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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0>제28대(마지막) 보장왕(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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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의 위치에 대해서 조금, 헷갈리는 것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시성은, 지금의 영성자산성. 중국 당국이 민간인의 안시성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어 구체적으로 저 안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이 안시성이라는 것에는 여지껏 이견이 없었다.

 

성의 둘레가 2,472m에 남북과 동쪽에 비해서 서쪽이 비교적 낮다. 동쪽은 해발 160~170m로 성에서 가장 가파른 곳이고, 성의 동남쪽으로 약 30m쯤 되는 곳에 서쪽으로 성벽과 연결된, 정상이 평평한 돈대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여기를 점장대라고 부른다나. 지금은 여기에 7층 계단식 밭이 조성되어 있단다. 혹자는 이 점장대가 당이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토산이라고 비정하기도 한다.

 

조선조에 명과 청으로 사행가는 사신들이 꼭 여기를 한번씩 거쳐갔던 것 같다. 《무오연행록》이라던지 《몽경당일사》, 《계산기정》, 《연도기행》, 《연원직지》 같은 사신들의 사행기록에 꼭 한번씩 안시성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정작 그 위치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짚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성호 선생 같은 경우는 안시성을 지금의 봉황성이라고 하셨는데 '봉황'을 우리 나라에서 '아시새[阿市鳥]'라고 부르는 말이 '안시(安市)'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 그렇게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말이고 틀린 주장인데 사실 이때만 해도 굉장한 진보였다. 왜냐구? 그 이전에는 '더도덜도 말고 우리나라 안에서만'이라는 원칙에 따라 만주에 있어야 될 지명을 우리나라로 떠다가 싣는 일이 허다했거든. 그래서 원래는 만주에 있어야 할 안시성을 한반도 안으로 떠다와서는 '안시성은 지금의 안주다'ㅡ하고 말하는 황당한 주장이 있었다.(물론 지금은 아무도 안 믿지.) 안정복 영감은 《동사강목》에서 안시성의 위치에 대해 '안시성고(安市城考)'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논문을 발표(?)하셨다.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遼東郡) 망평현(望平縣) 아래에 반고가 스스로 주를 달기를,

“대요수(大遼水)가 새외(塞外)로 나가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이에 의하면 지금의 봉천부(奉天府) 해성현(海城縣) 지경이 바로 그 땅이다. 《일통지(一統志)》에,

“안시 폐현(廢縣)은 개주위(蓋州衛) 동북쪽 70리에 있는데, 한(漢)이 설치하였고, 당 태종이 쳤으나 항복하지 않았다.”

하였다. 개주는 지금의 개평(蓋平)이고, 해성(海城)은 개성(蓋城) 북쪽에 있으니, 안시는 아마 두 현의 경계에 있었을 것이나 여러 책에 기록된 것이 동일하지 않다.《여지승람》에는,

“용강현(龍岡縣)에 안시성이 있다.”

라고 했고, 김시습의 《관서록(關西錄)》 역시 안주(安州)를 안시성이라 했지만 두 설은 다 근거가 없다. 《삼국사기》에 있는 이적(李勣)의 주문(奏文)에 압록강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성 가운데 안시성이 들어 있으니, 그것이 요동 땅에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부식이,

“안시는 일명 환도(丸都)이다.”

한 것은 옳지 않다.<환도고(丸都考)에 보인다.>

 

후인들은 또 봉황성(鳳凰城)을 안시성에 해당시키는데, 아마 우리 나라 사람의 옛날 방언에 '봉황'을 '아시새[阿是鳥]'라 불렀으니, '아시'의 음이 '안시'에 가깝기 때문이리라. 역사책으로 상고하면 《자치통감》에,

“당이 고구려를 칠 때 이적은 '안시가 북쪽에 있는데,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建安)을 치다가, 적이 우리 군량길[糧道]를 끊으면 어쩌시렵니까?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고 장손무기(長孫無忌)는 '만일 안시를 버리고 오골(烏骨)을 친다면, 건안과 신성(新城)이 우리 뒤를 밟을 것이니, 먼저 안시를 깨뜨리고 건안을 취한 뒤에 휘몰아 나아가야 합니다.' 했다.”

하였다. 오골성은 요동 남쪽 지경 바다 가까운 땅에 있다. 그리고 《성경지》를 상고하면 건안은 개평 지경에 있고, 신성은 영해(寧海) 지경에 있으며 안시는 또 두 성의 뒤에 있으니, 지금 봉황성이 아님이 분명하다.

 

또 당 태종이 계미(18일)에 안시에서 군사를 빼고, 을유(20일)에 요동에 이르러 병술(21일)에 요수(遼水)를 건넜다.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는 지금 요양(遼陽)에 있고 요양은 곧 옛 요동군치인 양평현(襄平縣)이다. 요양에서 안시 폐현에 이르는 거리는 170리, 봉창성까지 거리는 3백여 리가 넘는데, 천자가 행군할 때 어떻게 사흘도 채 안 돼서 3백 리 넘는 거리를 갔겠는가?

《동사강목》 부록 하(下), 안시성고(安市城考)

 

조선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도 안시성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6월 24일 신미에 그는 봉황성에서 벽돌을 구워서 성벽을 수리하는 것을 보고 '벽돌'이라는 규격화된 축성재료를 조선에서 도입하지 않고 자연석을 깎아서 성을 쌓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데, 이 와중에 봉황성이 안시성이라는 얘기가 또 나온다.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에 화살맞은 이야기도 나왔는데, 연암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아닌지는 자세하게 살필 방법이 없는데, 대체로 이 성(봉황성)을 '안시'라고 부르는 건 틀린 얘기다. 《당서》에 안시성은 평양에서 거리가 5백 리고 봉황성을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부른댔으니까.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한다던데, 이건 뭘 말한 건지 모르겠다야. 또《지지》에 보니까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쪽으로 70리에 있다던데 대체로 개평현에서 동쪽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 3백 리이고, 수암하에서 다시 동쪽으로 2백 리 가면 봉황성이 나온다. 만약 이 성(봉황성)을 옛날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서 말한 '5백 리'라는 말하고 서로 딱 맞아 떨어지네 참.

 

연암 선생은 《열하일기》에서, 성호 선생이나 안정복 영감도 말하지 못했던 실로 엄청난(어찌보면 당시로서는 꽤나 급진적인) 주장을 하신다. 평양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평양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의 평양 말고도 다른 평양이 더 있었는데, 요즘 학자들은 평양이라고 하면 무조건 한반도 평안남도에 있는 그 평양만 떠올리지 요동에 또 평양이 있었는줄은 모른다고 연암은 꼬집는다.(안정복 영감의 박식한 견해마저도 한번에 뒤엎어버리는 파격적인 주장이다!!)

