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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2>제28대(마지막) 보장왕(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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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고서, 소위 '돈황문서' 중에 《토원책부(兎園冊府)》라는 것이 있다. 이게 뭐냐면 당 태종의 제7황자인 장왕(蔣王) 이운의 지시를 받아, 두사선(杜嗣先)이란 학자가 650년대에 만든 책으로서, 당시 과거시험에 출제될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을 자문자답식으로 서술한, 일종의 '예상논술답안'이다.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해서 동예의 제천행사인 무천이 고조선의 것이었다고 말해놓은 것도 있고 한데, ‘정동이(征東夷)’라 해서 동쪽 오랑캐 즉 고려를 정벌할 방법을 묻는 문제도 있다.“고려의 잔당이 남아 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중화의 옛 땅을 찾으려는데 이를 위한 방책을 논하시오.”라고 말이다.

 


<토원책부(兎園冊府)>

 

그러니까 아무 명분도 없어보이고, 신하들도 소매 걷고 나서서 말리려는 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고려 원정의 당위성이 무엇인지, 화전(和戰) 양면의 전술과 모범답안이 무엇인지, 문제를 적고 답안을 노골적으로 적어놨단다. 고려 정복을 통해 천하를 통일하겠다나 어쩐다나, 그 거창해보이는 사업(?)의 당위성을 위해서,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정벌 여론조성을 위해서 과거시험문제 중에는‘유격전, 전쟁터의 지형, 기상, 심리전 등을 논하라’는 따위의 것도 있다. 뭐 그래, 다 좋아. 괜찮아.

 

참 이런 것까지 만들어가면서 그렇게 고려를 칠 방법 응모에 골몰한 것을 보면, 왜 그렇게 고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됐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뭐 동북공정 이야기 불거져 나왔을때 수능 논술문제에 동북공정에 대응할 논리를 말해 보라는 식의 문제가 대학교 수시며 정시 논술문제에 이리저리 속출하고, 한미 FTA 때에는 또 우리 농촌을 살릴 방법을 찾고 그런 거랑 비슷한 얘기겠지만. 대충 뭐 그런 이야기였다.

 

[九年, 夏六月, 盤龍寺普德和尙, 以國家奉道不信佛法, 南移完山孤大山.]

9년(650) 여름 6월에 반룡사(盤龍寺)의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나라에서 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믿지 않으므로, 남쪽으로 옮겨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갔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이른바 보장봉노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ㅡ. 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니, 보덕이 암자를 옮긴 이야기. 《삼국사》에서야 그저 보덕화상이 남쪽 고대산으로 옮겨갔다고 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아예 판타지 소설을 쓸 작정을 하신 것인지 절을 통째로 하늘로 날려서 옮겨갔다고 기록했다. 그때 옮겨간 것이 바로 비래방장(飛來方丈). 지금 전주 고덕산 기슭에 황량하게 버려진 절터ㅡ경복사터가 바로 그곳이다.

 

[及寶藏王卽位<貞觀十六年壬寅也>, 亦欲倂興三敎. 時寵相蓋蘇文, 說王 "以儒釋竝熾, 而皇冠未盛. 特使於唐求道敎." 時普德和尙住盤龍寺, 憫左道匹正, 國祚危矣. 屢諫不聽, 乃以神力飛方丈, 南移于完山州<今全州也.>孤大山而居焉. 卽永徽元年庚戌六月也<又本傳云, "乾封二年丁卯三月三日也.". 未幾國滅<以摠章元年戊辰國滅, 則計距庚戍十九年矣.>. 今景福寺有飛來方丈是也云云<己上國史>. 眞樂公留詩在堂, 文烈公著傳行世.]

보장왕이 즉위하기에 이르러<정관 16년 임인(642)이다.>, 역시 세 교를 아울러 진흥시키려 했다. 이때 총애받던 재상[寵相] 개소문이 왕에게 아뢰었다.

"유교와 불교는 흥하지만 도교는 성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당에서 도교를 구하소서."

이때 보덕화상은 반룡사에 있었는데, 그릇된 가르침[左道]이 바른 가르침[正]과 맞서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하였다.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屢諫] 듣지 않자 신력(神力)으로 절[方丈]을 날려서 남쪽의 완산주<지금의 전주이다.> 고대산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즉 영휘 원년 경술(650) 6월이었다.<또한 본전(本傳)에 이르기를 『건봉 2년 정묘(667) 3월 3일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못 가서[未幾] 나라는 망하였다.<총장 원년 무진(668)에 나라가 망하였다. 즉 계산하자면 경술로부터 19년만이다.> 지금 경복사에 있는 비래방장이 바로 그것이라 한다.<이상 국사(國史)에서 나왔다.> 진락공이 당에 머무르며 시를 남겼고, 문열공이 전을 지어 세상에 전한다.

