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2>제26대 영양왕(8)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5>제26대 영양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0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6>제26대 영양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1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7>제26대 영양왕(3)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8>제26대 영양왕(4)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9>제26대 영양왕(5)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5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0>제26대 영양왕(6)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6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1>제26대 영양왕(7)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7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2>제26대 영양왕(8)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8
네 차례나 걸쳐, 2백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군대를 동원하고서도 끝내 고려를 무너뜨리지 못한 수 양제는, 죽을 때까지 그 헛된 정복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전국 각지에서 굶주림과 전쟁에 지친 농민들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키는데도, 그러한 혼란스러운 정국을 외면하고서 현실도피에 빠져, 강도(江都, 지금의 양주)로 옮겨가서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가 결국, 영양왕 29년(618)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 의해 피살당하고 만다. 양제가 살해되던 그 순간을 《자치통감》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校尉令狐行達拔刀直進, 帝映窗扉謂行達曰 "汝欲殺我邪?" 對曰 "臣不敢, 但欲奉陛下西還耳." 因扶帝下閣. 虔通, 本帝爲晉王時親信左右也. 帝見之, 謂曰 "卿非我敵人乎? 何恨而反?" 對曰 "臣不敢反. 但將士思歸, 欲奉陛下還京師耳." 帝曰 "朕方欲歸. 正爲上江米船未至, 今與汝歸耳." 虔通因勒兵守之. 至旦, 孟秉以甲騎迎化及. 化及戰慄不能言, 人有來謁之者, 但俯首據鞍稱罪過. 化及至城門, 德戡迎謁, 引入朝堂, 號爲丞相. 裴虔通謂帝曰 "百官悉在朝堂, 陛下須親出慰勞." 進其從騎, 逼帝乘之. 帝嫌其鞍勒弊, 更易新者, 乃乘之. 虔通執轡挾刀出宮門, 賊徒喜噪動地. 化及揚言曰 "何用持此物出? 亟還與手." 帝問 "世基何在?" 賊黨馬文擧曰 "已梟首矣." 於是, 引帝還至寢殿. 虔通ㆍ德戡等拔白刃侍立. 帝歎曰 "我何罪至此?" 文擧曰 "陛下違棄宗廟, 巡遊不息, 外勤征討, 內極奢淫, 使丁壯盡於矢刃, 女弱填於溝壑. 四民喪業, 盜賊蜂起, 專任佞諛, 飾非拒諫, 何謂無罪?" 帝曰 "我實負百姓. 至於爾輩, 榮祿兼極, 何乃如是? 今日之事, 孰爲首邪?" 德戡曰 "溥天同怨, 何止一人?" 化及又使封德彝數帝罪, 帝曰 "卿乃士人. 何爲亦爾?" 德彝赧然而退. 帝愛子趙王杲, 年十二, 在帝側, 號慟不已. 虔通斬之. 血濺御服. 賊欲弒帝, 帝曰 "天子死自有法, 何得加以鋒刃? 取鴆酒來." 文擧等不許, 使令狐行達頓帝令坐, 帝自解練巾授行達, 縊殺之.]
교위(校尉) 영호행달(令狐行達)이 칼을 뽑아 곧장 나아갔다. 황제가 창문을 닫고 행달에게 물었다.
“네가 나를 죽이려느냐?”
“신은 감히 그러지 못합니다. 단지 폐하를 받들어 서쪽(장안)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고는 황제를 침실에서 끌어내렸다. 건통은 본래 양제가 진왕(晉王)이던 시절에 깊이 신뢰한 측근이었다. 양제는 그에게 말했다.
“경은 옛적 나의 사람이 아니던가? 무슨 원한이 있어 배반하는가?”
“신은 감히 배반하지 못합니다. 다만 장수와 병졸들이 돌아가고 싶어하므로 폐하를 모시고 경사로 돌아가려 합니다.”
양제는 말했다.
“짐은 돌아갈 생각이었다. 양곡을 실은 배가 오지 않으니 짐은 지금 그대와 같이 돌아갈 것이다.”
배건통은 군사에게 양제를 지키게 하였다. 아침이 되자 맹병(孟秉)은 정예 기병을 이끌고 우문화급을 맞이하였다. 우문화급은 겁에 질려 말을 하지 못하고, 사람이 와서 배알하면 단지 모자를 벗고 말안장에 기대어 사례할 뿐이었다. 우문화급이 궁성의 문에 이르자, 덕감은 그를 맞이하여 조당(朝堂)으로 인도하여 들어가 승상이라 하였다. 배건통이 황제에게 말하였다.