 

우리 나라 선비들은 지금 평양밖에 몰라서,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 그러면 그걸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그러면 그걸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 그러면 그걸 또 믿어서, 봉황성이 평양이다 그러면 크게 놀랄 거다. 더구나 요동에도 평양이 또 있었다 그러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나무라겠지. 그들은 아직 모른다. 요동은 원래 조선 땅이고, 숙신(肅愼)ㆍ예(穢)ㆍ맥(貊) 등 동이(東彝)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줄을. 또 오라(烏剌)ㆍ영고탑(寧古塔)ㆍ후춘(後春) 등의 땅이 원래 옛 고구려 땅임을. 아놔, 후세 선비들은 이런 경계도 안 밝히고 함부로 한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끌어다 주먹구구식으로 나눠놓고 다시 패수를 그 안에서 찾으면서, 어떤 놈은 압록강을 패수라 그러고, 어떤 놈은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 그러고, 어떤 놈은 대동강을 패수라 그러고. 이렇게 조선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지.(썅)

 

왜 그럴까? 평양을 한 곳에다 정해 놓고 패수 위치가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리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 다른 거거든. 나는 일찍이 한사군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게 아니고 분명 여진까지 들어간 거라 했다. 뭘 믿고 그러냐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하고 낙랑(樂浪)은 있는데 진번(眞蕃)하고 임둔(臨芚)이 안 보이거든. 대체 한의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BC. 82)에 4군을 합쳐서 2부(府)로 삼았다가 원봉(元鳳) 원년(BC. 76)에 다시 2부를 2군(郡)으로 고쳤는데, 현도의 현 세 개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의 현 스물다섯 개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고, 요동의 현 열여덟 개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어. 그런데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 리에 있대. 이건 김윤(金崙: 조선 세조 때의 학자)이 말한,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한 게 맞다고 봐야 한다는 거야. 이렇게 볼 때 진번ㆍ임둔은 한(漢) 말기에 바로 부여ㆍ읍루ㆍ옥저로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게 어쩌다 변해서 물길(勿吉)이 되고, 어떤 건 변해서 말갈이 되고, 어떤 건 변해서 발해가 되고, 어떤건 변해서 여진이 된 거지. 발해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풍속을 물려받았다.”

라고 했으니, 이걸 갖고 보면 한사군 절반은 요동,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 서로 포괄되어 있었고 원래는 우리 땅 안에 있었음이 더욱 명확해지는 거지.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질 않고, 또 우리 나라 선비들은 꼭 지금 평양만 갖고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단 말야. 다른게 아니고 옛날 중국 사람들이 평소에 요동 이쪽에 있는 강은 죄다 '패수'라고 부르다 보니까, 거리가 서로 안 맞아서 사실이 어긋난 거야. 그러니까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에 있다 치고 다음에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지. 그래서 패수 위치가 어디 정해져야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 고금의 사실이 부합되지. 그럼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여기가 만약에 기씨(箕氏)ㆍ위씨(衛氏)ㆍ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곳도 평양의 하나다 이렇게 답할 수 있겠지. 《당서》 배구전(裴矩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했고 한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라고 했으니까, 그 고죽국이란 건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고,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예전에 기자묘가 있어갖고 우관(冔冠)을 쓴 소상(塑像)을 여기다 앉혀놨는데, 명의 가정(嘉靖) 때에 병화(兵火)에 불탔다고 그러고, 광녕현을 아무는 '평양'이라 부르는데 《금사(金史)》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광녕ㆍ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다.”

했으니, 이걸 갖고 볼 때 영평(永平)ㆍ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고《요사(遼史)》에,

“발해 현덕부(顯德府)는 원래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이었는데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라고 했으니, 이걸 갖고 보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게야. 나는 
“기씨가 애초에 영평ㆍ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겨 2천 리 땅을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겨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晉)ㆍ송(宋)이 남쪽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래서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했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마찬가지다. 고구려의 지경이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면서 ‘패수’란 이름도 따라서 옮긴 것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ㆍ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뀌던 것과 같은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양반들은 대동강더러,

“이 물이 ‘패수’다.”

하고, 평양과 함경도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서는

“이 산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할 것이고, 반대로 요양을 평양이라 부르는 양반은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이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이 ‘개마대산’이다.”

하지. 그 중에 뭐가 옳은지는 모르지만 분명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는 양반은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하는 거야.

 

당 의봉(儀鳳) 2년(677)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으로 봉해서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 이를 통할했으니, 이걸 갖고 보면 고씨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지만 이를 갖지는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으니, 평양은 원래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여기다 잠시 빌려쓴 바람에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했을 뿐이야.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고 해도 이건 지금(조선)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평양을 말한 거지. 그 뒤 승국(勝國: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다 거란에 들어갔는데도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지키면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를 않는데, 그 바깥으로야 한 발자국이나 들여봤겠니. 고려가 안으로는 삼국(三國)을 합병했다고 해도, 강토와 무력은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했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해서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ㆍ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이고, 이것은 평양이오.”

라 그런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니.

 

평양이 요동 지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고유명사가 아니라 단지 '수도'를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쓰였다는 것이 연암이 말하는 주장의 요체다. 이는 오늘날 북한에서 살수의 위치를 지금의 청천강이 아닌 마자하로 비정하면서, 봉황성에 '북평양'이라는 고려의 또다른 별도(別都)가 있었다는 '북평양설'로 인계되고 있다. 지금의 황해도 재령은 고려의 '한성'이자 '남평양', 그리고 봉황성에 있던 고려의 '북평양'. 어쩌면 훗날 발해가 5경제도를 정비하게 된 것은 고려의 5부 체제만 본 것이 아니라, 이미 고려에서부터 발해의 그것과 같은 '5평양제'가 있었고 그것을 단지 발해가 이어받은 것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아무튼..... 연암 선생님, 당신이 짱이고 대박이십니다. You Win.)




그런데 얼마 전에 인터넷을 뒤지다가 재미있는 기사를 봤다. 진짜 안시성은 이 영성자산성이 아니라 따로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도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 아니라는 데는 여러 근거가 있다.

 

ㅡ산성의 지형이 험하지 않고 산도 높지 않으며 토성이어서 견고하지 않다. 성벽이 좁은 곳은 너비가 2M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당의 포차ㆍ충차의 경우 2M 정도의 흙덩어리는 얼마든지 뚫을 수 있었는데, 이런 토성에서는 10만 당군의 공격을 석 달 씩이나 막아낼 수 없다.

ㅡ영성자산성의 규모가 너무 작다. 성내는 주로 좁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평탄한 곳이 적어 10만 명의 군사가 주둔할 수 없다는 것이다.

ㅡ기록에 의하면 산성 동남쪽에 인공 토산이 있다는데, 그 토산은 너비가 20M도 채 되지 않고, 산등성이 가운데가 바로 동쪽 성벽의 토대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공위성이 촬영했다는 영성자산성의 토산 흔적도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일부 학자들은 이 성벽의 경우 인공 토산이 아니라 동쪽 성벽이 허물어진 흙더미로 추정하기도 한다.)

 

사학자 김일경은 만주 대석교 인근의 해룡천산성이 안시성이라고 주장했다. 해룡천산성은 산성을 견고하게 쌓은 것은 물론 둘레의 길이가 3천 미터 정도다. 산성 안은 넓고 수원이 풍부하며 성 안에서 전형적인 고구려식 붉은색 무늬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다. 안시성은 적정을 파악하는 곳으로 특별히 중요성이 있는데 성 북쪽의 해룡천 주봉과 그 가운데의 산등성이가 점장대 역할을 했으며 성내에도 두 곳에 점장대가 설치돼 있었다. 성에서 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초소(보루성)가 있는데, 현지 사람들이 그곳을 ‘고려성’으로 부른다고.

 

여기서는 두 설을 모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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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 영감의 《동사강목》에 보면, 주필산에서 고려와 말갈의 15만 연합군이 당군 10만과 싸워서 패하고, 고연수와 고혜진 두 장수가 포로로 잡히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고려는 온 나라가 크게 놀라 후황성(後黃城)과 은성(銀城)은 다 스스로 도망가니(실은 당군이 또 뼈빠지게 전투해서 함락시킨 거겠지만) 수백 리의 인가(人家)에 다시 밥 짓는 연기를 볼 수가 없었다고 기록한다. 지금은 이것이 고려의 '청야수성'이라는 전통적인 전술에 따라 주변의 민가를 모두 성안으로 옮긴 탓에 사람이 하나도 없이 들판이 텅 빈 것처럼 보이는 게 당연하겠지만, 당이 고려의 청야수성 전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당태종을 띄워줬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아마 둘중 하나는 사실이거나 둘 다 사실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당 태종은 자기가 주필산에서 15만 고려군(의 선발 부대)을 이기고 항복을 받아냈다는 것에 퍽이나 승승장구했던 모양인지,빠른 말에 편지를 띄워 태자한테까지 자랑한다.

