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7205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원조를 아십니까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 31] 항일지 <대한매일신보>에 내걸린 이색 간판은 무엇?
12.02.14 09:20 ㅣ최종 업데이트 12.02.14 09:20 정운현 (jwh59)
▲ 1월 10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정연주의 증언> 출판 기념 저자와의 대화 '이명박 정권은 왜 정연주를 제거하려 했는가?'가 열리고 있다. ⓒ 권우성
이명박 정부는 집권 후 방송장악을 위해 그 첫 타깃으로 KBS를 지목하고는 당시 정연주 사장을 내쫓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현 정권은 방송통신위원회, 국세청, 국정원, 검찰 등 권력기관을 총동원해 그에게 배임죄를 뒤집어 씌워 파렴치범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정 전 사장은 2008년 8월 19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배임)'으로 기소되었고 결국 사장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5개월이 흐른 지난달 12일, 대법원은 그에게 최종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정 전 사장은 그간 자신에게 덧씌워졌던 배임 혐의를 말끔히 벗었습니다. 한마디로 사필귀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지난 2009년 9월부터 <오마이뉴스>에 '정연주의 증언'이란 제하의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그 내용은 그가 이명박 정부 들어 KBS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과정과 그 이후의 이야기들을 담담히 그려낸 것으로,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의 'KBS 장악사(史)'라고 하겠습니다.
정 전 사장은 지난 2월 7일자 <오마이뉴스>에 '정연주의 증언' 제73화를 실었는데 그 제목이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부끄러웠습니다/MBC-KBS 후배님, '분노의 화살'이 되어야"였습니다( 기사 보기). 40년 전, 취재차 모교를 찾은 그가 '개'와 동급 취급을 받았으니 그 심경이 과연 어떠했으리오.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40년 전인 1972년 10월 1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른바 '유신헌법'을 공포했습니다. 이후 세상은 그야말로 암흑천지가 돼버렸습니다. 국회가 해산되면서 모든 정치활동은 중단됐고, 비판자들에겐 무자비한 탄압과 폭력이 가해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언로가 막혀 세상은 그 생생한 실상을 알지 못했습니다. 야당도 언론도 침묵하던(혹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그나마 목소리를 내는 곳은 대학뿐이었습니다. 20대 신참기자였던 그는 모교의 데모 취재를 위해 모처럼 모교를 찾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사건기자로 대학 데모를 '취재'했습니다. 말이 '취재'지 기사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크낙새 한 마리 나타났다고 1면 머리기사로 다루면서 데모 기사나 억울하게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신문사 앞으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와 "잠에서 깨어나라"고 외치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모교에서 데모가 있었습니다. 좀 늦게 현장에 갔더니 데모는 이미 끝나고 학생들은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농성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성명서도 얻고, 이야기도 좀 들어보려고 농성장에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농성장 입구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 하늘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나 자신이 부끄럽고, 기자라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분노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렇게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낀 것은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동료·선배들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분노가 쌓여 마침내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이 자유언론의 횃불을 들게 되었습니다. 자유언론을 되찾아 오기 위해, 아니 그 이전에 무엇보다, 다 망가져 버린 우리의 자긍심을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국민들로부터 쫓겨나는 MBC 기자들
▲ MBC노조 파업 닷새째인 3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예술극장 앞에서 열린 '죽은 공영방송 MBC를 추모하는 노제'에 참석한 정영하 MBC 노조위원장이 헌화를 하고 있다. ⓒ 유성호
정 전 사장이 이 글을 쓴 계기는 40년이 지난 지금 바로 그같은 현상이 MBC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11월 하순 무렵, 한미FTA 비준안 날치기 처리에 반발한 시민들의 시위현장을 취재하던 MBC 기자와 카메라 기자들이 현장에서 시위대들로부터 욕설과 함께 취재거부를 당한 것입니다.
