍鼓噪並進. 延壽等懼, 欲分兵禦之, 而其陣已亂. 會有雷電, 龍門人薛仁貴, 著奇服, 大呼陷陣, 所向無敵, 我軍披靡. 大軍乘之, 我軍大潰, 死者二萬餘人. 帝望見仁貴, 拜遊擊將軍.]

이튿날 연수 등은 홀로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대를 통솔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북 치고 피리 불며 깃발을 들 것을 명하니, 여러 군이 북치고 소리지르며 일제히 나아갔다. 연수 등은 두려워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 군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용문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군진을 함락시키니,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고, 우리 군사들은 쓰러졌다. 대군이 들이치니 우리 군사들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 여 명이었다. 황제가 인귀를 바라보고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22일 무오(양력 7월 20일)

 

일단 선봉부대ㅡ적의 본진을 뚫고 들어가는 '탱크' 역할을 하는 그들의 특성상, 고연수의 선봉대는 아마 대부분 기병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야 이곳까지 오면서 보여준 그 눈부시게 빠른 속도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니까. 이 기병의 천적은 수많은 창을 고슴도치처럼 세운 장창 부대다. 고연수의 기병대를 상대한 이세적의 군사들은 아마 그러한 특성을 살린 보병대, 장창부대였을 것이고(실제로 이때에 이세적이 장창을 든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있었던 사실이 《구당서》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고슴도치같은 장창을 빽빽하게 세워서 막고 있는 이세적의 진으로 기마병이 제대로 돌진하지 못하는 사이에 태종과 장손무기의 군사들이 위아래 양쪽에서 합공해온다.

 

《손자병법》에서 말한 바, "모든 전쟁은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뒤에야 벌인다". 이미 적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뒷쪽에서 장손무기의 군사들이 급습해서 치니 그야말로 놀랐겠지. 뿔나팔 소리에 북소리. 마치 6.25때에 중공군이 북과 꽹과리 울리면서 미군과 국군을 쓸어 밀듯 사방에서 당군이 고려군을 포위하고 압박해온다. 포위당한 상태에선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소용없어. 장창을 들고 달려드는 당군과, 기병대의 후미 공격, 산에서 내려오면서 달려드는 당군의 공격 앞에 15만 고려군 가운데 3만이 '개죽음' 당했다. 주필산의 싸움은 고려군의 대패로 끝났다.

 

주필산 싸움은 1차 고당전쟁에서 가장 기록에 남을 만한 3대 전투의 하나로 손꼽힌다.

하나는 요동성(오열홀)에서, 하나는 안시성(안촌홀)에서,

그리고 바로 이곳 주필산에서. 요동성이나 안시성에서의 싸움이 워낙 치열했기에,

그리고 일단은 '졌으니까'. 우리나라 사람이든 중국 사람이든,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든 자신들이 오지게 깨지고 얻어터진 것에 대해서는

정신상태 멀쩡한 이상 어떻게든 숨기려고 애를 쓴다.

이 싸움에서 고려는 그들 역사상 단일 출동군으로는 최대 규모, 무려 '15만'의 대군을 동원한다.
(광개토태왕도 임나가라 칠 때에 5만 명 정도 동원했었지)

 

[延壽等將餘衆, 依山自固, 帝命諸軍圍之, 長孫無忌悉撤橋梁, 斷其歸路. 延壽·惠眞帥其衆三萬六千八百人, 請降, 入軍門拜伏請命. 帝簡耨薩已下官長三千五百人, 遷之內地, 餘皆縱之, 使還平壤, 收靺鞨三千三百人, 悉坑之. 獲馬五萬匹·牛五萬頭·明光鎧萬領, 它器械稱是,]

(고)연수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으나, 황제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포위하고, 장손무기가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돌아갈 길을 끊었다. 연수와 혜진은 무리 36,800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고,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황제가 욕살 이하 장관 3천 5백 명을 가려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을 잡아서 모두 파묻고, 말 5만 필과 소 5만 두,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하였다. 다른 기계들도 이만큼 되었다.

