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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4>제27대 영류왕(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3>제27대 영류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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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무왕 9년(626) 4월 4일 새벽. 당조의 수도 장안의 북문 현무문(玄武門)에서,

입궐하는 사람들에게 화살이 날아든다. 입궐하려던 것은 당 고조의 태자와 셋째 황자.

그 둘을 비롯해 현무문으로 입궐하던 대신들은 모두 괴한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범인은 고조의 둘째 황자 이세민. 고조가 황자들을 모두 대궐로 불러들인 것을 빌미로

현무문 수문장을 매수한 다음, 100명의 군사와 함께 현무문에 숨어있다가

태자 건성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대번에 달려들어 활로 쏘아 죽이고,

셋째 황자 원길은 이세민의 부하 위지경덕의 손에 죽었다.

 

훗날 역사에서 '현무문의 변'이라고 기록될 이 황실 쿠테타는 당 황실을 뒤흔들었고,
주동인물이었던 이세민은 권력을 쥐었다. 고조를 협박해 사흘 뒤에는 태자 책봉을 받고,

두 달 뒤에는 천자의 자리까지 반강제로 양위받아 2대 태종 문황제로 즉위했다. 


<당 태종 이세민. 정관지치라는 태평성세를 이끈 성군의 온화한 얼굴 뒤에는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폐위시켜 죽음으로 몰아간 추악한 악마의 낯짝을 감추고 있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아버지 고조와는 달랐다.

고조는 수 양제가 일으킨 정복전쟁이 나라를 어떻게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고려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고

그랬기에 '칭신(稱臣)을 받지 않아도 좋다'는 말까지 해가며 이민족과의 전쟁을 피하려 했지만,

이세민은 한 무제처럼 만리장성 안의 중화세계뿐 아니라 저너머 만리장성 바깥,

중국 주변의 모든 이민족들에게까지 칭신을 받고 조공을 받는 세계제국의 야망을 품은 자,

좋게 말하면 포부가 크지만 나쁘게 말하면 무모한 놈('새끼'라고 쓰고 싶지만)이었다.

 

[九年, 新羅·百濟遣使於唐, 上言 “高句麗閉道, 使不得朝, 又屢相侵掠.” 帝遣散騎侍郞朱子奢, 持節諭和, 王奉表謝罪, 請與二國平.]

9년(626)에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당에 보내 말하였다.

“고려가 길을 막아 입조하지 못하게 하고 또 거듭 침략합니다.”

황제가 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를 보내 절부를 가지고 화친을 권하게 하였다. 왕은 표를 올려 사죄하고 두 나라와 화평할 것을 청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신라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진평왕의 상소문이 전해진 것이 7월의 일이었는데,

이때 백제에서는 명광개(明光鎧)라는 고급 갑옷까지 바치면서 애걸하다시피 청했고,

당 태종은 옳거니 하고 주자사라는 자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신라 침공 중지'를 요구한 것. 

그 사안에 대해서 건무왕은....

응? 그런데 이게 뭐야. 표를 올려서 사죄했다고?

여지껏 고려의 어떤 왕들도 보인 적이 없는 굴욕적인 자세. 


건무왕이 고려 역대 국왕들 가운데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당에 대한 저자세 외교 때문이다. 사실 건무왕의 태도를 살펴보면,

고려 안에서 그의 대한 반대 여론, 특히 당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는

주전파 무신(武臣)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고려는 당과 문제가 생길 소지를 예방했을 뿐이지만,

그렇게나 군사를 일으켜 맹렬하게 공격해오던 북방의 고려가

당이라는 나라 앞에서 '겉으로나마' 머리 숙이는 것을 보고, 신라와 백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게다가 건무왕은 당 태종을 너무 몰랐다.

그가 고려와 계속해서 평화를 유지할 마음도 없고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당의 영향력을 고려와 백제, 신라 삼국에 행사하려 하고 있다는 것조차. 


[十一年, 秋九月, 遣使入唐, 賀太宗擒突厥頡利可汗, 兼上封域圖.]

11년(628) 가을 9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태종이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겸하여 봉역도(封域圖)를 바쳤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여기서 건무왕은 무척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다.