“어떠냐? 짐이 장수 노릇함이 이 정도다.”

하고, 그들을 격퇴한 산을 주필산(駐蹕山)이라고 이름붙였다.

 

하긴 수 양제도 이기지 못한 적을 이겼다는 생각으로 자신감에 가득 찼겠지. '내가 수양제보단 낫지'하고. 그리고 이걸 문헌에다가 자랑스럽게 적어놓은 중국의 사가들은, 오히려 이것이 당태종 본인이 얼마나 고려를 겁내고 있었는지 반증하는 증거물이 될 줄은 몰랐을 게다. 왜냐고? 자기가 되게 힘들게 생각하고 겁내던 일인데 그게 의외로 쉽게 끝났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벅차겠어. 자기가 생각해도 대견하거든, 장하고. 난 해냈어, 난 길고 외로운(?) 싸움에서 이겼어, 난 이제 뭐든지 해낼 수 있어... 하고 그렇게 깡총깡총 뛰면서 초딩처럼 좋아라 뛰는 거지. 지금 당태종이 딱 그 꼴이다. 지금이야 그렇게 신나서 좋아하라지. 이제 곧 그 승리의 희열이 패배의 저열로 바뀌게 될테니.

  

[帝之克白巖也, 謂李世勣曰 "吾聞, 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材勇, 莫離支之亂, 城守不服, 莫離支擊之, 不能下, 因而與之. 建安兵弱而糧少. 若出其不意, 攻之必克. 公可先攻建安. 建安下, 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 '城有所不攻者也'."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 帝曰 "以公爲將, 安得不用公策? 勿誤吾事."]

황제가 백암성에서 이기자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안시성(安市城)은 험하고 군사가 날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 때에도 성을 지켜 굴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공격하고도 함락시키지 못하여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성(建安城)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다. 불시에 나가서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치라.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내 뱃속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에는 치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城有所不攻者也].'고 한 것이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지나쳐서 건안성을 쳤다가, 만약 고려인들이 우리 군량길을 끊으면 어쩌시렵니까? 먼저 안시성을 쳐서 안시성이 함락되면, 북 치며 나아가 건안성을 뺏는 것이 낫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책략을 쓰지 않겠느냐? 내 일을 그르치지나 말라.”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9월

 

"성에는 치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손자병법》 구변(九變)편에서 말한, 전쟁시 아홉 가지 변수에 대한 이야기다. 워낙 하루에도 몇 번씩 전세가 역전될 수 있는 전쟁터인지라 '혹시나' 싶은 아홉 가지 변동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전쟁을 벌이라는 것인데, 무슨 전쟁이든 이길 승산이 100% 있는 싸움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결코 싸우지 말라, 즉 "전쟁할 때에는 되도록이면 '모험'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손자이니만큼 "적진의 성도 쳐야 하는 곳과 치면 안 되는 성이 있다"는 말로 최대한 안전한 싸움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태종으로서는 후방을 차단당하지 않고 군량보급로도 보전하면서 속히 요동방어선을 뚫고 고려 심장부로 들어갈 계책이 필요했다. 백암성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는 아니지) 얻은 당 태종은, 곧바로 안시성(안촌홀)을 치지 않고 안시성(안촌홀)에 비해 상대적으로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었던' 건안성을 먼저 치려 한다.

 

그러나 이세적이 반대했다. 전에 수가 고려를 쳤을 때에도 고려가 후방에서 군량수송 끊어버리는 바람에 쓴맛을 보고 물러나야 했는데, 지금 건안성을 먼저 쳤다가 건안성의 위에 있는 안시성(안촌홀)이 군사를 내서 당군의 군량지원을 끊어버리면, 건안성에서도 군사가 약하든 군량이 적든 어떻게든 버티려 할 것이고, 그 사이에 다시 고려군이 후방에서 지원을 해오거나 안시성(안촌홀)에서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정말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이세적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선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은 약체인 건안성을 뒤에 남겨두고 안시성(안촌홀)을 먼저 치기로 한 것이었다. 일단 안촌홀만 뚫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리라.

 

[世勣遂攻安市. 安市人望見帝旗蓋, 輒乘城鼓噪. 帝怒. 世勣請克城之日, 男子皆坑之, 安市人聞之, 益堅守. 攻久不下.]

세적이 드디어 아촌골을 공격했다. 아촌골 사람들은 황제의 깃발과 일산[蓋]을 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치며 소리질렀다. 황제가 노하였다. 세적은 성을 빼앗는 날, 남자는 모조리 구덩이에 파묻어버리자 청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 말을 전해듣고 더 굳게 지켰다. 오랫동안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9월

 

어머, 뭔 말을 했길래 저렇게 길길이 날뛰실까~? 생각보다 그리 쉽지는 않았던 듯, 아촌골 안에 있던 10만 군민들은 흡사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인들 앞에서 손으로 입을 치며 '와와와와와와와와와' 하고 소리치고 함성 지르며 도끼와 창을 쳐들고 소리치듯 북치고 장구치고(?) 징 두들기고 온갖 소리를 다 지르며 흡사 축구경기 훌리건들 상대편 선수더러 야유하듯 당에 대한 욕설을 퍼붓는다.이건 뭐, 운동경기 중계도 아니고... 손자의 말대로라면 전쟁을 장난으로 보면 안 되는 건데. 결국 안시성을 깨지 못한 당군은 안시성을 두고 우회해 곧장 평양으로 갈지, 아니면 안시성을 깨고 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高延壽·高惠眞請於帝曰 "奴旣委身大國, 不敢不獻其誠. 欲天子早成大功, 奴得與妻子相見. 安市人顧惜其家, 人自爲戰, 未易猝拔. 今, 奴以高句麗十餘萬衆, 望旗沮潰, 國人膽破. 烏骨城耨薩老耄, 不能堅守, 移兵臨之, 朝至夕克, 其餘當道小城, 必望風奔潰. 然後收其資糧, 鼓行而前, 平壤必不守矣." 臣亦言 "張亮兵在沙城, 召之, 信宿可至, 乘高句麗忷懼, 倂力拔烏骨城, 度鴨淥水, 直取平壤, 在此擧矣." 帝將從之, 獨長孫無忌以爲, "天子親征異於諸將. 不可乘危徼幸. 今建安·新城之虜衆, 猶十萬, 若向烏骨, 皆躡吾後. 不如先破安市, 取建安, 然後長驅而進, 此萬全之策也."]

고연수 · 고혜진이 황제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저희가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감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큰 공을 빨리 이루시어, 저희가 처자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들의 집안을 돌보고 아껴서, 사람마다 자진해서 싸우므로 쉽게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저희가 고려의 10만여 군사를 데리고도 깃발을 보고 사기가 꺾여 허물어졌으니, 국인(國人)은 복장이 터질 지경일 겁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은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습니다. 군사를 옮겨 그곳으로 가시면 아침에 다다라 저녁에 이길 것이며[朝至夕克], 그 나머지 길을 막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위엄을 보고는 달아나고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그런 뒤에 물자와 양식을 거두어 북치고 나아가면, 평양도 결코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군신들도 역시 말하였다.

