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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2>제20대 장수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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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아서 장수왕이라. 어찌 보면 '이름값' 나가는 아버지보다도 더 많은 업적을 남긴 그 남자. 

 

[長壽王, 諱巨連<一作璉>, 開土王之元子也. 體貌魁傑, 志氣豪邁. 開土王十八年, 立爲太子, 二十二年, 王薨, 卽位.]

장수왕(長壽王)의 이름은 거련(巨連)<또는 연(璉)이라고도 썼다.>이고 개토왕(開土王)의 맏아들이시다. 신체가 크고, 기개는 호탕하고 뛰어났다. 광개토왕 18년에 태자로 삼았고, 22년에 왕께서 돌아가시자 즉위하셨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거련이라는 것은 《삼국사》에 보이는 휘(諱)이고, 연(璉)이란 외자이름은 중국에서 적은 동이열전의 내용에서 많이 나온다. 지안의 국내성에 있던 수도를 지금 북한의 평양으로 옮겼으며, 그 여세를 몰아서 백제를 쳐서 백제가 갖고 있던 한강 유역의 땅을 공취하며, 중국 왕조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어쩌면 선대 광개토태왕보다도 더 강대한 고구려를 이끌었던 시대. 또한 이 때에 이르러, 슬슬 초기 고구려 때부터 함께 쓰여왔던 '고려(高麗)'가 고구려의 새로운 공식 국호로서 대두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元年, 遣長史高翼入晉奉表, 獻赭白馬. 安帝封王高句麗王樂浪郡公.]

원년(413)에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진(晉)에 보내 표(表)를 올리고, 붉은 무늬있는 흰 말[赭白馬]을 바쳤다. 안제(安帝)가 왕을 고구려왕(高句麗王) 낙랑군공(樂浪郡公)으로 봉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중국의 《남사(南史)》 권79 동이열전 고구려조에는 '고구려왕'이 아닌 '고려왕'이라고 되어있다. 즉위하자마자 장사 벼슬을 맡고 있던 고익을 진에 보내서 표와 함께 몸에 붉은 무늬가 있는 흰말, 자백마를 바쳤을 때, 진의 안제는 거련왕에게 '책봉' 명목으로 '고려왕 낙랑군공'이라는 칭호를 보냈고(물론 '조공'이라는 형식에 따른 '사여'라는 합당한 답례도 따랐겠지), 그것을 부식이 영감이 '고구려'로 고쳐서 적어놓은 것이다.

 

<덕흥리 고분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의 말>

 

고구려야 뭐, 중국에 비한다면 말은 길가의 돌멩이보다도 더 많았을 테니까.

 

광개토태왕은 22년 동안 재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가 활동하던 무렵의 국제정세는 태왕이 가진 이상과 구도를 실현시키기에는 아직 미흡한 점이 많았다. 중국만 하더라도, 5호 16국이 발호하는 상황 속에서 남조의 한족 왕조였던 동진은 제대로 기를 못 펴고 있었고, 백제는 여전히 고구려에 복수할 기회만 별렀다. 고구려 또한, 광개토태왕이 재위 중에 아무리 내부를 잘 다져놨다 해도 나라와 나라 사이의 질서를 움직일만한 힘은 갖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게 될 경기만 일대와 서해, 동해 중부의 해상권을 확실하게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 그리고 태왕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모두 수행하는 건 그 아들 거련왕에게 맡겨진 숙명이었다. 《진서》에는 이 해 12월에 고구려에서 또한번, 진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고 전하고 있다.

 

[二年, 秋八月, 異鳥集王宮.]

2년(414) 가을 8월에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여들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광개토태왕이 죽고 2년이 지나 태세 갑인ㅡ거련왕 재위 2년에 해당하는 서기 414년, 가을 9월 29일 을유(乙酉). 태왕의 시신은 산릉으로 옮겨졌고, 각력응회암이라는 자연석을 다듬어 높이 639cm에 한 변 길이 135∼200cm나 되는 네모기둥 모양의 『광개토태왕릉비』가 세워졌다. 사면에 폭 14cm 전후의 괘선을 그어 원고지처럼 만들고 그 안에 1775자나 되는 글자를 새겼다. 다들 비문의 내용이나 글자 하나의 획을 두고 말이 많다만, 정작 논의되었어야 할 것은 '왜 이런 커다란 비석을 만들어가며 태왕의 업적을 새겼을까' 하는 것이다. 보통 이렇게 말하면 '태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이 만든 것인줄 알면 그만이지 미친놈처럼 뭐하러 그런 걸 따지나'하고 말하실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목적만큼이나 비석의 규모와 내용은 태왕의 업적을 충분히 표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비석'의 형상과 『광개토태왕릉비』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여기서는 그것을 논할 것이다.