돌궐이라면 고려의 우호이고, 고려가 당의 공격을 받게 되더라도

그 배후를 칠수 있는 북방의 우호세력인데,

그 돌궐이 당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했을뿐 아니라,

그걸 사신을 보내 축하하기까지 했으니 돌궐과의 우호는 그날로서 깨져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봉역도라는 고려 지도의 실체ㅡ

어디까지나 당은 고려의 가상 적국이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런 상황에서 산과 강의 형세와 수도의 위치를 그린 지도라는 것을 당에 보낸 것은,

어찌 보면 서로간의 국경을 확실히 정해놓자는 의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악용될 경우에는 고려의 군사 요새와 산천의 흐름,

수도까지의 거리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어 당이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대공(對空) 무기가 발달하지도 않아서 산의 험준함이나 강물의 흐름,

그리고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이 전쟁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던 시대에는 말이다.

 

[十二年, 秋八月, 新羅將軍金庾信, 來侵東邊, 破娘臂城.]

12년(629) 가을 8월에 신라 장군 김유신이 동쪽 변경으로 쳐들어 와서 낭비성(娘臂城)을 깨뜨렸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낭비성은 조선조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허목의 《미수기언》에 이른바 지금의 청주다.

이 무렵 신라는 고려를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 가운데 하나로 성장해 있었다.

그 와중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김유신. 몰락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며,

훗날 김춘추와 결탁해 신라의 조정을 장악하고 고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게 되는 자.
그리고 이때의 싸움이, 김유신의 첫 출정이자 그의 이름 석자를

세상에 떨치는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기도 했다.


[五十一年, 秋八月, 王遣大將軍龍春·舒玄 副將軍庾信, 侵高句麗娘臂城. 麗人出城列陣, 軍勢甚盛, 我軍望之, 懼殊無鬪心. 庾信曰 “吾聞○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乃跨馬拔劒, 向敵陣直前, 三入三出, 每入或斬將或搴旗. 諸軍乘勝, 鼓噪進擊, 斬殺五千餘級, 其城乃降.]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어 고려의 낭비성(娘臂城)을 쳤다. 고려인이 성을 나와서 진을 치니 군세가 매우 성하여, 우리 군사가 그것을 보고 두려워 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유신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끌어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 했다. 내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들고는 적진으로 향하여 곧바로 나아가 세 번 들어가고 세 번 나오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의 목을 베고, 혹은 깃발을 뽑았다.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북을 치며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이니, 그 성이 이에 항복하였다.

《삼국사》 권제4, 신라본기4, 진평왕 51년(629)

 

하긴 신라가 이만큼 강성해져 있는 상황에서 당과의 우호를 저버리게 되면

2중으로 침공을 받아 전쟁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건무왕은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단재 신채호 선생 식으로 표현하자면

영양왕 이전부터 행해온 '남수서진북벌(南守西進北伐)'이 아니라

'북수남벌(北守南伐)'로, 북방의 당과는 소극적인 대응을 통해 우호를 유지하고

남쪽의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하는 전략을

건무왕 때에 채택했다는 것이지. 그렇게 따지면 뭐 건무왕을 옹호하는 사람들 말에도

일리는 있다.


[九月, 遣使入唐朝貢.]

9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12년(629)

 

고려와 당, 백제와 신라, 그리고 왜(일본).

우리 학교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무렵 7세기는 국제질서를 새롭게 재편하기 위한

이른바 '동북아시아 대전(大戰)'이 한참 벌어지고 있었던 때라고 했다.

그 전쟁의 발발은 고려 영양왕이 말갈(예)의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를 침공했던

서력 598년부터 시작되었고, 서력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3년의 백강구전투,

668년의 고려 멸망과 676년의 당군 축출을 거쳐 698년 발해의 건국을 끝으로 마무리된,

거의 100년에 걸친 국제대전이었다.