“백관이 모두 조당에 있으니 폐하께서는 반드시 친히 나오셔서 위로하셔야 합니다.”
그 따르던 기병이 나아가 황제를 핍박하였다. 황제는 군사들의 변을 두려워하여 이를 승인하였다. 배건통이 말고삐를 잡고 칼을 끼고 궁문을 나서니 역적의 무리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땅을 울렸다. 화급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저런 것(양제)을 갖고 나가봤자 어디다 쓰겠어? 빨리 죽이고 돌아갈 것이지.”
양제가 물었다.
“세기(世基)는 어디 있느냐?”
그러자 적당(賊黨) 마문거가 말하였다.
“이미 효수하였소이다.”
이에 황제를 침전으로 끌고 갔다. 건통과 덕감 등은 날카로운 칼을 뽑아들고 시립(侍立)했다. 황제는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무슨 죄로 이런 일을 당하는가?”
문거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종묘를 버린채 순행이 그치지 않았고 밖으로는 대외원정에 바빴으며, 안으로는 사치와 음락이 극에 달하여, 장정들은 칼날과 화살에 죽었으며 여자들은 쓰러져 도랑을 메우고 있습니다. 온 백성이 생업을 잃었고,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났는데도 간신을 가까이 하고 올바른 말을 멀리 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백성들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실로 내 책임이다. 그러나 너희도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지 않았더냐. 어찌 이런 짓을 하느냐. 이번 일은 누가 주모한 것이냐?”
덕감이 말하였다.
“천하 사람이 함께 원망하고 있습니다. 어찌 한 사람 뿐이겠습니까?”
화급이 재차 봉덕(封德)으로 하여금 양제의 죄를 열거하게 하였다. 양제가 말했다.
“경은 선비인데, 어찌 이런 짓을 하는가?”
봉덕은 얼굴이 붉어지며 뒤로 물러섰다. 양제가 아끼는 아들인 조왕(趙王) 고(杲)는 열두 살이었는데 양제 곁에서 큰 소리로 서럽게 울었다. 건통이 목을 베어버렸다. 그 피가 양제의 옷에 튀었다. 역적들이 양제를 시해하려 하니 양제는 말했다.
“천자에게는 천자에 맞는 죽음 방식이 있다. 칼로 베어서야 되겠느냐. 짐주(鴆酒, 독주)를 다오.”
문거 등은 허락하지 않고 영호행달을 시켜 양제를 자리에 앉히고, 양제가 지니고 있던 비단 두건을 풀어 영호행달에게 건네주었다. 행달은 그것으로 양제를 목졸라 죽였다.
《자치통감》 권제185, 당기(唐紀)제1,
고조신요대성광효황제(高祖神堯大聖光孝皇帝) 상(上)의 상(上), 무덕(武德) 원년 무인(618)
이때 양제의 나이는 50세. 오늘날 그의 궁전이 있던 자리는 지금은 갈아엎어져서 차밭으로 변하고, 양제의 무덤은 벼락이 떨어져서 봉분이 두쪽으로 갈라진 것을 군데군데 훼손시켜놨으니, 중국인들이 양제를 얼마나 증오했는가는 이러한 사례를 보아도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수 양제는 진시황제와 더불어, 중국 최악의 폭군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와 맞섰던 대원왕과, 대원왕의 신하이자 장수로서 수의 군대를 살수의 물고기밥으로 만든 주역, 을지문덕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름을 떨치고 있으며, 글 잘 하는 문인으로서든, 전략과 전술에 능한 무인으로서든,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의 이름을 추앙해 마지않고 있다. 부식이 영감이 《삼국사》 을지문덕열전 사론에서 말하기를.
[論曰: 煬帝, 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논하노니, 양제(煬帝)가 요동 전쟁[遼東之役]에 보낸 군사는 전에 유례없이 많았다. 고려는 한 귀퉁이의 작은 나라로서 능히 이를 막아내어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다 섬멸한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전(傳)에
『군자가 없으면 어찌 능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으랴?』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삼국사》 권제44, 열전제4, 을지문덕
문(文)으로서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한 것은 그가 수의 장수 우중문에게 보냈던 '여수장우중문시'. 전편에서 말했듯 고려조의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그의 시를 가리켜 실로 절묘한 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조선조 서거정 역시 《필원잡기》에서 "일찌기 고구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준 시는 천하의 명시"라고 했다. 무(武)로서는 적은 군사를 가지고도 수의 30만 대군을 격파한 그의 무공과 전술이었으니, 조선조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했던 최보라는 학자는, 그를 가리켜 이렇게 평했다.