《삼국사》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6월 23일 기미(양력 7월 21일)

 

고려군과의 싸움이 승리로 돌아간 뒤, 당 태종은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서 고려군의 진영을 살펴보고는 이런 말을 했다.

“고려가 온 나라의 힘을 다 기울여 왔으니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다. 깃발 한 번 흔들어 패퇴시켰으니 이는 하늘이 도운 것이다.”

그리고는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고 하늘에 감사하였다. 《구당서》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싸움에서 당병이 죽인 고려군이 몇 명인지, 생포한 군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에 관련해 기록들은 하나같이 부실하기 짝이 없다. 마치 개독들이 그러하듯, 기록한 내용의 진위 여부에는 상관없이 '이겼다', '항복받았다'라고 책에 그렇게 적혀있다는 것만 강조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몰라', '기억 안 나', '아무튼 그래'로 일관하는 식이라니.

 

15만 고려군 중에 3만 명을 죽이고, 항복한 36,800명 중에서 욕살 두 사람과 추장 3,500명을 가려서 군직을 주고, 말갈 병사 3,300명은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그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평양으로 돌려보냈다(????) 그럼 나머지 3만은? 고연수와 고혜진이 항복할 때에 따르지 않은 9만 명은? 그 많은 병사들을 모조리 돌려보냈다고라? 장난하냐?! 어디 그뿐인가? 책마다 적어놓은 숫자도 또 달라요. 고려군 포로가 몇 명이었는지, 고려군 사망자가 몇 명인지,

 

《구당서》(945) 고려전 : 포로 156,800명, 사망자 10,000명.

《당회요》(961) 고구려전 : 포로 36,800명, 사망자 20,000명

《책부원귀》(1018)

-제왕부 신무 : 포로 156,800명, 사망자 10,000명

-제왕부 친정 : 포로 36,800명, 사망자 20,000명

-제왕부 요적 : 포로 36,800명, 사망자 30,000명

-제왕부 납항 : 포로 36,800명, 사망자 20,000명

《신당서》(1060) 고려전 : 포로 36,800명, 사망자 20,000명.

《자치통감》(1084) 645년 6월 기미일조 : 포로 36,800명, 사망자 20,000명

《삼국사》(1145)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조 : 포로 36,800명, 사망자 30,000명

 

아니 무슨 초등학교 산수문제도 아니고, 15만 군사 중에 죽은 놈이 1만 명인데 잡힌 포로가 15만 6,800명이라는 게 대체 어느 나라 산수 계산이냐고. 완전 재기불능 상태가 되었던지 아니면 전군이 포로로 잡혀야 정상 아냐? 사실 이것도 지휘부 전체가 적과 내통했을 경우라야 전군이 포로로 잡히는 것이 가능한데, 주필산 싸움에서 고려군 지휘부에 내분이 있었다거나 당과 내통한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만약 있었다면 당에서 그걸 왜 뺐겠어) 지네들도 그래 찔렸는지, 《구당서》나 《책부원귀》일부 내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포로가 36,800명이고 사망자가 2,3만을 웃도는 수치였다고 적었는데, 고려군의 사망자가 1만 명 내지 3만 명 가량이었다는 것은 기록에 어느 정도 아귀를 맞춰볼 여지는 있지만 그나마, 고연수와 고혜진이 실제로 거느리고 항복했다는 36,800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12만 명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혀 소개를 하고 있지 않다.

 

안시성 결전을 앞두고 포로가 된 고려군을 풀어주었다는 《당서》의 기록에 대해서도, 황원갑이라는 사람은 그것이 전적으로 허구라고 지적했다. 고려 장수 고연수가 태종에게 항복할 때에 그것을 따르지 않은 고려군이 온전히 남아서, 나중에 연개소문의 지휘에 따라 끈질긴 유격전으로 당군의 보급선과 진격로를 차단하는 등의 방법으로 당과의 전투를 벌이는데 앞장섰을 것이라고. 그렇게 이미 고연수가 당 태종에게 항복했는데도 그를 따르지 않는 병사가 많이 있으니까 그걸 숨기려고, 당태종이 마치 방면한 것처럼 위장했다는 것이다.