 

명색이 '동아시아 신질서 확립'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전투다보니

해동 삼한뿐 아니라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끼어들고,

또 어떤 나라의 이해관계 때문에 아무 상관도 없이 가담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찌보면 7세기 '삼한쟁패'라는 우리 역사의 소용돌이 위에

'당'과 '왜(일본)'라는 외세들이 끼여들어

말 그대로 잘 차려진 밥상 위에 '숟가락'만 하나 얹었을 뿐인 이 거대한 전투는,

수에 이어 일어선 당과 남쪽에서 서서히 일어서는 왜가 본의든 아니든 말려들게 되면서

점차 '국제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나라와 나라간의 소위 '편먹기'도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三月丙寅朔, 高麗大使宴子拔, 小使若德, 百濟大使恩率素子, 小使德率武德, 共朝貢.]

3월 병인 초하루에 고려의 대사(大使) 연자발(宴子拔)과 소사(小使) 약덕(若德), 백제의 대사 은솔(恩率) 소자(素子)와 소사 덕솔(德率) 무덕(武德)이 같이 조공하였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23, 죠메이키(舒明紀) 2년(630)

 

고려의 사신과 함께 왜국에 도착한 백제의 사신들. 그들 사이에는 무슨 썸씽이 오고갔을까.

이들 사신은 다섯 달 동안 일본에 머물렀는데, 《니혼쇼키》 죠메이키(舒明紀)에는 8월 8일에

야마토 조정에서 열어준 잔치에 나란히 참석하고, 9월 4일에 나란히 귀국했다고 적고 있다.
흔히 말하는 '여제동맹'이 이때에 이르러 더 강화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실제 두 나라 사이에 뭔가 동맹이 있었던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당에 대한 조공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참 못볼 꼴도 많이 생기곤 했다.


[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瘞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14년(631)에 당이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 수의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곳에 와서 제사지내고, 당시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경관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사해보니까, 전장에서 거둔 적군의 머리를 베어 탑처럼 쌓아

적군에게 함부로 공격할수 없도록 경고하는 일종의 전승기념탑 같은 것인데,

고려에서도 수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면서 그 수급을 쌓아다가 경관을 만들어두었던 모양이다.

그걸 당에서 와서 헐어버린 것이다. 우리에게야 이것이 빛나는 승리의 기록이지만,

저들에게는 4번이나 깨지고 돌아간 기분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수치스런 상징.

그래 그걸 보기 싫다고 헐어버리는데도 태왕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놈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현충사에 불을 지르고 독립기념관을 부순다고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부 들고 일어나서 대통령 욕하고

왜놈들 몰아내자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날뛸 판인데,

고려라고 뭐 달랐겠어? 우리는 이겼다고 좋아라 기념하면서 이걸 세웠는데,

저들이 그걸 보기 흉하다고 헐어버리고,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건무왕에 대한 주전파 무장들은 그야말로 터지기 직전의 냄비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리라.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 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봄 2월에 왕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쪽으로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러 천여 리나 되었다. 무릇 16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14년(631)

 

장성축조는 사실 고려 내부의 건무왕 반대세력,

특히 당에 대한 '굴욕외교'에 분개하던 주전파 무장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일종의 '정치쇼'였다. 어느 정도 받아주면서 불만을 잠재우는

굉장히 눈가리고 아웅식의 대책인데, 고려 동북쪽 부여성에서

동남쪽으로 서해 바다까지 천리에 이르는 장성,

소위 말하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이 그것이다.

 

다만 중국과 다른 점은 성과 성을 연결하는 담을 길게 쌓는 것이 아니라,

거점마다 쌓은 성의 집합이다. 그 집합들이 천리로 이어져 있다고 해서 천리장성이라고 하는데,

이런 대규모 공사를 하는 걸 보면, 건무왕도 언젠가 어차피 당과의 일전은

꼭 치러야만 하는 수순이라 여겼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만....

(왜 장제스도 일본보다 공산당을 먼저 진압해야 된다고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일본과는 언제고 일전을 치러야 한다고 그랬었지.

선후관계가 뒤집히는 바람에 결국 대만으로 쫓겨갔지만) 


[春三月, 七重城南大石, 自移三十五步.]

봄 3월에 칠중성(七重城) 남쪽의 큰 돌이 저절로 35걸음 옮겨갔다.

《삼국사》 권제5, 신라본기5, 선덕왕 7년(638)


칠중성은 신라의 북쪽 변경에 있는 성읍.