 

망자의 '묘비'를 만들게 된 유래는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한조에서 기원을 찾는다. 비석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 비신과 '다리'라고 할 수 있는 받침대 즉 대석(臺石), 그리고 비석 위에 올려놓는 '머리'.(머리는 흔히 용이나 이무기, 범을 조각한다) 크기도 높이가 6자(약 180cm)에 폭은 2자(약 60cm). 이나마 남북조시대에 커지기는 했지만 7, 8자를 넘지 못한다. 『광개토태왕릉비』에 비하면 애기 수준이다. 그러다가 남북조시대에 묘비를 금지하면서 중국에서는 비문을 단축하고 형태를 줄인 네모꼴 판석을 무덤 안에 같이 묻었다. 이것이 '묘지(墓志)'다. 묘비와 묘지의 차이는 고인의 무덤에 같이 묻느냐 아니면 무덤 바깥에 세워놓느냐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능묘와 가까운 곳에 있고 망자의 업적을 기록한다는 암묵적 양해가 이루어진다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형식이나 형상 같은 것에 구애받을 필요가 '있다'. 텍스트 전달이나 수신 조건을 규정하는 불가결의 요소이자 그것을 직접 작성한 저자의 의도와 목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를테면 같은 편지라고 해도 친한 사람한테 보내는 편지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는 같은 사람이 적어도 편지지의 크기나 재질, 들어가는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지금 중국 사학계나 과거 일본 식민사학계의 맹점은 고대의 텍스트, 옛 문헌기록을 '해독'하고 '해석'하기만 하면 거기서 자동적으로 역사적인 사실이 도출된다고 믿는 것이다. '遣使朝貢'이니 '入朝'니 하는 글자들을 가지고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몰아붙이는 논리도 여기서 나왔다. 하지만 이 방법만으로 역사를 해석할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거야말로 역사학의 기본도 모르는 오만이고 교만이다. 역사의 사건 자체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그 '사실'을 적은 '기록'은 사람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거다. 단재도 이 점을 지적하면서 한 가지 우화를 예시한다. 평생을 역사연구에 전념한 어떤 사학자가 밤늦게 바깥에서 이웃사람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그걸 적어두었는데, 다음날 가서 당사자들에게 들어보니 자기가 듣고 기억한 것과 너무 다른 것을 보고 놀라고 또 어이가 없어, 자신이 평생 저술한 역사연구노트를 모두 불태워버렸더라는 이야기.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 내가 직접 목격한 이 상황도 100% 옳다고 말할수 없는데 역사기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하는.

 

이런 종류의 '텍스트'는 알게모르게, 그걸 짓고 쓴 사람의 사상이나 해석, 혹은 가치관(선입관이나 편견, 고정관념 포함) 등을 수반하게 된다. 때로는 저술 목적에 따라 상상 이상으로 사실이나 사상을 바꾸고 변형시키기도 한다. 묘비나 묘지라는 건 일정하게 정해진 '형식'과 '규격'이 존재하기에 인물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고는 할 수 없다. 글자 하나 더 넣고 빼는 것만으로 문장 하나, 문단 하나를 쥐락펴락하는 것이 한자라는 글자다. 묘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그렇다고 태왕의 무덤에 같이 넣지 않은 걸 보면 묘지라고 할 수도 없는 이 기괴한 비석이 세워지게 된 경위는 『광개토태왕릉비』 자신의 입으로는 이렇게 증언을 한다. 거련왕의 교지라는 형식을 빌려서.

 

선조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선조왕들을 위해 묘 위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기록해 착오가 없게 하라 하셨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셔서 말씀하셨다.

“이제 두 번 다시 수묘인을 서로 팔아서는 안 된다. 부유한 자라도 함부로 사들일 수 없다.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게 할 것이다.”