 

7월 신미(5일)에 황제가 안시성의 동쪽 고개로 군영을 옮겼다. 기묘(13일)에 전사한 자의 시신에 표시를 하게 하고 군사들이 돌아갈 때 그들에게 주어 함께 돌려보냈다.

《자치통감》

 

《구당서》와는 달리 《전당문(全唐文)》에 보면 주필산에서 당 태종 자신은 북쪽 산에 올라가 전황을 살피면서 영공 이세적에게 장사귀를 비롯한 행군총관 14명을 거느리고 고려군 서남쪽을 맡게 하고, 그보다 관직이 더 높은 장손무기에게는 26총관을 거느리고 동쪽에서 고려군의 배후를 치게 했다고 하는데, 《전당문》의 기록이 오히려 사실과 더 가깝다. 두 장수가 거느린 40명의 행군총관이라던가, 《당서》 양홍례열전에 기록된 바 병부시랑 양홍례가 지휘했던 보기 24총관의 병력을 모두 따져볼 때에, 주필산 전투에 참여했던 당군은 모두 30만. 연개소문이 보낸 군사보다 두 배나 더 많다. 그런데도 주필산에서 사흘에 걸쳐 고려군과 전투를 벌이고 난 뒤, 7월 5일에 안시성 동쪽으로 군영을 이동할 때까지 아무 움직임이 없다. 조용하다. 장손무기나 이세적은 물론이요, 유홍기나 양홍례 같은 장수들이 고려군과 전투를 벌인 기록도 없다. 왜일까.

 

[更名所幸山曰駐蹕山, 以高延壽爲鴻臚卿, 高惠眞爲司農卿.]

행차했던 산의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蹕山)'이라 하고,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7월 22일 무자

 

이때 당군에 항복한 고연수와 고혜진의 행보에 대해, 《삼국사》에서는 "고연수는 항복한 뒤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뒤에 홧병으로 죽고 혜진은 결국 장안에 갔다[高延壽自降後, 常憤歎, 尋以憂死, 惠眞竟至長安]."고 적었다. 지금 요동의 해성(海城) 동남쪽에 있는 여섯 개의 산을 가리켜 주필산이라 부르는데, 이곳에서 고려가 보낸 15만 대군이 당과 겨루어 싸움을 벌였고, 당의 군대는 아주 간신히 고려군을 대파했다. 이 주필산의 싸움에 대해 부식이 영감은 중국측의 사료 은폐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柳公權小說曰 "駐蹕之役, 高句麗與靺鞨合軍, 方四十里, 太宗望之, 有懼色." 又曰 "六軍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告 '英公之麾, 黑旗被圍' 帝大恐." 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及司馬公通鑑不言者, 豈非爲國, 諱之者乎?]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이런 말이 있다.

『주필의 싸움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합하여 사방 40리에 뻗치니 태종이 그것을 보고 두려운 빛이 있었다.』

『6군이 고구려에 제압되어 거의 (위세를) 떨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척후병이 ‘영공(英公)의 대장기인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습니다.’고 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했다.』

결국 스스로 빠져나가긴 했지만 두려워한 것이 그 정도였는데, 신 · 구 《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이걸 말하지 않은 것은 자기 나라(중국)를 위하여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10년(651)

 