“장량의 군사가 사성(沙城)에 있으므로 그를 부르면 이틀 후면 올 수 있을 것이니, 고려가 두려워하는 틈을 타서 힘을 모아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수를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싸움에 달렸습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르려 하는데, 장손무기만 이렇게 말하였다.

“천자가 친히 정벌하는 것은 여러 장수와는 다릅니다. 위험한 형세를 타고서 요행을 바래선 안됩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적의 무리가 10만 명이나 되는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하면 그들이 우리 뒤를 밟을 겁니다. 먼저 안시성을 깨뜨리고 건안성을 빼앗은 다음에 군사를 멀리 몰고 나아가는 것이 나으니,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황제가 이에 그만두었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9월

 

사성(沙城)은 비사성(卑沙城)이다.(한진서가 《해동역사》에서 말한 바) 당이 함락시킨 이 비사성에 주둔중인 장량의 군대와 합류해서, 안시성과 건안성을 돌아 오골성을 먼저 함락시키고 곧장 평양으로 가자는 것이 군신들의 생각이었는데, 장손무기가 혼자서 빽빽 우기는 바람에 계속 머무르며 안시성을 공략하기로 결정한다. 나중에 가서 밝혀지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장손무기의 말을 듣지 않고 오골성을 치고 나서 압록강 너머 평양으로 갔더라면 고려 멸망이 좀더 일렀을까? 그가 우기지만 않았더라면, 하고 중국 사람들이야 《당서》를 보며 이를 갈겠지만 장손무기가 주장한 말이 완전 터무니없었던 건 아니다. 기록을 그냥 수박 겉핥기처럼 훑지 말고 하나하나 해부해서 보면 말이다.

 

태종은 처음 "건안성은 군사와 군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建安兵弱而糧少]."고 했는데, 왜 지금은 장손무기가 "건안성과 신성의 고려군이 10만이나 된다[今建安ㆍ新城之虜衆, 猶十萬]"며 후방 위협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걸까? 더군다나 처음에는 염두에도 두지 않던 신성까지 거론하면서. 당이 침공했을 때, 비사성이나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과는 달리 끝까지 함락되지 않고 버틴 그 성이잖아.뜬금없이 장손무기가 건안성과 함께 신성을 언급하면서 두 성의 군사가 도합 10만이라고 한 말은 안시성과 함께 버티고 있던 신성이 건안성과 합류했고 당군의 후방을 위협할 만큼 세력이 커졌다는 뜻일 것이다. 고려군이 당에 대한 후방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帝乃止 諸將急攻安市 帝聞城中雞彘聲 謂世勣曰 "圍城積久, 城中烟火日微, 今鷄彘甚喧, 此必饗士. 欲夜出襲我. 宜嚴兵備之." 是夜, 我軍數百人, 縋城而下. 帝聞之, 自至城下, 召兵急擊, 我軍死者數十人, 餘軍退走.]

여러 장수가 급히 아촌골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 안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세적에게 말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어 성 안에서 나는 연기가 날로 작아지더니, 이제 닭과 돼지가 매우 시끄럽게 우니, 이것은 필시 군사들을 먹이고 밤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땅히 군사들을 엄하게 하여 대비해야 한다.”

이날 밤에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갔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성 밑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공격하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나머지 군사는 물러나 달아났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9월

 

613년에 수가 고려의 요동성(오열홀)을 공격할 때에 가져왔던 팔륜누차라던지 100만 개나 되는 포대자루를 쌓아올려 만든 어량식대도 같은 것도 모두 안시성의 높은 성벽, 산줄기를 절묘하게 이용해서 성을 쌓고 깎아지른 가파른 절벽과 주변의 강을 천연의 해자로 삼은 고려의 성(구루)를 넘기 위해서 별별 짓을 다한 결과였다. 비석(飛石) 즉 투석용 포차는 당군의 공성 무기 가운데서도 특히나 위력을 떨쳤던 무기다. 파괴력도 그렇고 심리적으로도 고려 군사들을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훈련을 받았어도 자기도 사람인데, 자기 머리통보다 큰 돌이 날아오는데 그걸 안 피하고 도망 안 갈 사람이 어디 있어. 맞으면 곧바로 즉사하던지 아니면 뼈가 아스라지고 코 내려앉으면 자기 손해, 목 부러져서 컥컥대다가 고통스럽게 죽으면 그게 개죽음이지.

 

하지만 이 포차도 안시성(안촌홀) 앞에서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안시성(안촌홀)은 산성이다. 유럽에서도 그랬지만 포차나 대포같은 중장비는 조금만 높은 산지로는 쉽게 운반하기 어렵고, 울퉁불퉁한 산성 성벽 앞에다 일렬로 집중배치할 방법도 없다.

 

[江夏王道宗, 督衆築土山於城東南隅, 浸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 以拒之. 士卒分番, 交戰日六七合, 衝車礮石, 壞其樓堞, 城中隨立木柵, 以塞其缺. 道宗傷足, 帝親爲之針.]

강하왕 도종이 무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고 성을 핍박하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혀서 이것을 막았다. 사졸들은 번(番)을 나누어 싸웠는데 하루에 예닐곱 차례 맞붙었다. 충차와 포석으로 그 누첩을 무너뜨리면, 성 안에서도 따라서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치자 황제가 친히 침을 놓아 주었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9월

 

기록이야 이렇듯 담담하지만, 얼마나 처절한 싸움이었을까.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3번 OST 'The battle'을 들으면서 이때의 싸움을 머릿속으로 한번 떠올려보시라. 북 치고 꽹과리와 징을 울리면서 괴성을 지르는 안시성의 고려 군사와 그 백성들. 태종에게 항복한 고려 장수 고연수의 말마따나, 군사와 백성 모두 합쳐 10만 명 남짓 되는 안시성의 주민들이, 그들의 집을 지키기 위해 사람마다 '자진해서' 나와서 싸우고 있다. 침략자 당군에 맞서.

 

당군은 안시성ㅡ산줄기를 따라 쌓은 이 흙성 하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성 동남쪽 모퉁이에 망루를 쌓듯 흙산을 쌓아올리는데, 안시성의 군민들은 가만있지 않고 성을 더 높이 쌓으면서 저항하고, 그렇게 하루에도 여섯번 내지는 일곱번 맞붙으면서 당군이 요동성을 무너뜨렸을 때처럼 충차로 성문을 때리고 포차로 돌을 날려서, 그들이 흙으로 쌓아놓은 안시성의 성벽을 부서뜨리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무를 가져다 그 무너진 부분에 목책을 세워서 방어하고ㅡ

 

[築山晝夜不息, 凡六旬, 用功五十萬. 山頂去城數丈, 下臨城中. 道宗使果毅傅伏愛, 將兵屯山頂以備敵, 山頹壓城, 城崩. 會, 伏愛私離所部, 我軍數百人, 從城缺出戰, 遂奪據土山, 塹而守之. 帝怒斬伏愛以徇, 命諸將攻之, 三日不能克. 道宗徒跣詣旗下, 請罪, 帝曰 "汝罪當死. 但朕以漢武殺王恢, 不如秦穆用孟明, 且有破盖牟 · 遼東之功, 故特赦汝耳."]
밤낮으로 쉬지 않고 산을 쌓아, 60일 동안 인력을 들인 것이 50만 명이었다. 산꼭대기는 성에서 몇 길이나 떨어졌으므로 밑으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둔을 치고서 적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성을 눌러 성이 무너졌다. 마침 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떠나 있었는데,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흙산을 빼앗아 해자를 파고 지켰다. 황제는 노하여 복애를 목베어 조리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사흘이 지나도 이기지 못했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아가 죄를 청하니, 황제가 말했다.