《삼국유사》 권제3, 흥법4, 보장봉노 보덕이암

 

보장왕이 처음 연개소문의 주청을 받아들여 도교를 받아들였던 서기 643년, 보덕은 영류왕 때의 종교편향정책을 답습하고 있는 정부에 수차례 항의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도교 수용은 보장왕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의지가 더 강했으니까. 연개소문은 도교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불교와 연결된 세력들, 국내성파 귀척뿐 아니라 평양성파 내부의 반대 세력들까지도 자신에게 반발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기에 도교 수용은 거의 연개소문이 주도해서 불도저처럼 밀어붙였을 게다.

 

[道士等行鎭國內有名山川. 古平壤城勢新月城也. 道士等呪勑南河龍, 加築爲滿月城. 因名龍堰城. 作讖曰龍堰堵, 且云千年寶藏堵. 或鑿破靈石<俗云都帝嵓, 亦云朝天石. 蓋昔聖帝騎此石朝上帝故也.>.]

도사들은 나라 안의 유명한 산천을 돌아다니며 진압하였다. 옛 평양성의 지세는 초승달[新月城] 모양의 성이었다. 도사들은 주문으로 남쪽 강의 용을 불러 성을 늘려 쌓아 보름달[滿月] 모양의 성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그 이름을 용언성(龍堰城)이라 했다. 《용언도(龍堰堵)》니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니 하는 비결서[讖]를 지었으며, 영석(靈石)<세속에서는 도제암(都帝嵓) 또는 조천석(朝天石)이라고 한다. 대체로 옛날 성제(聖帝)께서 이 바위 위에서 말을 타고 하늘에 올라 상제를 뵈었기 때문이다.>을 파서 깨뜨리기도 했다.

《삼국유사》 권제3, 흥법4, 보장봉노 보덕이암

 

《삼국유사》에 나온 대로만 보자면 연개소문이나 보장왕이 당으로부터 '모셔온' 도교 도사들은 고려 전역에서 숱한 말썽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 불교 승도들의 절을 빼앗아서 도교 도관으로 쓰라고 내주면서까지 고려의 종교편향은 노골적인 형태로 진행되었고, 도사들은 나라의 빽만 믿고 승승장구하면서, 고려 전국을 돌아다니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단순히 연개소문 정권이 자신의 지배력을 지방에까지 뻗치며 세력을 넓히려 했던 사실의 은유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로 보자면 이것은 문화 파괴였다. 풍수지리를 따라 초승달 모양의 성을 보름달로 바꾸고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영웅이 나오겠다 싶은 곳에는 쇠말뚝을 박고 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추모성왕이 기린마를 타고 하늘에 오를 때에 디뎠다는 인연이 있다면 종교적인 연원을 떠나서 국가적으로도 국조와 관련된 신성한 유적일텐데, 그 신령한 돌을 깨부숴버렸다는 것은 도사들이 고려의 왕권까지도 무시하고 있었다는 반증으로 봐야 될 것인가?

 

보덕은 이러한 고려 정부의 노골적인 종교편향에 대해서 적극 항의했지만 그래봤자 보덕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오히려 전보다 더한 압박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머무르고 있던 반룡산 연복사나, 대보산 영탑사도 고려 정부가 도교진흥책의 일환으로 강제로 빼앗아 도관으로 개조해버렸을 지도 모르지. 그게 보덕이 고려를 떠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고달산 경복사터(빨갛게 네모친 곳). 문화재청 제공.>

 

《동명왕편》을 지었던 이규보는 일찌기 완주를 여행한 적이 있고, 그 과정에서 경복사를 들렀던 적이 있는데, 이때의 일이 《남행월일기》라는 기행문 속에 남아 있다.

 

전주(全州)는 완산(完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옛 백제국이다. 인물이 번창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고국(故國)의 풍취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들은 질박하지 않고 아전들은 모두 점잖은 선비[士人]와 같으니, 행동거지의 신중함이 볼 만하였다. 가장 울창한 산은 중자산(中子山)인데, 그 고을에서는 제일 큰 진산(鎭山)이다. 이른바 완산(完山)이란 산은 나지막한 한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한 고을이 이로써 부르게 된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주 소재지에서 1천 보(步)쯤 떨어진 지점에 경복사(景福寺)가 있고 그 절에는 비래방장(飛來方丈)이 있다. 이것을 내가 예전부터 들었으나 일이 바빠 한 번 찾아보지 못하다가 하루는 휴가를 이용해 결국 가보았다. 비래방장이란 옛날 보덕 대사(大士)께서 반룡산(盤龍山)<함흥(咸興)에 있다>에서 날려 옮겨오신 당(堂)이다. 보덕의 자는 지법인데, 일찍이 고구려 반룡산의 연복사(延福寺)에 거처하였다. 하루는 문득 제자에게 말하였다.

“고구려가 도교(道敎)만을 존숭하고 불법(佛法)을 숭상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피난을 해야 하겠는데 어느 곳이 좋을까?”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였다.

“전주에 있는 고달산(高達山)이 바로 편안히 머무를 만한 땅입니다.”

건봉(乾封) 2년 정묘(667, 보장왕 26)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당(堂)이 이미 고달산으로 옮겨갔는데, 반룡산에서 1천여 리의 거리였다. 명덕이 말하였다.