『광개토태왕릉비』

 

태왕릉비가 전하는 당대의 사실 가운데 하나는 광개토태왕이 선대 고구려왕들의 무덤마다 처음으로 '비석'을 세웠다는 것. 그 비석의 목적은 당시 왕릉 주변에 집락을 형성하고서 해당 왕릉을 지키며 청소하던 수묘인이 서로 뒤섞여 일어난 혼란을 막기 위해, 해당 왕릉에 속한 수묘인들의 숫자와 역할을 기록으로 명문화한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전통적인 수묘제도, 지방에서 사람들을 모아 무덤 주변에 '위성촌'을 형성해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무덤을 지키고 청소하게 하는 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와 관련해 만든 법령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만든 일종의 '고시' 역할도 『광개토태왕릉비』는 갖고 있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카르타고의 멸망을 지켜본 로마 장군 스키피오가 이런 말을 한다.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 로마도 이와 똑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비애감이라네."

인간이 만든 것은 언젠가는 다 바스라져 없어지게 되어 있다. 국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국가가 망해도 민족은 없어지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태왕은 "나는 내 구민들이 쇠락할까봐 두렵다"고 했다. 봉건사회에서 국가가 없은 뒤에도 민족이 존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기껏해야 지금 중국이나 구소련처럼 해당 국가체제 안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상 대대로 고구려 땅 안에서 태어나 먹고 입고 교육받은 사람들을 제쳐두고, 하필 고구려 외부에서 데리고 온 한인과 예인(말갈인?)들에게 자기 사후의 무덤을 맡긴다면, 태왕이 우려하던 '구민들의 쇠락'이후 그들이 자신의 무덤을 침략자들의 손에서 지켜내줄 거라고 믿었던 것일까.

 

거련왕은 아버지의 명을 따르면서도 1/3은 고구려 주민들로 조달하고 나머지만 한예로 충당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태왕의 말처럼 살아생전 동정서벌하며 쳐서 함락시킨 64성에서 징발된 사람들이었다. 수묘인에 대한 설명을 하고, 그들이 어느 성에서 징발된 사람들인지를 기록함으로서 앞서 비문이 그렇게 수식을 발라 칭찬한 태왕의 무훈은 수묘인들에 대한 법령과 함께 '현재와 밀접하게 연결된 과거',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현재'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왕도 안에서 만연하던 '국가지정' 수묘인의 불법적인 매매(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 위신에 도전하는 행위)의 주범인 '부유한 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冬十月, 王畋于蛇川之原, 獲白獐. 十二月, 王都雪五尺.]

겨울 10월에 왕은 사천(蛇川)의 들로 사냥나가서 흰 노루를 잡았다. 12월에 서울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2년(414)

 

필자가 대학 시험보러 가던 그날도 눈이 참 많이 내렸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이, 새하얀 눈이 뒤덮인 천지ㅡ온세상을 물들인 흰 빛이었다. 그 눈속을 따라 걸어들어갔고, 시험을 치렀으며, 면접을 봤고. 무사히 합격했더랬지(ㅋㅋㅋㅋ) 대학 합격 못 되면 내 손으로 서울 박살내버리겠다느니 별별 깽판을 쳤더니, 하늘이 그걸 듣고 조금은 나를 생각해주셨나보다.

 

"동짓날이 추워야 풍년이 든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보리 농사 풍작"

 

우리나라 속담이다. 동지가 12월 22일이니까, 이듬해 거련왕 3년의 고구려 농사는 풍작이었겠다. 동짓날은 겨울 중에서 가장 해가 짧은 날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설날'이라고 불렸다. 몹시 추운 겨울 병충들이 그 차가운 날씨에 얼어죽는다. 눈이 많이 오면 물이 많아지는 것도 있겠고, 또 눈이 따뜻하게 보리 이삭을 덮어준단다. 눈이 덮였는데 어떻게 보리 이삭들이 무사하냐 물으신다면, 저기 북극 이누이트족들이 지어 사는 이글루를 생각해보라.