부식이 영감은 유공권의 소설에서 인용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유공권의 소설이 아니라 《수당가화(隋唐嘉話)》라는 책에 내용이 실려있다. 이 무렵의 '소설'이라는 것은 지금처럼 허구의 꾸며낸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잡다한 이야기,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야사의 토막들을 모아서 관심사에 맞춰 적은 것을 말했다.(고려 이규보의 《백운소설》 같은 거지.) 강하왕 도종이 이틈을 노려 평양을 치자고 했던 주장을 당 태종이 묵살해버렸던 이야기도 여기에 나온다. 수당가화》란 당 때에 유속(劉餗)이라는 양반이 지은 일화집으로 일종의 '야사'라고 말할수 있는 것인데, 야사에서 전하는 것을 정사 기록에서는 숨겨버렸다는 것에서, 우리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은폐당했을 가능성을 점쳐볼수 있을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고연수와 고혜진의 뒤에 있었던 대로 고정의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글 쓰려고 여기저기서 책을 끌어다가 보고 이거다 싶은 대로 내용을 대충 쓰고 짜집기하고 거기서 내가 '아니다' 싶으면 버리고 내 생각 집어넣고 그러면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뺀다. 이번편에서 내가 인용한 책은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과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인데, 내가 이 두 책을 보고 이해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고연수와 고혜진의 선봉부대를 격파한 당군은 이후 곧바로,무언가에 의해 주필산에서 포위되었다.

 

나중에야 얘기하겠지만, 당군이 고려군을 깨뜨리고도 바로 안시성으로 진군하지 못하고 7월 5일까지 열흘 동안이나 머무른 것이나,안시성으로 곧장 가지 못하고 7월 22일에 뜬금없이 건안성을 친 것 하며(이 부분은 고려군의 공격이 얼마나 치열했고 그에 대한 당군의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 《자치통감》에서

 

장량(張亮)의 군사가 건안성(建安城) 아래에 이르러 벽루(壁壘)를 완전히 만들지 못하여 사졸들이 밖으로 나가 나무를 하고 꼴을 베었는데, 고려군이 갑자기 이르자, 군중(軍中)이 놀라 동요하였다. 장량은 본래 겁 많은 사람이라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똑바로 응시하고 말을 못하였는데, 장사(將士)들이 그것을 보고는 도리어 용맹스럽게 여겼다. 총관 장금수(張金樹) 등이 북을 울리면서 군사를 단속해 고려 군사들을 쳐서 격파하였다.

《자치통감》

 

8월 10일에 안시성 남쪽으로 진영을 옮기고서부터야 본격적으로 안시성 공격에 나선 것을 두고, 고려군에게 포위당했을 가능성을 유추해볼 수 있으리라. 고연수와 고혜진은 비록 패했지만, 고정의가 이끄는 15만 고려군의 주력군은 슬금슬금 흩어져 마침내 주필산에서 당군을 길게 포위해버렸던 것이다. 당군은 고려군의 포위에 막혀 안시성으로 곧장 진군하지 못하고 이곳에 갇혀 있다가 7월 5일께에 이르러 간신히 뒤에 남아있던 척후병과 기적적으로 연락이 닿았고, 주필산의 계곡 가운데 유일하게 평지로 이어져 있던 서쪽 통로를 집중공격해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당군은 천산산맥을 넘는 것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주필산 싸움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곳에 이르러 다시 재개된다.

 

그래 경솔하게 군사 잘못 움직였다가 실패한 고연수와 고혜진 두 장수와 잔병들 항복한 것 잡아놓고 당 태종은 꼭 자기 혼자 힘으로 15만 고려 군사 다 개작살낸 것처럼 의기양양 이렇게 말씀을 허신다.

“동이(東夷)의 소년(少年)이 해곡(海曲)에서는 날뛰었으나, 굳은 갑병을 꺾고 승리를 결정하는데 이르러서는 아직 마땅히 늙은이[老人]에 미치지 못하는구나. 지금도 또다시 천자와 함께 싸우겠느냐?”