“네 죄는 죽어 마땅하다. 짐은 다만 한 무제가 왕회(王恢)를 죽인 것이 진(秦) 목공(穆公)이 맹명(孟明)을 쓴 것만 못하다 여기며, 또 개모와 요동을 깨뜨린 공이 있어 특별히 널 용서하는 것 뿐이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9월

 

그것은 실로 극적인 반전이었다. 발까지 다쳐가며 60일 걸려 50만 명 동원해서 기껏 토산 쌓아놨더니 무슨 부실공사를 했는지 또 무너졌다네. 그 바람에 안시성 성벽 일부가 무너지기는 했는데, 하필 그때 당군이 거기 없었다. 안시성으로 들어갈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오히려 당군이 없는 틈에 곧바로 고려군이 성 안에서 우르르 몰려와 토산으로 올라가서 대번에 그걸 점령하고 차지해버렸다고. '죽 쒀서 개 줬다'는 건 아마 이걸 말하는 거겠지.



<토산을 수복하는 안시성의 고려군. 전쟁기념관 소장 민족기록화>

 

그런데 정말 한 명도 없었던 거야? 그렇게 애써서 쌓아놓고 지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니 좀 이상하잖아. 당군 진영과 떨어졌으면 얼마나 떨어졌다고. 60일 공 들인 탑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데도 아무 것도 안 하고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니. 나같은 미친 놈도 그런 짓은 안 하겠다. 차라리 안 뺏기려고 발악이라도 해보고 말지. 게다가 그걸 지키게 했다는 과의(果毅)라는 직책도, 군사 1천 명을 거느리는 절충도위의 부하로 많아봐야 5백 명 남짓의 군사만을 지휘하는 입장인데, 안시성을 함락시킬 중요한 '비장의 무기'를 5백 명에게만 지키게 했다는 거, 안일해도 너무 안일하지 않아? 그런데도 과의에게만 책임을 묻고 정작 그에게 토산을 지키게 명령한 강하왕 이도종한테는 죄를 묻지 않는다니?

 

지금 영성자산성 동남쪽에 있는 점장대가 이때 당군이 쌓았던 토산이라고 사람들이 말을 한다는데, 여기서 의문점은 왜 당군은 지세가 낮고 상대적으로 편한 서문을 공격하지 않고 지세가 높은 동문을 공격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건 산성을 공격하는 것이나 똑같은 것인데, 고려 지원군이 성의 서문 쪽에 있어서? 하긴 병법에 '적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을 치라'는 말이 있긴 하니까.

 

[帝以遼左早寒, 草枯水凍, 士馬難久留, 且糧食將盡, 勑班師. 先拔遼·盖二州戶口, 度遼,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城中皆屛跡不出, 城主登城拜辭. 帝嘉其固守, 賜縑百疋, 以勵事君. 命世勣·道宗, 將步騎四萬爲殿.]

황제는 요동이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떨어져가므로(?) 군사를 돌릴 것을 명하였다. 먼저 요주 · 개주 2주의 호구를 뽑아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아촌골[安市城] 밑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이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황제는 그가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기고 비단[縑] 100필을 주면서 임금 섬기는 것을 격려했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기 4만을 거느리고 후군(後軍)이 되게 했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9월

 

웃긴다. 도망가는 주제에 무슨 허장성세 부리고 앉았니 그래. 이런 걸 보고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삼국사》에는 여기에 더해, "황제가 활집[弓服]을 개소문에게 주었는데 받고 사례하지도 않고,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졌다[帝將還, 帝以弓服賜蓋蘇文, 受之不謝, 而又益驕恣]."고 연개소문의 태도를 적었다. 중국 기록에서 '교만하고 방자해졌다'는 말은, 중국 정부의 뜻대로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고 스스로 중국과도 맞설만한 대등한 힘을 자랑하는 나라에 대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 읽으면서는 정말 허망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을 지울 수가 없다. 60일을 걸려 싸웠으면서, 어쩌면 이길수도 있었을 다른 좋은 방법을 놔두고, 분해서라도 더 싸우지 않고 왜 갑작스럽게 퇴각을 결정한 것일까. 정말 기록에 나온대로,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양식이 다 떨어져가서'일까? 요동성과 개모성에서 얻은 60만 석의 군량은? 정말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것 말고 또 있을텐데.

 

기왕부참군(紀王府參軍) 교보명(喬寶明)이 행재소(行在所)로 나오자, 태종이 이르기를,
“안시성을 함락시키지도 못했고, 평양성은 아직 멀리 있다. 짐은 삼군(三軍)이 얼어죽을까봐 이미 회군하라고 명을 내렸다. 지금 경이 멀리까지 나왔는데, 무슨 계책을 진달하려고 왔는가?”

하니, 교보명이 아뢰기를,
“신은 명을 받들고 평양성으로 가서 고려를 회유하고자 합니다. 고려는 폐하께서 출정하신 뒤로 간담이 서늘해져 있을 것이니, 신이 가서 달래면 반드시 두 손을 묶고 스스로 올 것입니다. 만약 고려가 불손한 마음을 품는다면 신은 흉노의 임금을 죽인 부개자(傅介子)처럼 개소문의 머리를 벤 다음 고려에 항복하겠습니다.”

하니, 태종이 그 말을 장하게 여겼다.

《책부원귀》 장선편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 태종에게 연개소문의 목을 베어오겠다며 자원한 사람이 있었다. 교보명이라고 기왕부참군 자격으로 참전했던 자인데, 전쟁에서 패한 것을 분하게 여겨서, 장안으로 돌아온 뒤 당 태종의 측근이었던 방현령에게 고려를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진언했고, 방현령은 소개장을 써서 당 태종에게 그를 보냈다.

 

자신이 직접 자객으로 평양에 가서 연개소문을 죽이겠다고까지 했지만, 태종은 '내가 찾던 것은 바로 너같은 인물이다.'라고 칭찬만 하고 실제 고려로 보내지는 않았다. 연개소문의 암살계획 같은 것은 어차피 성공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는 계획이었으니까. 만약 성공했다면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글쎄....

 

을유(20일)에 요동성에 주둔했다. 이때 요동성에는 아직도 군량이 10만 석이나 있었지만 군사들은 그것을 전부 가져올 수 없었다.

《책부원귀》

 

9월 18일에 퇴각, 20일에 요동성(오열홀) 도착, 그리고 21일에 요하 도강. 거의 '쫓기다시피' 당군은 퇴각하고 있다. 요동성에 있는 10만 석의 군량을 모두 챙기지 못할 정도로 다급한 퇴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잖아. 분명히 위에서는 양식이 다 떨어져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개모성에서 10만 석, 요동성에서 50만 석, 백암성에서 28,000석, 도합 62만 8천 석. 과연 이게 10만 당군이 모두 먹기에는 부족한 양이었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서 이것을 계산해본 결과가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성덕왕 때에 든 흉년으로 707년 1월 1일부터 7월 30일까지 한 사람당 하루 석 되[升]씩 곡식을 나눠줬는데 다 끝나고 계산해보니 전부 30만 500석이 들었더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가지고 한 사람이 먹는 양을 계산해볼 때 한 사람당 하루 석 되씩 먹는다고 치고 1섬이 100되니까 62만 8000섬은 대략 70일 가량을 먹을 수 있고, 요동성(오열홀)에 남은 10만 석으로는 아직도 열흘 하고도 하루나 더 먹을 수 있는 양이다.(말한테도 쌀밥을 먹였을 리는 없잖아) 요동성(오열홀) 함락인 5월 17일을 기점으로 당군이 퇴각하는 9월 20일까지는 약 120일 정도. 그 120일 동안을 당군은 군량의 절반을 고려에서 빼앗은 것으로 먹고 나머지는 정상적으로 후방에서 보급받아서 먹었다는 말이 되는데, 지금 당군에게 군량이 다 떨어졌고 남은 군량이 요동성(오열홀)의 10만 섬 뿐이라면, 그렇다면 후방으로부터 지원되던 군량이 다 떨어졌다는 말이 된다.