이유는 MBC가 현 시국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극한 이념대립을 보이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진보매체 기자들은 보수단체 집회에서, 반대로 보수매체 기자들은 촛불집회 등 진보단체 집회에서 취재거부를 당한 적은 더러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MBC를 향한 시민들의 비난이나 취재거부는 그 수준을 넘고 있습니다. 이성재 MBC 카메라 기자는 MBC 인트라넷 '자유발언대'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지난 25일(작년 11월 25일) 취재한 선후배들이 가져갔던 카메라가 밀쳐지고 트라이포드는 걷어차였다"며 "이제 우리 몸이 걷어차이고 맞는 일만 남았다"고 개탄했습니다.
이 기자는 또 "MBC 로고가 새겨진 ENG카메라를 들고는 도저히 취재가 불가능해 아예 로고가 없는 6mm 소형캠코더를 들고 가서야 근접 취재가 가능했고, MBC 차량은 시민들의 항의 때문에 근처에 주차하지도 못해 아예 시청에 숨어(주차)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기자 글에 현아무개 카메라 기자도 답글로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했는데, 그의 입에선 '자조'와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최근 취재현장을 가면) 카메라 뒤에서 들려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하나같이 정곡을 찔러 옵니다. '식충이들 밥벌이 하러 왔나?'라는 말에는 도저히 변명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MBC에, 그토록 바라던 카메라 기자가 되어 최소한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잡으며 살아왔는데, 구악질을 한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MBC 카메라를 지니고 있는 제가 부끄러워질까요? 자조 섞인 한숨만 계속 내쉽니다. 5공 때처럼 이제 대놓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나의, 우리의 MBC가 변해가는 것에 대해 우리 스스로 아무 말도 못하고 지내는 현실이 너무도 개탄스러웠을 것입니다.
신문사를 제 집 드나들 듯 한 보안사·안기부 요원들
MBC 기자들이 취재거부를 당하는 것은 1987년 이후 25년 만의 일인데 거기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용마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면, MBC는 청와대 내곡동 사저, 10·26 보궐선거, 한미FTA 날치기, < PD수첩 > 판결, 반값 등록금 문제, KBS 도청의혹 등 굵직굵직한 사안들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김재철 사장이 '투입'된 뒤부터는 정권의 압력에 굴종했던 과거로 퇴행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기자들은 한직으로 내쫓겼으며, <100분토론>은 자정 이후 시간대로 밀려났고, <뉴스 후>는 폐지되었습니다. 또 MBC의 간판프로인 < PD수첩 > 역시 솎아내기 인사와 잦은 아이템 검열로 무력화되었습니다.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 언론은 수차례에 걸쳐 탄압과 굴종을 강요당했습니다. 그에 저항하는 언론인은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에 끌려가 두들겨맞거나 아니면 거리로 내몰렸습니다. 언론사 통폐합, 언론인 강제해직 등 사상 유례 없는 언론탄압을 자행한 5공화국 말기의 일입니다.
당시 보안사(현 기무사 전신)나 안기부 요원들은 신문사나 방송사를 마치 제 집 드나들 듯 하면서 신문사 편집국의 동향을 체크하고 기자들을 감시하였습니다(압력의 강도나 방식은 다르지만 제가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하던 2000년대 중반에도 국정원 '조정관'들이 언론사를 출입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수시로 간부들을 만나 압력을 넣기도 하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언론사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를 참다 못한 몇몇 신문사 기자들이 편집국 입구에 팻말을 하나 써서 붙였습니다.
'기관원 출입금지'.