 


이 무렵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짐작하게 해줄 수 있는 유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이 '광개토지호태왕명 호우'인데, 우리나라에서 해방되고 처음으로 발굴한 유물이다. 1946년 5월에 거의 펀펀하게 깎여있던 노서동 140호 고분(호우총)에서 여러 유물과 함께 나왔는데, 미리 틀을 짜서 만들어놓고 그 틀에 청동을 부어서 만든 제사용 그릇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는 한강 이남에서 발굴된 '광개토태왕의 이름이 새겨진' 유일한 고구려 금석문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신라의 전형적인 무덤축조형태인 돌무지덧널무덤ㅡ무덤의 주인이 신라의 왕족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그 신라의 왕족이 왜 이걸 갖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乙卯年, 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을묘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 십(十)

 

을묘년은 간지로 거련왕 재위 3년(415)에 해당하며, 광개토태왕이 죽은지 꼭 3년만이다. 《북사》에서는 부모가 죽었을 때 고구려에서는 유교 예법에 따라 3년상을 지낸다고 했는데, 3년상을 모두 마친 거련왕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서 만든 제기로 여겨진다. 마지막에 '십(十)'이라고 쓴 것은 이게 '열 번째로 만든 그릇'이나 처음부터 '열 개 한정 특수그릇'이라는 의미로 써놓은 듯 싶다. 고구려 사람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녔을 이 그릇이 신라까지 오게 된 것은 아마도 신라에서 이걸 갖고 왔거나, 고구려에서 신라에게 이것을 하사했을 가능성ㅡ둘 중의 하나다.

 

<강화도 적석사사적비. 적석사는 거련왕 4년에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적련사(赤蓮寺)라 불렸다.>

 

그러고 보면, 거련왕 4년(416)에 세웠다는 강화도 적석사도 태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태왕이 직접 정벌했던 곳에 세운 '원찰'이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조선조에 적석사의 연혁을 기록해 '고려산적석사사적비'를 세웠는데, 《전등사본말사지》같은 기록에는 이 적석사를 비롯해 주변 다섯 사찰의 연기설화가 적혀있다. 거련왕 4년, 고구려에 온 천축법사가 절을 지을 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던 중, 강화도 고려산 정상에서 청색, 백색, 적색, 흑색, 황색의 오색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을 발견한다. 대사는 연꽃잎을 하나씩 꺾어 공중에 날렸고, 그 오색의 연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청련사, 백련사, 적련사, 흑련사, 황련사의 다섯 절을 지었다. 그 중 붉은 연꽃이 떨어진 자리인 낙조봉에 지은 것이 적련사(赤蓮寺), 지금의 적석사이다. 지금은 백련사와 청련사, 적석사(적련사)만 있고 흑련사와 황련사는 사라져 터만 남아있는데, 남아있는 유물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고려 이후의 것이고 고구려 당시의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訥祇麻立干立.]

눌지 마립간(訥祇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 권제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즉위전기

 

신라 19대 눌지왕이 즉위한 것은 거련왕 5년(417)의 일이었는데, 여기에는 고구려의 입김도 강하게 작용했다.

 

[奈勿王三十七年, 以實聖質於高句麗, 及實聖還爲王, 怨奈勿質己於外國, 欲害其子以報怨. 遣人招在高句麗時相知人, 因密告 “見訥祇則殺之.” 遂令訥祇往, 逆於中路. 麗人見訥祇, 形神爽雅, 有君子之風. 遂告曰 “爾國王使我害君. 今見君, 不忍賊害.” 乃歸. 訥祇怨之. 反弑王自立.]

내물왕 37년(391)에 실성을 고구려로 보내 볼모로 삼았으므로,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자 내물왕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잡힌 것을 원망하여 그 아들을 해쳐 원한을 갚으려고 하였다.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사람을 불러 몰래 일렀다.

“눌지를 보거든 죽여라.”

마침내 눌지에게 떠나게 하여 도중에서 만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보니 외모와 정신이 시원스럽고 우아하여 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마침내 고하였다.

“당신 나라의 왕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죽여달라 했다.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칠 수가 없다.”

그리고 되돌아갔다. 눌지가 그것을 원망하였다. 돌아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즉위전기

 

《삼국사》에는 이 정도지만, 《삼국유사》에는 과장까지 덧붙여서 고구려에서 실성을 죽인 다음에 눌지가 즉위하는 것까지 보고 갔다고 적었다.