“이 산이 기절(奇絶)하기는 한데 샘물이 없네요. 제가 스승님께서 옮겨오실 줄 알았으면 반드시 옛 산에 있는 샘물까지 옮겨왔을 텐데.”

최치원이 전(傳)을 지어 이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기에 여기서는 줄인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제23, 기(記) 中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고려를 떠나 보덕이 망명한 곳은 신라가 아닌 백제였다. 완산주 고대산. 지금의 전주 고덕산이다. 처음부터 여기를 목표로 삼고 '여기로 가자'라고 한 것은 아니었겠고 아마 보덕은 고려를 떠나기 전에 자신의 제자들을 모아서 어디로 갈지를 토론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보덕에게는 고명한 제자 열한 명이 있었고 그들 모두 각자 흩어져서 절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師有高弟十一人. 無上和尙與弟子金趣等, 創金洞寺, 寂滅, 義融二師創珍丘寺, 智藪創大乘寺, 一乘與心正, 大原等創大原寺. 水淨創維摩寺. 四大與契育等, 創中臺寺. 開原和尙創開原寺. 明德創燕口寺. 開心與普明亦有傳, 皆如本傳.]

대사에게는 고명한 제자[高弟] 열한 명이 있었다. 무상(無上) 화상과 그의 제자 금취(金趣) 등은 금동사(金洞寺)를 지었으며, 적멸(寂滅)과 의융(義融) 두 대사는 진구사(珍丘寺)를 지었고,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일승(一乘)과 심정(心正), 대원(大原) 등은 대원사(大原寺)를 지었고,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를 지었으며, 사대(四大)와 계육(契育) 등은 중대사(中臺寺)를 지었고, 개원(開原) 화상은 개원사(開原寺)를 지었으며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지었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 역시 전하는데 모두 본전(本傳)과 같다.

《삼국유사》 권제3, 흥법4, 보장봉노 보덕이암

 

열한 명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보덕의 제자가 되었다는 명덕이라는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 보덕이 완산의 고덕산을 자신의 터전으로 정했다고 최치원의 《보덕전》에는 적혀있었던 모양이지만, 명덕 한 사람의 의견만을 수렴해서 이곳을 새로운 땅으로 삼고 옮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완산, 지금의 전라북도 일대는 백제 안에서 왕도급 위상을 갖고 있었다. 백제 무왕이 이곳에 이르러 익산 땅에다 미륵사를 세우고 한때 천도할 계획까지 세웠던 곳이며(실제로 천도했었다는 주장도 있다) 무왕이 죽은 뒤에도 미륵사를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이 널리 퍼져 있던 곳이기도 했다. 게다가 백제 중앙정부와도 일정한 거리가 있으니 고유성을 지키며타락하지도 않고, 마음 잡고 수도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지.

 

백제로 건너온 뒤에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사정을 살피다가 최종적으로 보덕이 완산 지역에 정착하고 경복사에 머무르게 되는 것은 고려를 떠난 뒤에도 17년이나 뒤의 일인데, 사실 여기저기서 전쟁 치르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절을 짓는데 도와줄 사람 찾는 것도 일이었을 게다. 더구나 고려를 떠나 백제 땅으로 온지 10년만에 백제가 망해버렸으니까. 어수선한 와중에 다들 먹고 살기 바쁜데 누가 나서서 절을 짓겠다면서 재물을 시주하려 들까봐.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굴러든 망명승에게.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보덕의 가르침ㅡ고려계 열반종의 교의가 이 전라도 땅에 뿌리를 내린 그 자체만으로도 보덕이라는 승려의 인생역정이자 또 하나의 인간승리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그가 경복사에 머무른 뒤 그의 제자 열한 명도 각자 절을 짓고 자신들이 보덕으로부터 사사받은 가르침을 전수했다. 그들이 지은 절들은 대부분 전라도 경내에 있었는데, 이들을 통해서 고려 열반종의 가르침은 끊어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었다. 그것은 전라북도 땅에 고려 열반종의 가르침이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이었던 원효와 의상 역시 보덕으로부터 열반종을 배웠으며, 오늘날 남아있는 원효의 《열반경종요》에도 보덕의 가르침이 많이 녹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의 황자 출신으로 출가하여 송에 유학했던 대각국사 의천. 본국으로 돌아와 해동천태종을 열고 교선통합에 앞장섰다.>

 

보덕의 고려 망명과 경복사 창건, 그리고 원효와 의상에게 고려 열반종 전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가지는 의의는, 완산 고대산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고려 불교의 사상적 유풍지대를 형성했다는 것에 있다. 이후 전주 경복사는 고려 때까지도 열반종의 총본산으로 그 위상을 누렸고, 고려 멸망 뒤 이곳에 안승을 중심으로 한 고려 유민들의 나라 보덕국이 세워지는 데에,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고려 불교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영양왕 때의 태학박사 이문진이 여기 전라도의 익산에서 살았대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전라북도 일대, 보덕의 경복사가 있던 전주와 안승의 보덕국이 있던 익산 두 곳을 묶는 지역을 가리켜 '제2의 고려'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훗날, 고려 선종 8년(1091년)에 이곳을 방문했던 고려의 승려 우세승통 대각국사 의천은 직접 보덕의 영정을 찾아뵙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고려 열반종의 가르침을 설파한 보덕성사의 업적을 기렸다.