 

해상을 통한 당군의 군량보급을 담당했던 평양도행군은 건안성에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비사성으로 쫓겨가고, 그나마 육로로 운송되던 군량보급에 의지해서 작전을 펼치던 당군은 고려군의 반격으로 육상ㅡ영주에서 통정진을 거쳐 요하를 건너 보급되는 군량보급로까지 차단당해 식량부족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진군해오는 수십리 길에 하나씩 봉수대를 만들고, 혹시나 군량보급이 끊어질까봐 그나마 쉬운 건안성을 놔두고 안시성을 먼저 칠 정도로 후방과의 연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당군이지만, 끝까지 버티고 있던 성 가운데 신성과 건안성이 군사를 일으켜 당군의 육상 군량보급로를 끊어버리고 퇴각할 길마저 막아버린다.

 

설상가상, 수시로 후방을 기습해오는 고려군에 대비해 세워둔 척후병들은 처음에는 첩자 고죽리를 사로잡을 정도로 효과를 발휘했지만, 단지 뒤쪽만 안전하게 지켜졌을 뿐 정작 앞으로는 더 나아가지도 못했다. 군량기지인 요동성(오열홀)과 안시성(안촌홀), 그리고 주필산의 협소한 공간 사이에 당군은 발목이 묶여 있었고,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던 안시성에 모든 전력을 쏟아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구 말처럼 '모든 것을 다 받아먹어버리는 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당군의 공격을 다 받아 먹어버리는 저 괴물같은 안시성을 말이다.

 

여기서 고려군의 '모루와 망치' 작전이 효과를 드러낸다. 안시성이 당군의 발목을 묶는 '모루' 역할을 하는 동안, 고려군은 주위에서 '망치'로 때리듯 당에 함락된 여러 성을 하나하나 탈환하면서 당의 후방, 특히 군량보급로를 압박해 나갔다. 이 고려군이 다 신성이나 건안성의 군사였을 리는 없고, 주필산에서 당군을 겹겹이 에워쌌을 고정의의 군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안시성 싸움도 어찌보면 모두 주필산 싸움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셈.

 

[至遼東度遼水, 遼澤泥潦, 車馬不通. 命無忌, 將萬人, 翦草塡道, 水深處, 以車爲梁. 帝自繫薪於馬鞘, 以助役.]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었다. 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는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9월 21일 병술(양력 10월 15일)

 

어이구, 올때는 죽으러가는 심정으로 건넜던 다리 부수더니, 이제 다시 퇴각하려고 다리를 놓네그려. 그런데 어쩌나. 건너오실 때에 저놈의 황제께서 강 건널 장비라는 장비는 모조리 작살을 내서 없애셨으니. 그 하나라도 남겨놓지 그걸 다 태우셨어? 무슨 항우도 아니구. 이때 당태종이 퇴각할 다리를 만들면서 이 일대의 나무를 모조리 베어서, 그 뒤 수십년 동안은 이곳이 나무가 하나도 없는 민둥산이었다나?(이이화 교수의 <한국사 이야기> 제3권의 내용을 빌리자면) 덕분에 나중에 또 고려를 치려고 군선을 만들 때에는 저멀리 쓰촨 지방 나무를 가져다 써야 했다던가. 지금도 여기는 당 태종의 말이 빠졌었다는 '당태종함마처(唐太宗陷馬處)'가 남아있다고 한다.

 

당 태종의 말이 어디서 빠졌고 그건 아무 관심없는데, 괴이한 것은 당 태종의 퇴각로다.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 보니까, 당군이 요택을 제외하고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단다. 하나는 요하 하구에서 배를 타고 돌아가는 것, 그리고 요동도행군이 왔던 요하 중류를 건너서 통정진을 지나 퇴각하는 길.

 

요하 하구에는 건안성이 있다. 군사가 약하던 건안성에 불현듯 신성의 이름이 더해져 두 성의 10만 연합군이 '갑자기' 나타나 당군을 위협하고 있는데, 앞서 안시성을 치기 전에 건안성에서 깨져서(그때 장량이 밥 먹다가 너무 놀라서 놀란 기색도 못 냈었지) 비사성으로 도망갔던 당군이 건안성 바로 코앞에서 배를 탔을 리는 없고, 다른 길은 요동성(오열홀)에서 조금 북쪽인 신성(구차홀) 앞으로 해서 가는 길이라 그래도 전쟁에서 당군이 유리할 경우라고 봐야 되는데, 이틀...

아무리 늦어도 사흘이면 갈 수 있는 길을 당군은 택하지 않았다. 

 

이미 고려의 성들을 여럿 함락시켰다고 했으면서, 바다로 가려 했다면 일찌기 장량이 함락시킨 비사성을 통해서 가도 될 것이고, 그밖에 개모성과 요동성, 제스스로 항복한 백암성의 다른 길을 거쳐도 될텐데, 굳이 그런 편한 길을 택하지 않고 구태여 진흙길을 택한 것은 무척이나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다. 더욱이 저렇게까지 사서고생(?)을 해가면서 말이다.

 

[冬十月, 帝至蒲溝駐馬, 督塡道. 諸軍度渤錯水, 暴風雪, 士卒沾濕多死者. 勑燃火於道以待之.]

겨울 10월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을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여러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들이 습기에 젖어 죽는 자가 많았다. 길가에 불을 피우고 맞이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10월 1일 병신(양력 10월 15일)

 

요택을 건너올 때에는 이레, 다시 건너갈 때에는 열흘 이상, 완전히 탈출하는 데는 스무 날 이상 걸렸던 이 요택의 길은, 지금 요양 앞에서부터 영주 사이, 금주시와 의현 사이의 대릉하를 넘어서면 나오는 거친 땅에 있다. 이곳은 요하 유역과는 토양과 기후가 이질적이다. 펀펀한 널빤지같은 넓은 대륙의 땅, 대릉하를 건너 챠오양까지는 말 한 마리로 사흘 거리. 요양에서 요하 사이의 태자하 강와 혼하 강은 건너는 데 그리 어렵진 않지만, 태안현 지역의 수많은 작은 강들을 지나 반금시 일대에 이르면 주위에 산이라곤 하나도 없고, 땅은 물이 절반이라 지나면서 보이는 건 전부 갯벌들뿐, 곳곳에 물이 고여 나오는 작은 연못이 있다.