 

[王忌憚前王太子訥祗有德望, 將害之. 請高麗兵而詐迎訥祗. 高麗人見訥祗有賢行, 乃倒戈而殺王, 乃立訥祗爲王而去.]
왕은 전왕의 태자 눌지(訥祗)가 덕망이 있는 것을 시기하여[忌憚] 해하려 하였다. 고려에서 병사를 청하고 눌지에게 맞이하게 했다. 고려인은 눌지가 현행(賢行)이 있음을 보고 창을 돌려[倒戈] 왕을 죽이고, 눌지를 세워 왕으로 삼은 뒤에 돌아갔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2, 제18대 실성왕

 

신라 중심으로 기재한 《삼국사》의 편향성을 생각한다면, 《삼국유사》가 전하는 고구려의 신라왕위계승전 개입을 신라쪽에서 일부러 은폐했는지도 모른다. 거련왕은 옛날의 인질이었던 실성을 더이상 이용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실성의 원수였던 눌지로 신라왕을 갈아치워버린 것이다.

 

[王弟卜好, 自高句麗, 與堤上奈麻還來.]

왕의 동생 복호(卜好)가 고구려에서 나마 제상(堤上)과 함께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2년(418)

 

신라의 왕제(王弟) 보해 즉 복호가 고구려에 인질로 억류된 때에 대해서, 《삼국사》는 실성왕 11년(412), 《삼국유사》는 눌지왕 3년(419)이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여기서는 아무래도 《삼국사》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자신을 죽이려던 실성왕을 죽이고 즉위한 뒤, 눌지왕은 고구려와 왜로 여기저기 헤어진 자신의 아우들을 되찾아오려 했고, 그 일을 맡게 된 것이 신라 나마 박제상. 신라의 왕족이자 삽량주간의 벼슬을 지내고 있던 그가 그 아우들을 데려오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의 현인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세 사람의 촌간(村干: 촌장?)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들이 모두 박제상을 추천했다.

 

[遂以聘禮入高句麗, 語王曰 “臣聞交鄰國之道, 誠信而已. 若交質子, 則不及五霸, 誠末世之事也. 今寡君之愛弟在此, 殆將十年, 寡君以鶺鴒在原之意, 永懷不已. 若大王惠然歸之, 則若九牛之落一毛, 無所損也. 而寡君之德大王也, 不可量也. 王其念之.” 王曰 “諾.” 許與同歸.]

드디어 사신의 예로써 고구려에 들어가 왕에게 말하였다.
“신이 들으니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길은 오직 성실과 신의뿐입니다. 만일 서로 볼모를 보낸다면 오패(五覇)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참으로 말세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寡君]의 사랑하는 아우께서 여기 계신 지 거의 10년, 우리 임금께선 형제가 어려움을 서로 돕는 마음에 오랜 회포를 버리지 못하십니다. 만약 대왕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돌려보내 주신다면,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한 올 떨어지는 정도[九牛一毛]와 같아서 별 손해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임금께서 대왕을 덕스럽게 생각하심이 한량이 없으리이다. 왕께서는 이 점을 유념해 주소서.”
“좋다.”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박제상 中

 

여기서 나오는 고구려 왕, 즉 거련왕은 좀더 후덕한 편이다. 내물왕이 같이 인질을 보냈던 왜국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해놓은 것에 비하면, 박제상열전에 나오는 왕은 '고구려는 큰 나라요, 왕 역시 어진 왕'이라고 박제상이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삼국유사》 김제상편에 실려있는 이야기는 《삼국사》보다 좀더 구체적이면서도, 체계적이다.(《삼국유사》에서는 박제상을 김제상이라고 불렀음)

 

[堤上簾前受命, 徑趨北海之路, 變服入句麗. 進於寶海所, 共謀逸期, 先以五月十五日, 歸泊於高城水口而待. 期日將至, 寶海稱病, 數日不朝, 乃夜中逃出, 行到高城海濱. 王知之, 使數十人追之, 至高城而及之. 然寶海在句麗, 常施恩於左右, 故其軍士憫傷之, 皆拔箭鏃而射之, 遂免而歸.]