 

涅槃方等敎    열반의 평등한 가르침은

傳授自吾師    우리 스승께서 전수하신 것

兩聖橫經日    두 성인(원효와 의상)이 책 펼쳐 배우던 날

高僧獨步時    고승께선 홀로 앞서걷고 계셨지

從緣任南北    인연 따라 남북으로 다니셨을 뿐

在道絶迎隨    도를 맞이하고 따라줌에 연연치 않으셨네.

可惜飛房後    슬프게도 승방 날려온 뒤에는

東明故國危    동명왕의 고국이 위태로웠다네.
 

일연이라는 땡중은 이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한수 읊었더란다.

 

釋氏汪洋海不窮   불교[釋氏]는 넓고 끝없는 바다처럼

百川儒老盡朝宗   유교와 도교[儒老] 백 줄기 강물을 모두 받아들이네.

麗王可笑封沮洳   고려 왕은 가소롭게도 웅덩이를 막았지만

不省滄溟徒臥龍   와룡이 동해로 옮겨갈 줄은 몰랐겠지.

 

그리고 유학자 안정복 영감의 코멘트.

 

도(道)의 큰 근본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다. 도가 있으면 학(學)이 있고 학이 있으면 용(用)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유도(儒道)가 뛰어나게 백대의 종(宗)이 되어 성인(聖人)의 도가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 스승은 요순(堯舜)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요, 그 사업은 《육경(六經)》ㆍ《사서(四書)》이며, 격물치지(格物致知)ㆍ성심정의(誠心正義)는 그 공부가 안[內]에 보존된 것이요,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 그 행실이 밖에 나타난 것이다. 인ㆍ의ㆍ도ㆍ덕(仁義道德)은 그 체(體)의 근원이요, 예악형정(禮樂刑政)은 그 용(用)의 도구이다. 한 마음의 은미한 데에서 시작되어 하늘과 땅에 참예하고 화육(化育)을 돕는 데 이르며, 곤궁하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고, 현달하면 천하를 모두 선하게 하여 한 마음도 참되지 않은 것이 없고, 한 일도 사실이 아닌 것이 없다.

 

저 2씨(二氏: 불교ㆍ도교)는 적멸무위(寂滅無爲)의 학문을 일으켜 정도(正道)의 이단(異端)을 만들었는데, 후세 사람이 삼교(三敎)라 불러 천지간에 원래 이 세 가지가 있어 하나도 빼버릴 수 없는 것같이 여기니, 어찌 그 말이 이다지도 망령된 것이냐? 불씨(佛氏)가 윤리를 끊어 없애는 것과 도가(道家)가 무리를 떠나고 세속을 끊는 것은, 이미 살아있는 사람들의 떳떳한 도(道)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후세의 이 두 씨(氏)에 빠진 자들은 윤회죄복(輪回罪福)이니 경전과교(經傳科敎)니 하는데 지나지 못하니, 이는 그 말의 더욱 천루(淺陋)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높이 믿어 정치를 어지럽히고 나라를 망친 자가 전후 서로 잇달았는데도 깨닫지 못하니, 가련하다. 도교는 비록 이때 처음 행해졌지만 오래 못 가 없어졌는데, 불씨의 설은 지금까지도 오히려 그치지 않았으니, 그 또한 우리 나라 사람들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불교를 그렇게나 억압해가면서 도교를 진흥시켰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도교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증산도를 도교로 봐야 하나?) 불교 믿는 사람은 필자 포함해서 이 나라 사람들 열에 여섯일곱. 해마다 4월 초파일이면 공휴일이랍세 집에 들어가 배 깔고 TV나 보고 들어앉았으니.... 참 세상 일이라는 것은 모를 일이야.

 


<보덕이 절을 옮겨왔다는 경복사터.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1번지 소재>
 

보덕이 고려를 떠난 것에 대해서 《삼국사》나 《삼국유사》는 보장왕 9년 경술(650) 6월, 최치원의 《보덕전》 인용 《동국이상국집》에서는 보장왕 26년 정묘(667) 3월 3일로 적고 있는데, 아마 650년이라는 것은 보덕이 처음으로 고려를 떠난 해이고, 최치원이 667년 3월 3일이라고 적은 날짜는 아마 경복사라는 절이 완성된 날일 것이다. 사실 뭐 절을 통째로 옮겨온다는 게(그것도 하루 아침에 하늘로 날려서) 가능한 일인가. 무슨 판타지도 아니고. 게다가 퇴계로부터 '유학자 주제에 불교에 아부한 놈'이라고 욕먹을 정도로 불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최치원이었으니, 고려의 멸망을 보덕이라는 승려의 이주와 연결시켜 해석하려고 했고, 마침 고려를 떠난 보덕이 전주 고덕산에 완전히 정착한 그 해와 경복사의 창건시기가 일치한다는 점을 보고, "봐라, 보덕 스님이 떠나고 바로 1년 뒤에 고려가 망하지 않았느냐"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날짜를 그렇게 몰아서 적으신 거라고.