내소군(來蘇郡)은 본래 고구려 매성현(買省縣)이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견주(見州)다. 영현이 둘이었다. 중성현(重城縣)은 본래 고구려 칠중현(七重縣)이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다. 파평현(波平縣)은 본래 고구려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이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신라 때에는 내소군에 속한 2현 가운데 하나였던 칠중성은

이 무렵에는 신라령에 속해 있던 땅이었다. 파평은 오늘날

파평 윤씨 일족의 본향이 된 곳으로 고려 때에는 파해평사현이라 불리던 땅이었고.

그렇게 보면 지금의 고려령과 관련이 있는 집안이 한둘이 아닌 셈.

이 해에 이르러 남쪽의 큰 돌이 서른 다섯 걸음을 저절로 옮겨간 것을 보고

신라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二十一年, 冬十月, 侵新羅北邊七重城.]

21년(638) 겨울 10월에 신라 북쪽 변경의 칠중성(七重城)을 침략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아니나다를까, 건무왕은 군사를 보내어 칠중성을 공격하게 한다.

《삼국사》신라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인평 4년(638)의 일인데, 고려에서 쳐들어왔다는 말에

칠중성은 그야말로 패닉상태에 빠졌던 듯, 기록은 "백성들이 놀라고 겁에 질려서

산골자기로 도망쳐 들어갔다[百姓驚擾入山谷]"고 말하고 있다.


[王命大將軍閼川, 安集之.]

왕이 대장군 알천(閼川)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정시켰다.

《삼국사》 권제5, 신라본기5, 선덕왕 7년(638) 겨울 10월


인평 5년에 칠중성에서 벌어진 고려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이 대장군 알천이라는 사람은,

신라의 귀척회의인 '화백'의 한 명이었는데, 어느날 회의 중에 좌장에 뛰어든 범을 보고도

무서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맨손으로 범의 꼬리를 잡아다 땅바닥에 팍 메쳐버릴 정도의

괴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 했다. 고려가 칠중성을 공격했을 때,

겁에 질려 산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을 달래 고려군의 심리전에 동요되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新羅將軍閼川逆之, 戰於七重城外, 我兵敗衄.]

신라의 장군 알천(閼川)이 막으므로 칠중성 밖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했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21년(638)


비록 당에 대한 온건주의 노선을 택한 건무왕이었지만,

'북수남벌'의 원칙에 따라 신라나 백제와의 전쟁은 굳이 피하지 않았으므로,

무장들이 출세할 수 있는 길도 완전히 없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칠중성 공략은 낭비성 때와 마찬가지로 실패로 돌아갔다.

선덕여왕본기의 자문을 빌린다면 신라군과 충돌해서 패한 것이 11월,

침공 한 달만에 고려군은 칠중성 공략을 단념하고 군사를 돌려야 했다.

 
북수남벌이라는 그것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 것이,

신라라고 고려가 침공해오는데 손 놓고 가만히 앉아있을 이유도 없었다.

이때의 신라는 적어도 고려가 알던 예전의 그 허약한 신라가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건무왕의 이런 신라 침공은 오히려 신라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해 그들 코앞에 성큼 더 다가섰을 때도

그 특유의 '생존본능'으로 상국으로 모시던 고려를 버리고 과감히 백제와 손잡아버린 신라다.

고려가 신라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신라로서도 고려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겠지만,

가뜩이나 백제와 사이도 안 좋고 수시로 전쟁 벌이느라 죽겠는데

이젠 고려까지 나서서 저러니 진짜 신라로서는 답이 안 나오지.

어쩌겠나. 어떻게든 당에게 달라붙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은 이럴 때에 쓰는 건가?


[二十三年, 春二月, 遣世子桓權入唐朝貢. 太宗勞慰, 賜賚之特厚.]

23년(640) 봄 2월에 세자 환권(桓權)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이 위로하고 선물을 특별히 후하게 주었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이 양반 또 한 수 물렀다.... 세자를 보내다니. 왕이 죽으면 뒤를 이어 즉위할 세자를.

고려 내부에서 건무왕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당 강경파들은

그야말로 반발이 극에 달했으리라.

그리고 당은 고려가 자신들에게 대항할 뜻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안심하고' 주변 정벌에 나설 수 있었다.