동이소년, 즉 동이의 애송이라는 것은 고려의 막리지 연개소문을 말한 것이고, 늙은이는 당 태종 자신을 말한다. 연개소문이 아무리 날뛰어봤자 어린 애송이일 뿐이고, 노인의 노련함에는 당해내지 못한다고 하는 것에서, 고려의 15만 대군을 꺾었다는 당 태종의 자신감이 엿보인다.(실제로는 15만 고려군의 선봉만 꺾었을 뿐이지만)

 

개소문이 말갈을 시켜서 설연타(薛延陀)에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황제가 동정(東征)할 때에 설연타가 조공해 왔는데, 황제가 그 사신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가한(可汗)에게 말하라. 지금 내가 동으로 고구려를 정벌하니, 너희가 능히 입구하려거든 빨리 오라고.”

진주가한(眞珠可汗)이 사신을 보내 감사하고 병사를 내어 군사를 돕겠다고 청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개소문이 말갈을 시켜 진주(眞珠)를 달래고 후한 뇌물을 주었지만, 진주는 당을 두려워해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이때 개소문의 첩자 고죽리(高竹離)가 당의 척후병[候騎]에 잡혀 군문(軍門)에 나아가니, 황제가 그를 직접 만나보고[召見] 결박한 것을 풀어 주며 물었다.

“어찌 그렇게 수척하냐?”

“샛길을 골라 오느라 며칠 동안 먹지를 못했소이다.”

명하여 먹을 것을 주고 말하였다.

“그대가 첩자가 되었으니, 마땅히 어서 명을 따라야[反命] 되겠지. 나를 위해서 개소문에 말을 전하거라. ‘군중(軍中) 소식이 알고 싶으면 사람을 곧장 우리 있는 곳으로 보낼 것이지, 왜 샛길로 보내서 괴롭히느냐[辛苦]’라고.”

고죽리가 맨발이었으므로 황제가 신발을 주어 보냈다. 황제가 요동성 밖에 군영을 설치하는데, 척후(斥候)를 분명히 할 뿐 참호와 성루(城壘)를 만들지 않아서, 그 성에 가까워도 고구려 사람들이 끝내 감히 나와서 노략질하지 못하였다.

 

막리지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서 손 놓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설연타와 연계하고 있었다던가. 설연타는 옛 흉노의 별종, 수 때부터 알타이 산맥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몽골계 부족이다.

원래는 서돌궐(西突厥)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605년에 다른 철륵 부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다가 약 10년 후에 다시 강성해진 서돌궐에게 복속되었으나, 627년에 부족장 이남(夷男)이 부족을 이끌고 셀렝가 강 방면으로 이동해서, 위구르와 결탁해 동돌궐 북쪽 변경을 침공하고, 630년에는 당(唐)과 결탁해서 동돌궐을 와해시키고 몽골 고원을 지배했지만, 이남이 죽은 뒤 부족이 분열되어서 이 무렵에는 국세가 많이 쇠퇴해 있었다.

 

대막리지가 당의 침공을 맞아 몽골고원의 설연타에게까지 사신을 보낸 것, 그리고 당 태종이 고려의 포로는 살려보내고 말갈의 포로는 생매장시켜버린 것과, 나아가 이듬해 646년 설연타가 당에게 완전히 멸망당한 것. 우리는 여기 이 세 가지 사실에서 당 태종이 애초에 말했던 '우리는 수 때와는 다르다'라고 말한 것의 한가지 진면ㅡ이 무렵 우리에게 처해있던 끔찍한 국제현실의 단면을 엿볼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면서도 냉정한 현실.

 

고려에게는 우방이 하나도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고려를 침공하는 적의 후방을 견제해줄 세력이 하나도 없었다'고 해야 할까. 적어도 당의 시대에는 그러했다. 뭐랄까 마치, 남송이 멸망당한뒤 집중적으로 몽골의 침공을 받았던, 아울러 1905년에 일본과 을사늑약을 체결하던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해야 할지.

 

당 태종은 즉위 후 고려를 치기 전부터, 당 주변을 괴롭히던 수많은 이민족과의 전쟁을 벌였다.