 

처음으로 고려를 떠난 것은 650년, 그리고 17년 뒤 경복사가 창건되고 보덕이 완전 정착한 3월 3일이, 보덕이 완벽하게 고려를 떠난 날이라고 말한 최치원의 말도 사실 틀린 것은 아니다. '떠났다'와 '도착했다'는 말은 같아보이지만 다르거든. '활을 쏘았다'고 그게 다 '명중했다'는 건 아니니까. 화살이 명중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다.

 

[秋七月, 霜雹害, 民饑.]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9년(650)

 

곡식이 없으면 전쟁을 무슨 수로 하려나....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11년(652)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당에서는 고려 칠 방법을 과거 급제라는 특등상품까지 걸고서 눈에 불켜고 찾고 있는걸 고려는 알까 몰라.

 

[十三年, 夏四月, 人或言 "於馬嶺上, 見神人曰, '汝君臣奢侈無度, 敗亡無日'."]

13년(654) 여름 4월에,

“마령(馬嶺) 위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너희 왕과 신하들이 사치함이 한도가 없으니,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노라.’고 말하였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고려의 운수도 서서히 다해가고 있었던가ㅡ?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이나, 경복사로 찾아와 보덕의 영정 앞에 절했던 대각국사 의천 같은 승려들은, 이때 신인이 나타나 고려가 망할 것이라 했던 것이 보덕이 절을 옮겨간 뒤의 일이라는 점을 들어 고려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 했기 때문이라 했지만, 안정복 영감이나 단재 선생은 모두 근거없이 지어낸 헛소리라 했다.

 

[冬十月, 王遣將安固出師及靺鞨兵, 擊契丹, 松漠都督李窟哥禦之, 大敗我軍於新城.]

겨울 10월에 왕은 장수 안고(安固)를 보내 말갈 군사와 함께 거란을 쳤는데,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막아서 신성에서 우리 군사를 크게 패퇴시켰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13년(654)

 

돌궐과 신라뿐 아니라 거란까지 당에 붙어서 고려를 적대시하는 와중이다.

 

[十四年, 春正月, 先是, 我與百濟·靺鞨, 侵新羅北境, 取三十三城, 新羅王金春秋, 遣使於唐求援.]

14년(655) 봄 정월. 이에 앞서 우리가 백제 ·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33성을 빼앗았으므로,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당에 사신을 보내 원조를 구하였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이때 신라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다스리고 있었다. 예전 백제 의자왕에게 딸과 사위를 잃은 것에 대한 보복을 위해 고려에 군사를 청하러 갔다가 원하던 군사는 얻지도 못하고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쳐온 적이 있는 자. 그 자가 김유신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신라의 왕이 되었다. 어쩌면 그때 고려가 신라를 포섭하지 못했던 것이, 고려의 운명을 가르는 변수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려가 신라로부터 되찾겠다고(다물하겠다고) 했던, 서쪽 땅 5백리ㅡ그리고 그 땅을 되찾기 위해 계속해 쳐들어오는 고려의 침공에 견디다 못한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했고,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당은 다시 군사를 보내 고려를 친다.

 

[二月, 高宗遣營州都督程名振·左衛中郞將蘇定方, 將兵來擊.]

2월에 고종이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14년(655)

 

전쟁은.... 어느 나라나 피곤하고 고달픈 일이다.

 

[夏五月, 名振等, 渡遼水, 吾人見其兵少, 開門度貴端水, 逆戰. 名振等奮擊, 大克之, 殺獲千餘人, 焚其外郭及村落而歸.]

여름 5월에 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 마주 싸웠다. 명진 등이 분발하여 공격해 크게 이기고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그 외곽과 촌락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14년(655)

 

이번에도 당은 소모전 원칙에 따라 고려를 마구 때리고 곧바로 빠진다. 고려군과 당군이 대치했다는 그 귀단수라는 강에 대해서 한진서는 《해동역사》에서《신당서》에 기록된 바, 당의 장수 정명진이 신성(新城)에 이르러 고려를 얻었으니 《구당서》 정명진열전에 나오는 귀단수는 마땅히 신성의 서남쪽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 전장은 당연히 신성 근교가 되겠지.

 

[十五年, 夏五月, 王都雨鐵.]

15년(656) 여름 5월에 서울에 쇠가 비처럼 떨어졌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우박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쇠가 떨어졌다고?

 

[二年秋八月癸巳朔庚子, 高麗遣達沙等進調.<大使達沙, 副沙伊利之, 總八十一人> 九月, 遣高麗大使膳臣葉積, 副使坂合部連磐鍬, 大判官犬上君白麻呂, 中判官河內書首<闕名>, 小判官大藏衣縫造麻呂.]