[遣王子弟入唐, 請入國學.]

왕의 자제를 당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줄 것을 청했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23년(640) 2월

 

사실 건무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어 왕실 자제를 입학시켜줄 것을 청한 것은

신라에서도 마찬가지 선덕여왕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던 국제 관례였다.

백제 무왕도 똑같이 이것을 당에 청했는데, 그것은 당이 추진한 개방정책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 무렵 당 태종은 이름난 유학자를 수도 장안에 많이 불러모아 

관원(官員) 즉 박사(교수)로 삼고, 자주 국자감(國子監)에 들러

그들로 하여금 유학을 강론하게 해서 대경(大經) 가운데 하나 이상에 능통한 학생에게는

모두 관직에 나아갈 자격을 주었다고, 선덕여왕본기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 시기를 즈음해 당 태종은 국자감 관사를 1천 2백 칸으로 크게 늘려 짓고,

정원도 3,260명으로 대폭 늘렸다. 사방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경사(京師)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고려, 백제, 신라 삼국은 물론이고,

고창(高昌), 토번(吐蕃) 그리고 왜국에서도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당 제국의 수도였던 시안(西安). 당은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시대였다.>


선덕여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 귀척 자제들의 국학 입학을 청한 것은

건무왕보다 조금 늦은 여름 5월의 일이었는데,

외국의 유학생을 당 조정이 기꺼이 수용한 것은 당조가 우선 선비족 왕조로서

비(非)한족인 이민족에 대해서도 너그러웠다는 데 1차적인 원인이 있다 할 수 있다.

 

당은 이민족에 대해서 전대 다른 중국의 왕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굉장한 포용 정책을 펼쳤고,

주변 여러 나라로부터 유학생을 받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당이 추진한 많은 포용정책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때 당에서 새로운 학문, 특히 유교의 교리를 공부하고 돌아간 유학생들이

자신들의 나라에서 많은 활약을 했는데, 특히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행해진

정치 개혁은 바로 이들 유학생들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고려나 백제, 신라만이 아니라 일본도 이때 당에 견당사라는 사신을 보내

당의 문물을 수입하려 애썼고, 이들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다이카개신(大化開新)이 일본 내에 미카도 즉 국왕 중심의 율령국가체제를

확고히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건무왕은 당에 왕실 자제를 들여보내어 국학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배워오게 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나라 체제를 개혁하고자 했다.


[秋九月, 日無光, 經三日復明.]

가을 9월에 해가 빛이 없다가 사흘이 지난 뒤 다시 밝아졌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23년(640)


그리고 그해 가을 9월, 괴이하게도 하늘의 해가 사흘 동안이나 빛을 잃었다.

권근이라는 양반은 이걸 두고, 장차 연개소문이 건무왕을 죽일 징조였다 했다.


태양[日]은 모든 양(陽)의 으뜸이요 임금의 상징인데 사흘이나 빛이 없었으니, 그것은 개소문(蓋蘇文)이 시역(弑逆)할 징조가 이미 먼저 나타난 것이다. 고구려의 군신은 마땅히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근심을 미연에 막았어야 하는데 그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고려가 당 앞에서 굴욕외교노선을 택한 것에 대한

하늘의 경고였다고 보이는데...


[二十四年, 帝以我太子入朝, 遣職方郞中陳大德答勞. 大德入境, 所至城邑, 以綾綺厚餉官守者曰 “吾雅好山水, 此有勝處, 吾欲觀之.” 守者喜導之, 遊歷無所不至, 由是, 悉得其纖曲, 見華人隋末, 從軍沒留者, 爲道親戚存亡, 人人垂涕. 故所至士女夾道觀之, 王盛陳兵衛, 引見使者. 大德因奉使覘國虛實, 吾人不知.]