예로부터 병가(兵家)의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장군의 현명함에 있다. 전진[苻秦]이 백만 군사로 진(晋)을 쳤을 때, 사현(謝玄)은 8만의 군사로 강을 건너 한 번 싸워 진의 군사들이 감히 지탱하지[枝梧] 못했으니, 이것은 진의 군신들이 훌륭한 장수를 얻어 임기응변하여 승리할 계책을 얻었기 때문이다.
양제[隋氏]는 천하를 통일하여 그 군사의 강함과 나라의 부유하고 흥성함[富盛]이 전진의 몇 배나 되었지만, 양제가 천하의 군사를 출동시켜 작은 나라 하나를 정벌하는데 고금을 막론하고 군사를 이렇게 많이 동원한 적은 없다. 고구려의 계책으로서는 속수무책으로 항복을 애걸하기에도 바빴을텐데, 을지문덕은 몹시 혼란하고 어수선한 와중임에도 조용히 맞설 계획을 세우고[籌畫] 틈을 노려서, 마치 마른 나무를 꺾고 썩은 나무를 뽑아버리듯 힘껏 공격하여, 수 양제를 크게 깨뜨려 돌아가게 해서 천하의 비웃음거리로 만든 것이다.
대개 고구려 땅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데다, 강좌(江左)ㆍ서릉(西陵)ㆍ거록(鉅鹿)ㆍ초성(譙城)ㆍ비수(淝水) 같은 요새[形勝]도 없고, 사안(謝安)이나 왕도(王導)처럼 처음부터 양성해놓은 군사도 없었는데(?) 평양의 한 고군(孤軍)으로서 천하 대병과 대적해 결국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으니, 사안과 비교해도 오히려 문덕이 장하다. 문무 재능이 뛰어나고 지혜와 용맹이 모두 갖추어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이후 비록 당 태종의 신통한 무덕(武德)으로도 안시성 싸움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요(遼)ㆍ금(金)ㆍ몽골의 흉악한 무리들도 우리 나라에 와서 그리 큰 해독을 끼치지 못했으며, 진샨(金山)ㆍ진쉬(金始)ㆍ카이단(哈丹)ㆍ홍건적[紅寇]의 군사가 모두 우리 나라에서 섬멸되었으니, 저들이 천하 후세에 우리 동방을 강국으로 여겨서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했던 것은 문덕의 남긴 공적이 아니겠는가?
을지문덕이 수의 침공을 멋지게 격파함으로서 우리 나라는 수의 위협에서 벗어날수 있었고, 수의 백만 대군이 고려라는 조그만 나라에 부서지는 것을 보고서 중국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고려라는 저 조그만 바위 앞에서, 태산도 무너버릴 듯한 거대한 파도도 끝내 물보라처럼 산산이 흩어져버리는 현실을 보면서, 중국인들은 고려에 대한 알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을 것이다. 실제로 《자치통감》에 보면 당시 중국에서 유행했던 노래, 오늘날 중국 선수들이 우리나라 선수들에 대해 가진다는 '공한증(恐韓症)'의 원조격이라 할만한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狼死歌, 고려 가서 개죽음하지 말자)'라는 노래의 가사를 실어놓고 있다.
長○侵天半 긴 창은 하늘을 덮고
輪刀耀日光 칼과 전차는 햇빛에 번쩍이네
上山吃獐鹿 산 위에서는 사슴과 노루를 잡지만
下山吃牛羊 산 아래에선 소와 양을 잡는다네.
忽聞官軍至 문득 들으니 관군이 왔다는데
提刀向前蕩 창검으로 고려를 친다지.
譬如遼東死 허나 요동에 가면 오직 죽음뿐
斬頭何所傷 온몸이 찔리고 머리가 잘릴 것을...
조선조 인조 을유년(1645)에 이르러 평양에 그의 사당인 충무사(忠武祠)가 지어졌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후 단재 선생께서 을지문덕 장군의 전기를 모아 <을지문덕전>을 지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장군은 구국의 영웅으로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비록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태어난 해도, 죽은 해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분은 진실로 우리 역사의 영웅이시며, 오늘의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 해도 국민들 모두가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존경해 마지않을, 2천년래 제일의 위대한 장군이셨다. 일찌기 북방의 초원에 살면서 중원을 침노해 지배했던 이민족들은, 그 문화에 동화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한족이 되어버렸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더, 명제 하나를 추가해야 되겠다.
우리 땅을 침노할 목적으로 들어오는 한족들은, 결코 우리를 동화시킬 수도 지배할 수도 없다.
그들은 이 땅을 무덤으로 삼게 될 것이고, 그들의 죽은 시체를 이 땅에서 묻게 될 것이다.