2년(656) 가을 8월 계사 초하루 경자(8일)에 고려가 달사(達沙) 등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대사는 달사이고 부사는 이리지(伊利之)로 모두 81명이었다.> 9월에 고려에 대사 선신(膳臣카시하데노오미) 엽적(葉積), 부사 판합부련(坂合部連사카히베노무라치) 암추(磐鍬), 대판관 견상군(犬上君이누카미노기미) 백마려(白麻呂하쿠마로), 중판관 하내서수(河內書首가와치노 후미노오비토)<이름이 빠졌다.>, 소판관 대장의봉조마려(大藏衣縫造麻呂) 등을 보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니혼쇼키)》권제26, 제명기(齊明紀사이메이키) 2년(656년)

 


<교토의 팔판신사(야사카 진쟈). 고려 사신 이리지가 모셔온 신라신을 제사지내는 신사이다.>

 

일본 교토의 팔판신사(야사카진쟈). 왜황 제명(사이메이) 2년에 고려에서 사신이 왔을 때, 대사 달사를 따라온 부사 이리지가 이 신사의 첫 번째 제주(祭主)였다. 이 절에 보관된 고문서 《팔판어진대신지기(八坂御眞大神祗記)》에 보면, 고려에서 온(그것도 2차 방문이었음) 사신 이리지사주(伊利之使主이리시노오미)가, 신라의 우두산에서 모시던 소잔오존(素戔嗚尊스사노오노 미코토)을 이곳, 산성국(야마시로노쿠니) 아타고군 야사카노사토에 모셨고, 왜왕으로부터 팔판조(八坂造야사카노미야츠코)라는 성씨를 하사받아 이곳에 정착한 것이 그 시초라 했다. 《신찬성씨록》에도,“팔판조(야사카노미야츠코)는 고려인 이리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나. 신라에서 모시던 신을 왜 고려 사람이 여기로 옮겨왔는지,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다만 그 이후로 이리지는 이곳에 정착해 살았고, 장남 진수(眞手, 마테) 이래로 후손들이 대대로 이 팔판 신사(야사카 진쟈)를 관장해왔다. 해마다 7월이면 이 신사에서는 기온제(기온마츠리)라는 것을 여는데 일본 3대 마츠리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아주 성대한 축제다. 이리지와는 별개로, 교토의 질병과 재액을 없애주기를 바라는 내량(나라)-평안(헤이안) 시대의 어떤 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冬十二月, 遣使入唐賀冊皇太子.]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였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15년(656)

 

이때 당에서 책봉한 태자는 나중에 측천무후에게 피살당한다.

 

[十七年, 夏六月, 唐營州都督兼東夷都護程名振, 右領軍中郞將薛仁貴, 將兵來攻, 不能克.]

17년(658) 여름 6월에 당의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사신을 보내봤자, 저들이 고려를 침공해 멸망시키려는 생각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을까. 이미 당의 게릴라 전술로 전국이 전시체제에 들어가있어, 농사를 짓지 못해 창고의 곡식도 점차 바닥을 보이고 있을 것이고, 한창 농사 지어야 할 때에 전쟁터로 끌려나와서 개고생 하고 있는 병사들의 불만도 극에 달해있었을 것을. 《동사강목》에서 이 보장왕 17년의 전투에 대해서 기록한 것을 보면,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 정명진과 중랑장 설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의 적봉진(赤烽鎭)이라는 곳을 쳐서 함락시키고 4백여 급(級)을 베었는데, 고려의 두방루(豆方婁)라는 장수가 3만 군사로 이를 막았고, 정명진은 거란족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역습해 크게 깨뜨리고 2천 5백 급을 참수했다. 

 

[十八年, 秋九月, 九虎一時入城食人. 捕之不獲. 冬十一月, 唐右領軍中郞將薛仁貴等, 與我將溫沙門, 戰於橫山, 破之.]

18년(659) 가을 9월에 아홉 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성으로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었다. 붙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당의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郞將) 설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워서 이를 깨뜨렸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호랑이ㅡ백호는 예로부터 서쪽을 상징하는 신수라고 했던가? 아홉 마리 호랑이가 평양에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던 그 해 겨울 11월.온사문이 이끌던 고려군은 서쪽으로부터 쳐들어온 설인귀의 군대에게 횡산에서 격파당한다. 순암 영감은 이때의 일을 이야기하면서《성경지(盛京志)》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설인귀가 횡산에서 온사문을 깨뜨리고 석성(石城)에서 싸울 때, 활 잘 쏘는 사람이 있어 당군을 많이 죽였다. 인귀가 단기(單騎)로 돌격하니 적은 궁시가 모두 부러져 마침내 사로잡았다.

 

여기서도 또 나오는구나. 설인귀. 중국에선 고려의 연개소문에 맞설 수 있는 인물로 설인귀를 거론한 듯 하다.

 

[六年春正月壬寅朔, 高麗使人乙相賀取文等一百餘, 泊於筑紫.]