24년(641)에 황제는 우리 태자가 입조하였으므로,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 노고에 보답하였다. (진)대덕이 국경으로 들어와서 이르는 성읍마다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산수를 좋아하는데, 이곳에 경치가 뛰어난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

관리들은 기꺼이 그를 인도하여 놀러 돌아다니며 가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세세한 곳을 다 알게 되었다. 중국 사람으로서 수(隋) 말에 군대에 나갔다가 숨어서 남게 된 사람들을 보면, 친척들의 생사를 말해주어 사람들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남녀가 좌우에 늘어서서 그를 보았으며, 왕은 군대의 호위를 성대하게 하여 사신을 맞이하였다. 대덕은 사신으로 온 것을 기회로 우리 나라의 허실을 엿보았으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설마. 그렇게 많은 사람이 좌우에서 그를 지켜봤는데,

그가 고려의 지리를 염탐하러 왔다는 사실을 고려 사람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우리 조상들, 고려 사람들이 무슨 바보도 아니고. 대접이 극진하긴 극진했던지

고려의 대대로(大對盧)가 진대덕의 숙소로 세 번이나 찾아와서 문안하고 갔다고

《신당서》에 나오기는 한다.


[大德還奏, 帝悅. 大德言於帝曰 “其國聞高昌亡大懼, 館候之勤, 加於常數.” 帝曰 “高句麗本四郡地耳. 吾發卒數萬攻遼東, 彼必傾國救之, 別遣舟師出東萊, 自海道趨平壤, 水陸合勢, 取之不難. 但山東州縣凋瘵未復, 吾不欲勞之耳.”]

대덕이 돌아가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대덕이 황제에게 말하였다.

“그 나라가 고창(高昌)이 망한 것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객사에서 접대하는 것이 평상시보다 더 은근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고려는 본래 사군(四郡)의 땅이다. 내가 군사 수만 명을 내어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은 필시 나라의 모든 힘을 들여 구하려고 할 것이다. 따로 수군을 보내 동래(東萊)에서 출병하여 바닷길로 평양으로 가서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면, 그 나라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산동의 주(州)ㆍ현(縣)이 피폐하여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들을 괴롭히지 않으려 할 뿐이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24년(641)


고창은 지금의 동투르키스탄(중국 신장 위구르자치구) 투르판 분지에 있던 나라ㅡ

한(漢)에게 지배당한 적이 있는 곳인지라 한족 지배층에 의해 중국식 제도가 실시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토착민들은 대부분 투르크계, 돌궐과 같은 계통의 종족들이었던 것 같다.


건무왕의 세자 환권이 당에 들어가 조공할 무렵, 태종은 서역으로 가는 관문ㅡ

흔히 '실크로드(비단길)'로 알려진 무역로를 다시 열고자 했다.

이 무렵 실크로드는 옛날부터 쓰던 길과 새로 개척된 길이 있었는데,

태종은 옛날부터 쓰던 길을 개척하고자 저 유명한 삼장법사 현장을

서역 구법승으로 그 길을 통해 가게 했다. 그런데 새로 개척된 길 한가운데에서

중개무역으로 이득을 보고 있던 고창국의 왕 국문태(麴文泰)는

옛 길이 다시 회복되면 서역과 중국을 오가는 대상들이

자신의 나라를 비켜가게 되어 이득이 줄게 될까봐 현장법사의 구법행을 방해한다.


진대덕이 사신으로 오기 1년 전에, 당 태종은 이곳 고창국을 공격해서 그야말로 '박살'을 냈다.

영류왕이 아무리 당에 대해 저자세 외교로 온건유화책을 편다 해도,

언젠가 당 태종은 고려 역시 고창처럼 '박살'을 낼 요량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고려를 공격하기 위한 수륙양공작전도 머릿속에 들어있었을 것이다.

여기선 단지 그걸 살짝 맛뵈기식으로 비쳐보였을 뿐. 그걸 모른 건무왕만 바보 된 거지 뭐.

 

사신 갔다가 간첩질한 진대덕은 중국 사람에게도 비판받았다.

북송 때의 유학자였던 범조우(範祖禹)라는 사람이 그의 행동을 가리켜서 비판해 말했는데

(그는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과 동시대 사람이다),


진대덕이 사신으로 절역(絶域)에 갔으면 마땅히 덕택(德澤)을 펼쳐 베풀어서, 먼 나라의 사람을 회유하여 성교(聲敎)가 미치는 곳에다 복종하기를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게 했어야지, 도리어 뇌물을 주고 속이면서 외국에 나가 간첩질하면서 사신의 직분을 잃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라고 말이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王命西部大人蓋蘇文, 監長城之役.]