기자가 취재원들로부터 불신을 당해 취재현장(혹은 출입처)에서 취재거부를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기자들이 특정 외부인의 신문사 출입을 금지시킨 경우도 있었습니다. 즉 거부 대상은 다르지만 누군가를 '출입금지' 시킨 점에서는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과 개는 출입금지" 간판... 이토 통감 죽자 '잔치'
▲ <대한매일신보> 편집국 직원들이 논의를 하는 장면. 갓을 쓴 기자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 자료사진
그렇다면 우리 언론계에서 '○○○○ 출입금지'라고 처음 써 붙인 경우는 언제, 어떤 일로, 또 어디서였을까요? 즉 '원조'는 어디일까요? 결론부터 앞세우면 구한말 항일지인 <대한매일신보>가 바로 원조랄 수 있습니다.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대한매일신보>에서 있었던 비화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 영국인 베델이었습니다. 고교 졸업 후 15세이던 1888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상업에 종사하던 베델은 1904년 3월 4일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으로 임명돼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우연히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해 4월 14일 일제의 방화로 경운궁(현 덕수궁)이 불타자 '일제의 방화로 불타버린 경운궁의 화재'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송고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데일리 크로니클> 역시 친일성향의 매체였던 탓에 이 일로 선생은 특별통신원에서 해임되었고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런데 베델은 영국이나 일본으로 되돌아가지 않은 채 한국 땅에 남기로 정했습니다. 그러고는 당시 항일지식인인 박은식, 양기탁,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새 신문 창간에 뜻을 모으고는 그해 7월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당시 고종황제는 선생에게 '배설(裵說)'이라는 한국 이름을 하사하였고 그밖에 여러 가지 편의도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황성신문>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항일지로 불렸습니다. 국한문판, 한글판은 물론 자매지로 영문판 <The Korea Daily News>도 같이 발행했는데, 3종을 합해 발행부수가 1만 부에 달하는 당시 최대의 신문이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가 짧은 기간에도 이같은 급성장을 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발행인인 베델의 국적이 영국이었기에 통감부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고, 따라서 <대한매일신보>는 언론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베델은 이의 무효를 주장하는 사설을 실었으며, 1907년 헤이그특사 중 이준 열사가 헤이그 현지에서 순국하자 이를 호외로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금기를 깬 파격적인 보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이나 정보원들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대한매일신보>는 어느 날 사옥 앞에 이색 간판을 하나 내걸었습니다.
'일본인과 개(犬)는 출입금지'.
'을사늑약' 체결로 사실상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그 시절에 이런 간판을 신문사 정문에 내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일제의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편집책임자로 있던 양기탁 선생은 사옥 2층에 태극기를 내걸고 만세를 부르며 축하잔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취재 현장에서 '개' 취급당하는 기자들, 더 이상은 없기를
▲ 지난 2008년 베델 서거 99주기 추모식 후 한 참배객이 베델의 묘비에 헌화하고 있다 ⓒ 정운현
그러나 이후 베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고 자금난 등으로 신문사가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이같은 기개는 결국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1909년 5월 1일 베델이 고문 후유증으로 서거한 후 친일 성향의 인물들로 사장이 교체되었고, 또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국권이 피탈되자 결국 '대한' 두 자를 떼어내고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베델은 37세라는 길지 않은 삶을 살았는데 생애의 마지막 5년을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죽음에 앞서 베델은 유언을 한 마디 남겼는데 그 내용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를 영생케 하여 조선의 백성을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부음을 전해들은 고종 황제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천하박정지여사호, 天下薄情之如斯呼)"라며 애통해했습니다.
1968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했는데, 고인의 묘소는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 초입에 마련돼 있습니다. 한동안 그를 잊고 지내다가 그의 사후 90년이 돼서야 민간 차원에서 기념사업회를 꾸려 매년 5월 초에 추모행사를 열면서 '은인'에 대한 체면치레를 겨우 하고 있을 뿐입니다.
최근 이근행 MBC 해직PD와 노종면 YTN 해직기자 등이 주도하여 제작한 <뉴스타파>가 언론계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뉴스타파>는 지난달 27일 첫 방송에서 지난 10·26 서울시장 재선거 때 빚어진 투표소 변경내역 집중취재를 비롯해 최근 사퇴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국회 위증 의혹, 현 정부가 정권 말기에 거액의 무기 도입을 추진한 배경 등에 대해 집중보도해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MBC 노조는 인터넷 유튜브를 통해 <제대로 뉴스데스크>를 9일 첫 방영한 바 있습니다. 이는 MBC의 기존 <뉴스데스크>와 차별화 된 것으로, 그동안 방송되지 못한 정부비판 리포트들을 대거 담아 보는 이의 주목을 끈 바 있습니다.
끝으로, 이제부터라도 MBC가 언론 본연의 역할을 다해주길 기대하며, 아울러 다시는 MBC 기자들이 취재현장에서 개 취급당하며 쫓겨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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