투르판분지의 고창과 회골(위구르)을 멸하고, 돌궐을 복속시키며, 전쟁에서 변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토번(티벳)에는 황족인 문성공주를 송첸감포왕에게 시집보내어 우호를 맺고, 이 무렵 한반도에서 고려의 후방이자 적이었던 신라와는 조공-책봉 형식에 기반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 마디로, 고려와 백제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이민족(신라를 포함해서)은, 실질적으로 당의 편에 서서 고려와 싸우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말이다.

 

당이라는 나라 자체가, 선비족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그런 나라이니만큼 다른 한족 왕조에 비하면 이민족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고,그 이민족으로서 당의 장군으로 발탁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금 이 전장만 해도, 돌궐 출신인 장수 아사나사이와 계필하력이 당의 장수로서 출정했고, 그들이 이끄는 돌궐 기병이 고려의 기병과 맞서 당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이 무렵 백제와 왜를 제외한 사방의 모든 이민족이 직접적, 간접적으로 고려에게 칼날을 겨누며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그 상황에서, 고려가 그 많은 이들을 혼자 힘으로 상대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중원이 섣불리 고려를 멸하지 못한 것은 고려의 군사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의 배후에서 호시탐탐 고려를 압박하는 이민족들의 기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명이 조선과의 사이가 그렇게 악화되고도 조선에게 '공격할 것이다', '칠 것이다' 하고 엄포만 놓고 쉽게 칠 생각을 못한 것은, 그무렵 몽골의 잔여, 오이라트며 타타르같은 몽골 부족들이 북쪽에서 북원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명 왕조에 대해서 항거하고 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무렵에는 베트남까지 명 왕조와의 항전을 전개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명으로서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전국력을 쏟아부을만한 여력이 안 되었던 것이다. 즉 그때는 우리가 안전할수 있게 지켜줄 견제장치가 있었다.

 

수 양제 때만 해도 양제가 돌궐 추장 계민가한에게 고려를 칠 군사력을 달라고 했음에도 그는 따르지 않았다. 양제가 계민가한의 장막에 갔다가 고려 사신을 만난 이야기만 하더라도, 돌궐이 고려와 연계를 긴밀히 맺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양제의 아버지 문제는 평원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거란과 말갈을 조종해서 우리(수)의 변경을 친다'고 말했었다. 수의 변경을 위협하는 변경의 이민족, 북방의 여러 유목부족은 고려에게는 우호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들과의 우호만 유지하고 있어도, 고려는 동방에서 살아남을수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고려를 도와줄, 고려를 치는 적의 후방을 멋지게 뒤통수 한대 날려줄 이민족들이 모두 당에 포섭된 지금, 고려로서는 그들을 지원할 세력도 뭐도 없었다. 일찌기 수 양제에게 침공을 당할 때에도 사태 추이만 지켜보고 있다가 이긴쪽(고려) 편을 들던 백제가 이번같은 상황에서 또다시 그런 선택이 옳다고 판단할수 있을까?

 

아마, 고려의 15만 구원군을 깨뜨리고 사로잡은 포로 중에서 유독 말갈 포로에게만, '생매장'이라는 처참한 형벌을 가한 것은 그런 당태종의, 주변 이민족에 대한 공포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고려의 영향권에 놓여 고려를 돕고 있는 말갈에게, 계속해서 고려를 도우면 이렇게 생매장당해 죽는 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경고했다고 할까.

 

그렇게 해서 고려의 구원군은 패했고, 《동사강목》에서 묘사한바, 고려는 온 나라가 크게 놀래어, 후황성(後黃城)과 은성(銀城) 같은 고려의 성에 주둔하던 군사들이며 백성들까지, 당과 싸울 전의를 잃고 다 스스로 도망가버려, 부근 수백 리에 걸치는 곳에서는민가에서 밥 짓는 연기를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하지만 이것이 바로 고려의 청야수성작전의 일환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철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설연타와의 연계도 실패하고 후방에서의 군사적 지원도 끊겨버렸다. 안시성은 이제 자력으로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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