6년(660) 봄 정월 임인 초하루에, 고려의 사인인 을상(乙相) 하취문(賀取文) 등이 축자(筑紫, 치쿠시)에서 묵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니혼쇼키)》권제26, 제명기(齊明紀사이메이키) 6년(660년)

 

하취문이 왜에 오기 1년 전이었나, 몇 월인지는 알 수 없는데 659년중에, 비피(羆皮) 즉 큰곰의 가죽을 가지고 왜의 시장에서 파는 고려 사람이 있었다. 한 장에 면(綿) 60근을 매겨서 팔았는데 시사(市司)들은 보고 웃으면서 피해 지나갔다나? 그것을 고려에서 와서 왜에서 머무르던 화사(畵師) 자마려(子麻呂)가 일흔 장을 빌려다 빈석에 깔아놓고 손님들을 불렀는데 그걸 또 손님들은 이상해하면서 또 부끄러워하면서 돌아갔다고, 《니혼쇼키》에는 실려 있다. 원문에는 그 큰곰가죽을 판 것이 고려사인(高麗使人)이라고 했는데 '고려 사신'이라는 뜻이다. 사신이라면 을상 하취문이 오기 전에 또 와있었는데 기록에서만 빠진 것인지, 아니면 을상 하취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고려 사신이 왜에 와서 장사하는 일도 있었다는 것 정도만 말하면 되겠다. '면(綿)'이라는 건 '솜'을 가리키는 것이다. 화폐가 통용되기 전에는 화폐 대용으로도 쓰였던 물품이다. 당과의 전쟁을 한창 벌이는 상황에서 고려가 왜국에 사신을 보낸 것도, 어떻게든 당과 신라 양쪽에서 협공당하는 위협을 막기 위한 나름의 외교적인 차원에서의 사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백제와 왜국을 연결함으로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겠다는 것이겠지.

 

[夏五月辛丑朔戊申, 高麗使人乙相賀取文等, 到難波館]

여름 5월 신축 초하루 무신(8일)에 고려의 사신 을상 하취문 등이 난파관(難波館, 나니와노타테)에 왔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권제26, 제명기(齊明紀, 사이메이키) 6년(660년)

 

을상 하취문이 왜에 사신으로 가있는 동안 펴라에서는 괴현상이 발생한다. 그것은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생겨난 엄청난 변수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十九年, 秋七月, 平壤河水血色凡三日.]

19년(660) 가을 7월에 패수[平壤河]의 물이 무려 사흘 동안이나 핏빛이었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왕도 펴라성을 끼고 도는 대동강 강물이 사흘 동안이나 핏빛을 띠던 그 달 7월에, 18만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을 사로잡았다. 백제가 멸망한 것이다. 정확히는 3년 뒤인 663년에 이르러 백강구전투에서 백제와 왜의 구원군이 깨지고 주류성이 함락당함으로서 망하는 것이지만, 이때에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을 비롯해 수많은 백제의 대신과 장인들, 사비성의 백성들이 당에 끌려갔다. 신라로서는 고려와 함께 자신들을 위협하던 골칫거리이자 선대의 원수를 갚은 셈이었고, 고려로서는 신라를 견제해줄 우호 세력을 또 하나 잃어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서 나당연합군은 고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秋七月庚子朔乙卯, 高麗使人乙相賀取文等罷歸.]

가을 7월 경자 초하루 을묘(16일)에 고려의 사신 을상 하취문 등이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6, 사이메이키(齊明紀, 제명기) 6년(660년)

 

백제와 고려 사이에 어떤 우호관계라던가 협조적인 관계가 있었다거나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백제의 멸망이 고려에게 심각한 문제로 다가올 것은 분명했다. 백제 공격, 그것도 신라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그 파병을 구실로 당은 고려의 후방에 해당하는 백제 지역에 그들의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고 백제를 무너뜨리고 그 땅에 친당정권만 세우고 오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十一月一日, 高句麗侵攻七重城, 軍主匹夫死之.]

11월 1일에 고려가 칠중성을 침공하여 군주 필부(匹夫)가 전사하였다.

《삼국사》권제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

 

저 필부라는 사람은 신라 사량부 사람으로 일단 6두품이었다. 고려가 칠중성을 공격했을 때, 그는 칠중성에 속한 조그만 현의 현령을 맡고 있었다.

 

[其明年庚申秋七月, 王與唐師滅百濟. 於是, 高句麗疾我, 以冬十月, 發兵來圍七重城. 匹夫守且戰二十餘日. 賊將見我士卒盡誠, 鬪不內顧. 謂 "不可猝拔." 便欲引還. 逆臣大奈麻比歃密遣人告賊, "以城內食盡力窮, 若攻之必降." 賊遂復戰.]

그 다음해 경신(무열왕 7년: 660) 가을 7월에 왕이 당군과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이때 고려에서 우리를 미워하여 겨울 10월에 군사를 출동시켜 칠중성을 포위하였다. 필부가 이를 지키고 20여일을 싸웠다. 적장은 우리 병졸이 정성을 다해 싸우며 뒤돌아다보지 않음을 알고

"쉽게 함락시킬 수 없겠다."

하며 문득 철수하고자 하였다. 역신(逆臣) 대나마 비삽(比歃)이 몰래 적에게 사람을 보내 알리기를

“성내의 식량이 다하고 힘이 다하였으니 만약 공격하면 반드시 항복받을 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적은 드디어 다시 공격해 왔다.