25년(642)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왕은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명하여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건무왕에게 연개소문은 큰 골칫덩어리였을 것이다.

단재 선생께서도 말씀하신 것이지만, 연개소문은 대당강경파,

평양성파 신흥귀척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북쪽으로의 팽창보다는 남쪽으로의 세력확장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던

국내성파 전통귀척들에게 맞서던 평양성파 신흥귀척들은

건무왕이 국내성파의 손을 들어줌으로 해서 수세에 몰렸다.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다음 글은 연개소문이나 평양성파 귀척들의 입장과

그들이 갖고 있던 정세관을 대변해준다.

 

“고구려의 우환이 될 것은 당이지 신라와 백제가 아니다. 지난날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하여 우리 나라의 땅을 침노해 빼앗은 일이 있으나 이제는 형편이 이미 변하여 신라와 백제가 서로 원수로 여김이 이미 깊어져서 여망(餘望)이 없으니, 국가에서 남쪽에는 견제책(牽制策)을 써서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막거나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막거나, 두 계책 중에서 하나를 쓰면 두 나라가 서로 싸우는 통에 우리 나라는 남쪽의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니 이 틈을 타서 당과 결전하여 다투는 것이 옳다. 서쪽 나라는 우리 나라와 언제나 양립하지 못할 나라이니 이것은 지나간 일에 경험하여 보아도 분명한 것이므로 국가에서 왕년에 몇백만 수나라 군사를 격파했을 때 곧 대군을 내어 토벌하였더라면 그 평정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웠을 것인데, 그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잃었음이 이미 뜻있는 이의 통분히 여기는 바요, 오늘날도 좀 늦기는 하였으나 저네의 형제가 화목하지 아니하여 건성은 세민을 죽이려 하고 세민은 건성을 죽이려 하는데, 이연(李淵)이 혼암(昏暗)하여 두 사람 사이에서 어찌하지 못하니 이러한 판에 만일 우리가 대군으로 저네를 치면 건성이 모반하여 우리에게 붙거나, 세민이 모반하여 우리에게 붙을 것이요, 설혹 그렇지 못할지라도 저네가 수의 말년에 우리에게 크게 패하고, 또 여러 해 난리가 뒤를 이어 백성의 힘이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으므로 반드시 전쟁을 할 여력이 없을 것이니 이것도 비상한 좋은 기회이거니와 만일 저네 두 형제 중 한 사람이 패해 죽고 한 사람이 전권(專權)하여 세력이 통일된 뒤에 폐정(廳政)을 고치고 군제(軍制)를 바로잡아 우리 나라를 침범하면 땅의 크기와 백성의 많기가 다 저네에게 미치지 못하는데, 고구려가 무엇으로 저네에게 대항할 것인가? 국가 흥망의 기틀이 여기에 있는데 모든 신하와 장수들이 이를 아는 이가 없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하랴?”

 

보수와 급진, 극우와 극좌의 의견충돌은 요즘에도 자주 볼수 있는 굉장히 짜증스럽고

한편으로는 또 웃긴 코미디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일단 결말을 알고 보는 드라마와 결말을 모르고 보는 드라마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이 다섯 가지 단계 가운데

'위기' 부분에 있어서 각자 보는 느낌이 다른 게 정상이다.

 

지금이야 뭐 결말이 다 났으니 모르지만 연개소문이 살던 시대는 아직 결말은커녕

절정 단계에도 이르지 않은 드라마와 같았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보수적인 국내성파나 급진적인 평양성파도 몰랐고,

온건유화책이나 급진강경책 가운데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떤 것이 그른지,

지금 시기에 들어맞고 들어맞지 않는 전략과 전술은 어떤 것인지

건무왕이나 연개소문조차도 '이거다'하고 확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실권을 쥐고 있고 누가 대립하고 있느냐,

즉 여당과 야당은 분명하게 가려져 있다.

여당 즉 실제로 정치를 행사하는 힘은 건무왕과 국내성파 귀척들에게 있었고,

이들에 맞서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며 사사건건 들고 나오는 것이 연개소문과 평양성파 귀척들.