 

당 태종은 여길 건널 때 장비까지 준비해올 정도로 사전에 요택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가 요택을 건넜던 5월 초는 아직 장마철이 되기도 전인데 여기를 건너는 데에 특수장비가 필요했다면 이곳은 분명 상습 늪지대나 무척 광활한 갯벌 지대였을 것이고, 요동성(오열홀)으로 가기 위해서 꼭 거쳐야 되는 길이었다.(안시성은 요동성보다 남쪽에 있었던 것 하나는 확실하다)

지금이야 제방공사를 해놔서 하류가 옥토로 변했다지만 옛날에는 사람이 살 수가 없는 땅이었다.(진흙이 200리라는데 그게 인간이 머무를 땅인가.) 《손자병법》이 말한, 무너지고 황폐한 '비지'의 땅,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가지 말고 혹여 지나가더라도 되도록 빨리 지나가라고 손자가 경고한 땅이 이런 질척질척한 요택과 같은 땅이다. 유목민들이야 잠깐 있다 가면 되지만 정주민들은 여기 도저히 못 산다. 농사를 못 지으니까. 이런 '개도 안 줄' 땅으로 들어가는 당 태종의 꼴은 그야말로 개구멍으로 도망치는 도둑놈 같았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凡拔玄菟 · 橫山 · 盖牟 · 磨米 · 遼東 · 白巖 · 卑沙 · 夾谷 · 銀山 · 後黃十城, 徙遼 · 盖 · 巖三州戶口入中國者七萬人.]

무릇 현도 · 횡산(橫山) · 개모 · 마미(磨米) · 요동 · 백암 · 비사 · 협곡(夾谷) · 은산(銀山) · 후황(後黃)의 10성을 함락시키고, 요주 · 개주 · 암주 3주의 호구를 옮겨 중국으로 들어간 자가 7만이었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은산이라는 곳에 대해 《한원》에서는 《제서(齊書)》 동이전(東夷傳)을 인용해 "은산은 나라 서북쪽에 있으니 고려는 여기서 은을 캐어 화(貨)를 삼는다[銀山在國西北,高驪採以爲貨]"고 했고, 《고려기》에서도 "은산은 안시의 동북쪽 1백여 리에 있는데 수백 가(家)가 있어 은을 캐어 국용(國用)으로 공급한다[銀山在安市東北百餘里, 有數百家, 採之以供國用也]."고 적었다. 이곳은 일종의 특수부곡이었던 것 같다. 조정에 공급하는 은을 캐기 위한 특수한 곳. 은산성과 안시성은 서로 백여 리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이곳은 당군이 퇴각한 뒤 곧바로 탈환되었는데, 이곳에서 나는 은은 고려의 중요한 세원이기도 했다.

 

단재 선생께서는 당군이 안시성에 발이 묶여있는 동안,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베이징 북쪽의 상곡 지방을 공격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요동에서 고전하는 동안 중국 대륙을 기습공격했다는 말이다. 지금도 중국 양쯔 강 북쪽 간쑤성 염성의 몽롱탑에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기다 우물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는 전설이 있고, 고려군에게 죽은 당군의 머리가 산처럼 쌓여있었다는 민간전설도 남아있다니 결단코 거짓이라고 흘려버릴 이야기는 아니다.

 

신성(新城)ㆍ주필(駐蹕)ㆍ건안(建安) 세 곳의 큰 싸움에서 전후로 참수한 것이 4만여 급이었고, 대장 두 명, 비장(裨將)ㆍ관인(官人)ㆍ추수(酋帥)ㆍ자제(子弟) 3천 5백 명, 군사 10만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말과 소가 각 5만 마리, 관곡(館穀) 10순(旬)을 노획하였다. 처음에 출정할 때에는 군사 10만 명에 말이 1만 필이었는데, 돌아옴에 미쳐서는 군사가 겨우 수천 명이었고 전마도 십중팔구는 죽었다. 수군은 7만 명 가운데 수백 명이 죽었다.

《책부원귀》

 

고려에게 이겼다고 어떻게든 자랑하고 싶어서 앞에 써놨던 것을 재탕해서 다시 써놨지만, 10만 명의 사람과 1만 필의 말 중에 겨우 수천 명의 군사, 그리고 열에 여덟아홉은 죽은 말들. 고려의 피해도 적지는 않았겠지만 얻은 것 하나 없는 당은 고려보다 더 끔찍한 패배가 아니었을까. 《자치통감》 고이편에서는

‘요주ㆍ개주ㆍ암주 등 세 주(州)의 호구로서 내지로 들어온 것이 전후로 7만 명이었다.’

‘10만 호에 18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라고 한 기록이 상치하는 것에 대해, 후자는 대개 중국으로 옮기지 않은 전자의 경우까지 아울러 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근거야 있겠지만 우리쪽에서 보기엔 어디까지 중국인들의 변명일 뿐이다.(사람이 천 명 죽었는데 말은 열에 아홉이 죽었대. 무슨 싸움이 말만 죽도록 싸웠냐?)

 

어쩌면 《책부원귀》가 기록한 당군 사상자의 숫자 중에는, 요택으로 낑낑대며 퇴각하는 당군을 급습한 고려군에게 살해당한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설마, 당 태종이 가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 리도 없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당군을 궤멸시키기에 이보다 더 절호의 기회가 또 없을 텐데 그걸 그대로 흘려보낼 정도로 고려군이 바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말과 소는 진흙탕에 빠지고 수레는 부수어 강을 건널 다리로 삼으며, 음력 10월 초의 차가운 바람과 눈에 동상에 걸려 죽는 군사들이 죽어나갔고, 그나마 살아남은 군사들도 대부분 고려군의 후방 기습으로 거의 개작살이 난 1차 고당전쟁은, 당의 철저한 패배로 끝이 났다.

 

[新城 · 建安 · 駐蹕三大戰, 我軍及唐兵馬死亡者, 甚衆. 帝以不能成功, 深悔之, 嘆曰 "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

신성(新城) · 건안(建安) · 주필(駐蹕)의 세 대전에서 우리 군사와 당의 병마가 죽은 것이 매우 많았다. 황제는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여 탄식하였다.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위징이라는 사람은 당 태종의 최측근이자 재상으로서, 흔히 말하는 당 태종의 치세ㅡ후대 여러 왕들이 태평성대라 일컬어 마지않던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끈 핵심인물이었다. 또한 태종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기에, 아마 그였다면 무모하게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치는 것을 앞장서서 만류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징은 고려 원정 2년 전에 죽었는데, 고려 원정을 직접 주도한 당사자가 그렇게 말했을 정도면, 이건 누가 봐도 '이건 정말 아무 소득도 없는 싸움이었어'하고 자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지.

 

다만 후대에 가면 태종이 고려 원정을 했고 그것이 무모한 짓이었다는 것보다도, 태종이 자신의 무모한 짓을 나중에나마 '후회'했다는 사실이 더 부각된다. 중국의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조선조에 정조가 신하들하고 《강목》의 내용을 가지고 경연을 하다가이 대목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때에도 고려 원정 자체가 잘못되었느냐를 두고 얘기하기보다는 태종 개인의 결함에 대해서만 문제를 축약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이 더 강하다.

 

태종이 고구려에서 철수한 후 정벌을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깊이 후회하여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러한 정벌이 있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동쪽으로 정벌을 떠날 때에 이를 말리려고 간언한 신하들은 많이 있었다. 저수량이 간쟁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이대량이 표를 올렸으나 듣지 않았고, 서혜비(徐惠妃)가 상소를 올렸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니 위징이 살아 있었던들 그의 말을 들어줄 리가 있었겠나? 간언을 따르는 것은 본인 의지에 달렸지 누가 간언하느냐에 달린 게 아니다. 위징이 간언해도 태종이 안 들어주면 어쩌겠는가? 위징이 태종의 마음과 부합됨이 어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겠으며, 단지 입으로 간쟁하는 것 말고 달리 태종의 마음을 돌이켜 말릴 방법이 있었겠는가?