제상은 왕의 앞에서 명을 받고 바로 북쪽 바닷길로 향했다. 옷을 바꿔 입고 구려(句麗)에 들어가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도망칠 날짜를 약속해 놓았다. 앞서 5월 15일에 고성(高城) 수구(水口)에 와서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한 날짜가 가까워지자, 보해는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조회(朝會)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밤중에 도망쳐 고성 바닷가에 이르렀다. 왕(장수왕)은 이를 알고 군사 수십 명을 시켜 쫓게 하였다. 고성까지 따라왔다. 그러나 보해는 구려에 있을 때 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기에, 쫓아온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모두 화살촉을 뽑고 쏘았고, 몸이 다치지 않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2, 내물왕김제상

 

《삼국사》에서 '후덕한' 고구려 왕에게 말로 인질을 돌려받는 것에 비하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은 거의 007 탈출작전을 방불케한다. 미리 도망칠 날짜를 잡아놓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고성 바다를 지나 고려군의 추격을 피해 서라벌까지. 분명 인질은 한 명이고 돌려받은 사실은 자명한데, 어째서 하나의 일을 두고도 이것과 저것이 서로 다른거지? 정말 거련왕이 그냥 순순히 보내준게 아니라 저렇게 군사를 시켜 뒤쫓게 했던 걸까?

 

어쩌면 418년에 귀국한 복호가 신라로 돌아올 때에 이 그릇을 갖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시기상으로 봐도 그러하고, 돌무지덧널무덤의 마지막 단계인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이 호우총이 만들어졌다는 조사결과를 볼 때 복호가 이 호우총의 주인이며 이걸 신라로 가지고 들어온 장본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는 일단 추측으로 남겨놓는다. 상상하면 재미있지. 고구려에서 신라의 인질에게 이런 그릇을 하사했을 정도로 신라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거나 고구려가 신라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廿八年秋九月, 高麗王遣使朝貢. 因以上表, 其表曰 "高麗王敎日本國也." 時太子菟道稚郞子讀其表, 怒之責高麗之使, 以表狀無禮, 則破其表.]

28년(418) 가을 9월에 고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인하여 표를 올렸는데, 그 표문에서 말하였다.

“고려왕이 일본국에 교(敎)하노라.”

이때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츠코(菟道稚郞子)가 그 표문을 읽어보고 노하여, 표의 무례함을 고려의 사신에게 꾸짖고 그 표문을 찢어버렸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0, 오우진키(應神紀) 28년 정사(보정연대 418)

 

《니혼쇼키》의 기록은 대체로 실제로 그 사건이 일어난 시점보다 기록된 연대가 훨씬 끌어올려져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위 '신라정벌'의 주인공인 진구고고는 아예 실존하지도 않았던 인물이고, 그녀의 아들이 바로 오진(應神) 덴노인데 대체로 그 기록이 실제 시점보다 한 120년 정도 끌어올려져 있단다. 저기서도 오진 덴노 28년 정사년이라고 한 것을

120년 정도 끌어내리면 418년이며 거련왕 즉위 6년에 해당한다.

 

고려왕ㅡ여기서는 거련왕ㅡ의 말을 '교(敎)'라고 한 표문이 버릇없다며 지적한 것은(어디까지나 《니혼쇼키》안에서)지금 보면 이게 참 웃긴 일이다. 왜냐구? 저들의 태도 말이다. 앞서 광개토태왕편에서도 얘기했지만 중국에서는 천자국의 제도와 제후국의 제도를 엄격하게 구별해서, 천자의 명령을 가리키는 단어와 제후의 명령을 가리키는 데에도 차별을 둔다. 칙(勅)이 곧 천자의 명령이고, 교(敎)는 곧 제후의 명령이다. 《니혼쇼키》 안에서는 자기네 왕들을 어떻게든 천하를 지배하는 덴노(天皇)로 만들고 싶어서, 덴노가 말하는 것은 무조건 '칙'이라고 썼는데, 제후가 천자 앞에서 '교'라고 했다고 그걸 버릇없다고 지적했대. 왜국으로서는 고구려가 한참 머리를 숙인 것인데 그걸 버릇없다고 했다면, 자기들 앞에서 대체 뭐라고 말해줘야 고개를 숙이겠대? 사실 왜국이 뭐라고 고구려가 굽실거리겠느냐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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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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