《삼국사》권제47, 열전제7, 필부

 

10월부터 시작된 고려의 공격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는데 있었다. 백제가 신라에게 멸망당한 것을 고려가 알고 신라를 미워했다고 했으니, 어쩌면 소위 말하는 '여제동맹'의 차원에서 고려는 백제를 지원할 지원병으로서 신라에 군사를 파병한 듯 한데, 11월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가려는 고려군의 발목을 신라에서 잡았다. 하필이면 칠중성 안에서 배신자가 생길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匹夫知之, 拔劒斬比歃首, 投之城外, 乃告軍士曰 “忠臣義士, 死且不屈. 勉哉努力! 城之存亡, 在此一戰.” 乃奮拳一呼, 病者皆起, 爭先登. 而士氣疲乏, 死傷過半. 賊乘風縱火, 攻城突入. 匹夫與上干本宿 · 謀支 · 美齊等, 向賊對射. 飛矢如雨, 支體穿破, 血流至踵. 乃仆而死.]

필부가 이를 알고 칼을 뽑아 비삽의 머리를 베어 성밖에 던지며 군사에게 고하였다.
“충신과 의로운 병사는 죽어도 굴하지 않는다. 힘써 노력하라! 성의 존망이 이 한판의 싸움에 달렸다.”
이에 분연히 주먹을 쥐고 한번 외치니, 병든 사람까지 모두 일어나 다투어 먼저 성에 오르려 하였다. 그러나 병사의 기운이 피로하고 지쳐 죽고 다친 자가 절반이 넘었다. 적은 바람을 타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여 갑자기 쳐들어왔다. 필부는 상간(上干) 본숙(本宿), 모지(謀支), 미제(美齊) 등과 함께 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 날으는 화살이 비오듯했고 팔다리와 몸은 찢어지고 잘려, 흐르는 피가 뒤꿈치를 적셨다. 이에 필부 등은 쓰러져 죽었다.

《삼국사》 권제47, 열전제7, 필부

 

아니 그래서 이겼다는 거야 졌다는 거야. 장렬하게 전사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래서 성을 뺏겼어? 고구려본기에도 이때 어떻게 됐다고 뭐, 달다 쓰다 말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성이 함락되었는지 안 함락되었는지, 일단 고구려본기에서 그걸 안 적었으니까 성이 함락 안 되고 무사히 지켜진 것으로 봐도 되려나? 제기랄. 나보고 뭘 어쩌란 건지.

 

아무튼 그 11월 1일이라는 날, 뭔진 몰라도 화공에 적절한 날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원래 화공에는 불을 놓는 적절한 때와 불이 일어나는 적절한 날이 있는데, 때마침 겨울이겠다 날씨도 건조하고 메말랐으니 불이 잘 붙을 것이고, 기(箕), 벽(壁), 익(翼), 진(軫)이라고 해서 달이 이 네 별자리를 통과하는 날에는 커다란 바람이 분다고 해서 《손자병법》에서는 이 날이 화공에 적절한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성은 궁수자리, 벽성은 페가수스나 안드로메다자리, 익성은 컵자리 및 바다뱀자리, 진성은 까마귀자리에 해당하는데, 별과 달의 위치에 따라서 바람이 부는 방향도 제각기 다르단다. 기성이 간방(동북쪽)에 있고 달이 그 다음에 있으면 동북풍, 벽성이 건방(서북쪽)에 있고 달이 그 다음에 있으면 서북풍, 익성이나 진성이 손방(동남쪽)에 있고 달이 그 다음에 있으면 동남풍이 분다. 고려군은 이 방위와 풍향을 헤아려서 예의 그 불화살 공격으로 칠중성을 공략했고, 처절한 전투를 치른 뒤 철수했다.

 

[冬十一月, 唐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爲浿江道行軍大摠管, 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左驍衛將軍劉伯英, 爲平壤道行軍大摠管, 蒲州刺史程名振, 爲鏤方道摠管, 將兵分道來擊.]

겨울 11월에 당이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으로,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을 누방도(鏤方道) 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였다.

《삼국사》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19년(660)

 

당은 다시 고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왔다. 거란을 굴복시키고 백제까지 멸한 당은 이제 신라와 함께 고려를 삼면에서 포위하게 되었고, 고려는 마지막 동맹세력이었던 백제마저 잃고 고립되고 말았다. 사실 당으로서는 국가안보에 별 문제될 것도 없는 백제를 굳이 13만 대군 일으켜가며 신라의 요청대로 멸망시켜준 것에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백제의 땅이나 물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당군을 호남 땅에 주둔시킬 건수가 생겼잖아. 평양으로 갈 필요 없이 백제 코밑에다가. 더구나 신라군까지 당을 도우며 군량지원을 해주고 있으니 보급문제도 끄떡없는 거지. 고려는 이제 멸망한 거나 다름없었다고.

 

하지만 고려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랬을 것 같으면 흉노와 선비, 말갈, 그리고 백제와 신라, 수많은 제민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7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이리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 고려가 지금껏 쌓아두었던 모든 저력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터져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물이 다 빠져나간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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