 

《홍재전서》에 나오는 정조의 의론에 대답한 것은 생원 이유하(李游夏)였다.


태종의 요동 정벌은 설령 위징이 살아 있었다 한들 못 말렸을 겁니다. 게다가 요동을 정벌해서 성공했다면, 태종이 위징을 뭐 생각이나겠습니까? 설연타를 끝까지 추격하지 않은 일에 대해, 당시 추격을 말렸던 위징의 말을 따른 걸 후회한 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허나진(秦) 목공(穆公)이 건숙(蹇叔)의 말을 따르지 않은 일을 후회하고 한 고조가 유경(劉敬)의 말을 따르지 않은 일을 후회했듯, 잘못에 대해 후회할 줄 아는 것은 군주로서의 훌륭한 행동입니다. 태종의 이 말은 잘못하고도 후회하지 않는 것보다야 그나마 낫습니다.

 

진짜 승자는 많이 죽인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많이 주도한다. 죽은 사람에 대한 재해석도 결국은 살아있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런 재해석 속에서 사람은 몇 번이고 거듭 영웅으로 혹은 악인으로 기억된다. 연개소문과 당 태종은 서로의 재주나 능력뿐 아니라 무모한 성격까지도 수준이 똑같았지만, 연개소문의 사후 고려는 멸망했고 당 태종 사후에 당조는 3백년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정관정요》로 대표되는 태종의 통치철학과당조의 통치체제, 율령격식을 포함한 문물제도는 동아시아 문명의 흐름을 주도한 뼈대가 되었다. 당 태종은 그 속에서 비록 사소한 결함은 있었지만 신하의 말을 경청할 줄 알았던 현명하고 위대한 군주로서, 연개소문은 무예와 병법에만 뛰어났지 자기가 섬기던 왕을 죽이고 전횡하며 나라를 망친 역적으로서 후대 사람들의 머릿속 이미지가 구축되었다.

 

[論曰: 唐太宗, 聖明不世出之君. 除亂比於湯武, 致理幾於成康. 至於用兵之際, 出奇無窮, 所向無敵, 而東征之功, 敗於安市, 則其城主, 可謂豪傑非常者矣. 而史失其姓名, 與楊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

논하노니, 당 태종은 뛰어나고 총명하여 세상에 드문 임금이다. 난을 다스린 것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견줄 만하고, 다스림을 이룬 것은 성왕(成王) · 강왕(康王)과 비슷했다. 군사를 쓰는 데 이르러서는 기이한 책략을 내는 것에 끝이 없고, 향하는 곳에 적수가 없었는데,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 안시성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호걸이요 비상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 그 성명을 전하지 않으니, 양자(楊子)가 말한 바 『제(齊)와 노(魯)의 대신이 역사에 그 이름을 전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다름없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바, 이때 안시성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안시성주의 이름은 양만춘이라 했다. 조선조 성호 이익 선생은 《성호사설》 부록 고이편 안시성주(安市城主) 조에서 《여동서록(餘冬序錄)》이라는 책을 인용해서 그렇게 말했고, 안정복 영감은 당 태종의 동정기(東征記)라는 것을 참조해서 그렇게 말한 것인데, 정작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안시성의 성주가 양만춘이라는 것은《당서연의(唐書演義)》에서 나온 말이고, 그럴듯한 일 꾸며내기 좋아하는 호사자(好事者)가 그런 이름을 지어낸 것이라며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했다. 《여동서록》이라는 책 자체가 중국에서도 명 때에 저술된 책이니 뭐, 시대가 좀 떨어지기는 한다. 이밖에 뭐 추정국(鄒定國)이라는 이름도 거론되기에, 여기 적어놓는다.

 

[五年, 春二月, 太宗還京師, 謂李靖曰 "吾以天下之衆, 困於小夷, 何也?" 靖曰 "此, 道宗所解." 帝顧問. 道宗具陳, 在駐蹕時, 乘虛取平壤之言. 帝悵然曰 "當時悤悤, 吾不憶也."]

5년(646) 봄 2월에 태종이 수도로 돌아가 이정(李靖)에게 일러 물었다.

“내가 천하의 많은 무리를 가지고도 어째서 작은 오랑캐에게 곤란을 당한 것이냐?”

“그것은 도종(道宗)이 알 것입니다.”

황제가 돌아보며 물었다. 도종은 주필산에 있을 때, 빈틈을 노려 평양을 빼앗자고 했던 말을 소상히 아뢰었다. 황제가 원망하여 말했다.

“그때 일은 너무 바빠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그땐 너무 바빠서 기억이 안 난다."

그렇게 성군이라 칭송받는 당태종의 이미지에 맞지 않게, 변명하는 꼬락서니라니. 아무래도 당 태종을 성군이라고 한 것은 취소해야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아 참, 그리고 한 가지 더.

 

[戊戌, 罷遼州都督府及巖州.]

무술에 요주도독부(遼州都督府)와 암주(巖州)를 혁파하였다.

《자치통감》 권제198, 당기(唐紀)제14,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 하지상(下之上) 정관 20년 병오(646) 2월

 

요주도독부, 암주도독부 이게 뭐냐면 그, 고려에서 빼앗은 여러 성을 묶어서 당이 설치한 도독부였는데, 말이 좋아 혁파지 실은 계획만 세워놓고 정말 두는가 싶더니 제대로 통치도 못해보고 결국 고려에게 다시 뺏긴 것. 그걸 그냥 당쪽에서는 '우리가 혁파했다'라고 일부러 숨겨서 써놓은 것이다.

 

[夏五月, 王及莫離支蓋金, 遣使謝罪, 幷獻二美女. 帝還之, 謂使者曰 "色者人所重, 然憫其去親戚以傷乃心, 我不取也." 東明王母塑像, 泣血三日.]

여름 5월에 왕과 막리지 개금(蓋金)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미녀 두 명을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보내며 사신에게 말하였다.

“여색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나, 그들이 친척을 떠나 마음 상할 것이 딱해서 나는 취하지 않는다.”

동명왕모의 소상(塑像)이 사흘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5년(646)

 

하긴 열받는데 지금 누구 약올리나 싶긴 하겠다. 당 태종 입장에서는. 하지만 활집을 줬는데 보답도 안하고 건방지게 논다고 식식거릴 때는 언제고 미녀를 둘 씩이나 보내주는데 우리보고 어쩌라는 건지 참. 연개소문 입장에서도 "아XX 나보고 어쩌라고 개XX야"하고. 이 해에 고려에서는 천리장성이 완공되었다. 부여신 동명왕모의 소상이 피눈물을 흘려 사흘 동안 멈추지 않았고....

 

[雖遣使奉表, 其言率皆詭誕. 又待唐使者倨傲, 常窺伺邊隙. 屢勑令不攻新羅, 而侵凌不止. 太宗詔勿受其朝貢, 更議討之.]

비록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렸지만 그 말은 모두 괴이하고 황당하였다. 또 당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에도 거만하였고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았다. 누차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해도 침략하고 업신여기기를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그 조공을 받지 말라고 명령하고 다시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5년(646)

 

이 해 8월에 당 태종은 철륵의 11개 부족 추장들이 보내온 사신들의 공물을 받으며 그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만리장성 이북과 이남을 모두 지배하게 된 당의 위용을 과시하는 자리. 고려 원정에서 깎일 대로 깎인 자존심을 태종은 설연타를 붕괴시켜서 나름 회복할 수는 있었지만, 고려에게는 '전쟁에서 진 놈이 무슨 쇼를 하고 있나'하고 참, 같잖게 보였을게다. 뭐, 승전국의 여유라고나 할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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