세상 나라로서 우리를 침략하는 자들은 모두 비참한 운명을 맞아 멸망당할 것이다.
세상 모든 나라가 우리를 침범했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그런 위대한 나라에 태어나 살다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텐데, 왜 하나도 안 기쁜거지?
[廿六年秋八月癸酉朔, 高麗遣使貢方物. 因以言 "隋煬帝興卅萬衆攻我, 返之爲我所破. 故貢獻俘虜貞公, 普通二人, 及鼓吹弩抛石之類十物幷土物駱駝一疋.]
26년(618) 가을 8월 계유 초하루에 고려가 사자를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그리고 말하였다.
"수의 양제가 30만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쳤다가 오히려 우리 나라에게 패했습니다. 지금 포로인 정공(貞公)과 보통의 두 사람 및 북과 피리, 쇠뇌, 투석 같은 열 종과, 아울러 토산물과 낙타 한 필을 바칩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2, 추고기(推古紀, 스이코키) 26년(618)
이것은 고려가 그들이 대수전쟁에서 이기고 얻은 전리품 가운데 일부를 보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인데, 이것은 전쟁 이후의 달라진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혜자가 귀국하게 된 요인 중에는 영양왕의 필요성이나 그의 임무가 완수된 것도 있었지만, 왜국 내부에서 외교방침을 고려와 백제 중심에서 신라와 수까지 포함시켜 다면외교를 펼치기 시작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말하자면 고려의 가상적국에 대해서도 왜가 우호의 손길을 뻗기 시작한 것이다.
수를 이어 새로이 당이 일어선 가운데, 왜국은 꾸준히 견수사를 보내 직통으로 대륙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려 했지만, 그 길목이었던 우리 나라 남해와 서해안은 신라가 장악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신라와 계속 대립하는 한 왜국으로서는 그들의 바닷길이 결코 편안하리라는 보장을 얻을 수 없었다. 왜왕 무가 유송에 보낸 국서에서 토로한 '고구려가 백제와 왜의 뱃길을 막던 상황'이 불과 200년만에 뒤집혀 신라가 왜국의 뱃길을 막는 상황으로 바뀌어버린 현실 앞에서, 선진문물 수용과 그것을 통한 중앙집권제도 정비를 위해서라도 더이상 신라와 살벌한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고려나 백제와의 관계에만 매달릴 수 없었던 왜국은 고려의 가상 적국인 신라와도 수교하는 것을 택했다.
고려로서는 우호 하나를 잃는 셈이었다. 왜가 고려보다 신라에 비중을 두는 것을 보고 태왕은 혹시나 왜가 고려나 백제 대신 신라와 연계되지 않을까 걱정했겠지. 우리와 놀든 안 놀든 아쉬울 건 없는데 우리 원수하고 같이 놀면 그건 위험하잖아. 고려로서는 그들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왜에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수와의 전쟁에서 이겨서 얻은 온갖 전리품을 '특별전시회' 비슷하게 해서 보낸 거지. "이거 왜 이래, 나 아직 안 죽었어!" 하고 과시할려고.
[二十九年, 秋九月, 王薨. 號曰嬰陽王.]
29년(618)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영양왕(嬰陽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영양왕(嬰陽王). 그의 재위기간은 《삼국사》 본기에서는 29년,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28년이다. 그가 승하했을 때 고려의 국인은 왕에게 '영양(嬰陽)'이라는 시호를 지어올렸다. '영(嬰)'은 네이버 한자사전 검색해보니까 뭐 '어린아이', '갓난아이', '연약하다'라는 뜻 말고도 '두르다', '목에 걸다', '잇다', '지니다', '더하다', '닿다', '안다'라는 뜻이 있더라. '양(陽)'은 '양지', '음양' 할때 그 '양'자니까 '따뜻하다', '밝다', '드러나다', '선명하다' 해서 고려 선대의 영광스럽게 '빛나는(밝은)' 역사를 '이은(재현시킨)' 왕이라는 뜻의 시호, 선대의 영명한 군주ㅡ광개토태왕이나 장수왕의 업적에 빗대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조상의 업적을 다시 한번 재현시킨 그를 향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음이었을 것이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2>제26대 영양왕(8)|작성자 광인
'고구려 > 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4>제27대 영류왕(2) - 광인 (0) | 2012.02.02 |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3>제27대 영류왕(1) - 광인 (0) | 2012.02.02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1>제26대 영양왕(7) - 광인 (0) | 2012.02.01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0>제26대 영양왕(6) - 광인 (0) | 2012.02.01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9>제26대 영양왕(5) - 광인 (0) | 2012.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