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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주생활
부경(桴京)
집필자 김길식(金吉植)
덕흥리 고분벽화 부경
정의
고구려에서 곡식 등 농산물을 저장하던 고상창고 건물.
개관
3세기 후반에 기록된 중국 역사책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高句麗條에 의하면 “나라에 큰 창고가 없으며, 집집마다 각기 조그만 창고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부경桴京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에서는 부경이라고 부르던 작은 창고 건물이 집집마다 딸려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높은 마룻대가 설치된[桴] 창고[京](본래 창고를 의미)를 의미하는 부경은 곧 고상창고高床倉庫였음을 알 수 있다.
부경과 같은 고상창고 건물은 이미 청동기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후 초기 철기시대, 원삼국(삼한)시대,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고려·조선·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벼농사를 비롯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하여 잉여생산물이 생기게 됨에 따라 효율적이고 저장·관리할 수 있는 시설인 창고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저장창고 시설은 주로 땅을 깊게 파서 만든 수혈창고가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곡물 등 농업생산물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통풍이 잘되고 다른 동물로부터의 해害를 방지할 수 있는 창고시설인 고상창고가 효율적이었다. 청동기시대에서 삼한시대까지는 마을 안 고지대의 한쪽 공간을 구획하여 여러 동의 고상창고를 지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차츰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고 개별 가구 단위로 생활을 영위하게 됨에 따라 공동 창고군 외에 개별 가구 단위의 창고시설도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이 정립되어 있던 삼국시대에 개별 가구 단위의 창고로 부경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고대국가이든 창고시설은 국가의 형성·발전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는 중요한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0 직관지職官志에는 경椋이 경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 경은 일본어 경椋, クラ이 그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의 수도인 지안集安 일대에는 당시 개별 가옥이나 본채 옆에 2층으로 된 작은 창고가 있었다. 이러한 고상창고는 얇은 목재를 가로 또는 세로로 엮어서 다락식 창고 형태로 지은 것이다. 현지에서는 옥미창玉米倉 혹은 포미창包米倉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주로 벼를 저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옥미창은 특히 만보정묘구萬寶汀墓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옛 강서군江西郡 덕흥리 고분벽화에 보이는 2층 다락집도 이와 같은 형태의 창고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이 벽화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도 묘사되어 있어 부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옛 지안 도읍기의 고구려 영토인 중국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 지역에는 집집마다 부경과 같은 고상창고가 설치되어 있다. 2층에는 벼나 옥수수 등 농산물이 보관되고, 그 아래층에는 돼지우리나 소 외양간 등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아마 고구려 당시에도 이와 같은 형태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한편 고구려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농업 생산력이 그리 높지 않아 전쟁을 통하여 식량의 많은 부분을 다른 나라로부터 약탈하여 해결하였으며, 약탈해 온 식량을 보관하는 작은 창고를 마을마다 만들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특징 및 의의
고구려에서는 부경과 같은 고상창고 외에도 집안의 미선구麻線溝 제1호묘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 귀틀집(고상식건물) 형태의 목조건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상창고보다 훨씬 큰 대형 창고도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본의 쇼소인正倉院 쌍창雙倉과 같은 구조로, 일본의 국창國倉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형태의 창고는 곡물을 저장하는 부경과 같은 용도가 아니라 국가적으로 중요한 물품·보물 등을 보관하는 특수 창고일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고상창고인 부경은 그 후 백제에도 영향을 미쳐 백제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창고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백제에서는 창고 관련 기록이 문헌과 부여 쌍북리에서 출토된 목간에 기록되어 있어 창고 형태와 창고 운영의 실상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창고 사무를 맡은 내관內官 소속의 관청 이름을 경부椋部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부경을 차용하여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 『북사北史』 권94 백제전百濟傳에는 이를 내략부內掠部·외략부外掠部라 하였으나 『한원翰苑』 권30 백제조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 각기 내경부內椋部·외경부外椋部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부가 올바른 명칭인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가야에서는 부경과 같은 창고 명칭이 나타나지 않지만 신라토기·가야토기 가운데 마룻대를 4개 또는 6·9개가 설치된 고상창고 모양의 토기가 종종 출토되고, 취락 발굴 조사에서 기둥구멍이 4개 또는 6·9개를 설치한 고상창고 건물이 많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부경과 같은 형태의 고상창고가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고 모양 토기에 표현된 고상창고 구조는 원통형의 기둥 상부에 나무로 된 마룻바닥이 높게 설치되고 사방 벽이 판자를 세워 연결하여 내부 공간을 만들었다. 상부의 지붕은 초가 또는 경초를 가지런히 이은 다음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끈으로 엮어 묶은 구조가 일반적이다. 창고의 한쪽 면에는 한 군데 또는 두 군데에 두 개 1조의 문짝을 설치하여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으며, 상면床面에서 바닥으로는 나무 사다리를 연결하여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나무 사다리는 원통형 나무에 디딜 수 있는 홈을 파서 만든 사다리와 두 개의 나무 지주 사이에 같은 간격으로 발판을 설치하여 만든 일반 형태 등 두 종류가 확인된다. 한편 마룻대인 기둥에는 쥐 등 동물의 접근을 막을 수 있도록 독액을 바르거나 마룻바닥과의 경계부에 둥근 반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부경과 같은 고상창고에서는 농사와 농산물 저장과 관련된 의례도 설행되었다. 고상창고를 짓기 전에 마룻대를 설치하기 위하여 판 기둥구멍에서 인위로 매납한 토기편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창고 건물이 견고하게 유지되기를 바라는 기원 의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민속례를 통하여 고상창고 안에서도 의례가 설행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창고 안에 농사신 또는 곡물신을 상징하는 벼이삭 묶음 등을 걸어 놓고 제사 의례를 거행하는 등이 그것이다. 이 경우는 특별하게 해당 창고가 이듬해에 파종할 튼실한 종자를 보관하는 잘 보관하여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참고문헌
北史, 三國史記, 三國志, 翰苑, 고구려의 부경(신형식, 동양학26,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1996), 부경고(주남철, 민족문화연구27,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994), 百濟の掠及び掠部(稻葉岩吉, 釋椋,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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