 

여당은 국가존망과 체제안정의 이유를 들어 온건책을 주장하고,

야당은 국가존망과 함께 국가의 자존심을 들어 여당의 정책에 제동을 건다.

지금도 그렇지만 여당 입장에서 야당은 골치아픈 존재들이고,

야당 입장에서도 여당이랍세 하는 꼬라지는 하나부터 열까지 심정적으로 마음에 안 들지.

일단 자기가 여당이거나 야당인 건 아니니까.

 

건무왕으로서는 '야당' 평양성파 귀척들이 허구한날 고려의 자존심이니,

나라의 존망을 위해 당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가 생각없고

현실파악 제대로 못하는 철부지들이 하는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고,

그들의 영수격(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유난히 튀었음엔 확실한 인물)이었던

연개소문이 퍽이나 골치아픈 인물이었음은 안 봐도 비디오.

그래서 이 참에 서북쪽에 장성 쌓는다고 너 가서 총감독좀 해라 하는 식으로

평양에서 내쫓았다가 나중에는 죽이려고까지 했던 거지.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그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건무왕 자신도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만다. 

 

[秋七月, 百濟王義慈大擧兵, 攻取國西四十餘城. 八月, 又與高句麗謀, 欲取○項城, 以絶歸唐之路. 王遣使, 告急於太宗.]

가을 7월에 백제왕 의자(義慈)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 40여 성을 쳐서 빼앗았다. 8월에 또 고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고 당과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태종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삼국사》 권제5, 신라본기5, 선덕왕 11년(642)


신라는 이 무렵 백제의 맹공을 받고 있었다.

건무왕이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연개소문을 좌천시킨 그 해에만

40개에 달하는 신라의 성을 빼앗고, 신라가 당과 교유할 수 있는 항구인

당항성을 빼앗으려 했다.

 

다행히 신라가 당에 사신을 보내서 SOS를 치는 바람에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대야성이 백제의 손에 넘어갔고, 대야성 성주였던 김품석 부부가

백제 장수 윤충의 손에 살해된다. 문제는 그 김품석의 부인이

신라 김춘추의 딸이었다는 것. 딸과 사위를 잃은 분노에 몸을 떨며,

김춘추는 백제를 반드시 멸망시키고야 말겠다는 원한의 화신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冬十月, 蓋蘇文弑王. 十一月, 太宗聞王死, 擧哀於苑中, 詔贈物三百段, 遣使持節吊祭.]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11월에 태종은 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동산[苑中]에서 애도의식을 거행하고 명을 내려 물건 300단(段)을 주고, 사신을 보내 절부를 가지고 조위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제8, 영류왕 25년(642)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대당 강경파였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살해한다.

《삼국사》 고구려본기의 기록대로라면 재위 25년ㅡ

《삼국유사》 왕력편의 기록대로라면 재위 24년만의 일.

 

안장왕처럼 신하에게 피살당할 줄이야. 권근이라는 양반이 여기서 또 코멘트를 달아놓기를,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 축조를 맡겼을 때부터 쿠데타는 이미 예고된 것이라 했다.


예로부터 시역(弑逆)의 역적[賊]들은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했다. 개소문이 이미 동부 대인이 되었고, 또 장성 쌓는 일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벌주고 상주고[誅賞] 했는데, 그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늘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왕과 신하들이 은미(隱微)한 곳을 살펴 난이 일어나기 전에 제어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구나.


천리장성 축조 임무를 맡아 변방에 두면 연개소문이 감히 딴 마음을 먹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 해도 힘이 약해 아무 것도 못 할 것이라고 여겼던가?

하지만 권근의 말대로라면 이 자는 어찌된 영문인지 거기서 더욱 더 힘을 길러

결국 그 해에 왕을 죽이는 기염을 토하고야 말았으니,

도대체 연개소문이라는 이 자는 어떤 자질을 갖춘 자였던 것일까?

자신의 지지기반이라고는 없는 그곳에서 무리를 모아 쿠데타를 성공시킬 정도라면,

그자의 리더쉽, 사람을 끌어모으는 능력은 상당한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온건론자였던 영류왕이 살해되고 강경론자였던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으면서,

고려와 당 사이의 정세는 겉잡을수 없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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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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