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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6>제20대 장수왕(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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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 책봉, 조공, 책봉. 우리나라 고대사는 이런 것만 나왔다가 말았다가 나왔다가 말았다가 한다. 중국놈들은 중국놈들 멋대로 우리가 자기들한테 조공했다고, 일본놈들은 또 일본놈들 멋대로 삼한정벌이니 어쩌니 하면서 우리가 자기들한테 조공하고 굽실거렸단다. 게다가 그걸 또 서양 사람들은 진짜라고 믿으면서 교과서에까지 실어놓는다. 기분나쁘다. 이리저리 치이고 떼이고 난도질당하고 잘려나가고 이런 개같은 나라에서 대체 뭘 배우자고 나는 이날 이때까지 살고 있단 말인가.

 

고려가 송에 사신을 보냈다.

《동사강목》 신라 눌지왕 25년, 고려 장수왕 29년,

백제 비유왕 15년 신사(441)

 

 

고려와 백제가 모두 송에 사신을 보냈다.

《동사강목》 신라 눌지왕 27년, 고려 장수왕 31년,

백제 비류왕 17년 계미(443)

 

굳이 포함안시켜도 될 조공기사를 뭐하러 찾아냈는지 안정복 영감도 참.

 

[十二年秋七月辛未朔癸酉, 高麗國貢鐵盾, 鐵的. 八月庚子朔己酉, 饗高麗客於朝. 是日集群臣及百寮, 令射高麗所獻之鐵盾的. 諸人不得射通的. 唯的臣祖盾人宿禰, 射鐵的而通焉. 時高麗客等見之, 畏其射之勝巧, 共起以拜朝.]

12년(444) 가을 7월 신미 초하루 계유(3일)에 고려국이 철방패[鐵盾]와 철과녁[鐵的]을 바쳤다. 8월 경자 초하루 기유(10일)에 고려의 손님께 조정에서 잔치를 열어주었다. 이 날 군신과 백료를 모아서 고려가 바친 철방패와 철과녁을 쏘게 했다. 많은 사람이 과녁을 뚫지 못했다. 다만 적신(的臣이쿠하노오미)의 선조 순인숙녜(盾人宿禰타타히토노 스쿠네)만이 철과녁을 뚫었다. 그때 고려의 사신들은 그 활솜씨의 훌륭함을 보고 두려워하며 함께 일어나 절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니혼쇼키)》 권제11, 인덕기(仁德紀닌토쿠키) 12년 갑신(보정연대 444)

 

믿거나 말거나~~지만 고려가 왜국에 보낸 방패라면 아마 살막이 철방패. 서양의 파비스(Pavise)나 조선조의 장방패(長防牌)처럼 바닥에 세워놓고 적의 방패를 막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옛 벽화에 보면 방패는 주로 보병용이었고 기병은 방패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방패의 끈에 환두대도를 이어서 어깨에 메고 방패는 팔 밑으로 내려서 겨드랑이에 끼듯이 해서 행군할 때면 들고 다녔던 것을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긍의 《고려도경》에 고려의 방패를 '수패(獸牌)'라고 해서 큰 것과 작은 것의 두 종류가 있고, 나무로 만들어서 앞뒤로 가죽을 덮고 겉에는 사자의 모습을 그렸으며, 앞면에는 칼날을 꽂아서 꿩의 깃털로 가렸다가 적이 오면 그 칼날로 적을 찔러 공격했다고(옛 벽화에 나오는 방패에는 검은 몸체에 붉은 테두리를 둘렀을 뿐 무늬가 없고, 방패 앞에 칼을 꽂지도 않았던 듯).

 

조선조 초년에는 방패를 팽배(彭排)라고 부르며 팽배수(彭排手)라는 방패로 무장된 부대도 조직되어 있었다.(정도전의 《진법》에는 칼과 방패로 무장한 도순刀楯들은 높은 언덕이나 장애물 많은 좁은 길에서 위력을 발휘하며, 이런 장소에서는 활이나 쇠뇌를 든 궁노弓弩 두 명이 도순 한 명을 못 당한다고 적었다) 아직 고려 때의 무풍(武風)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조선조 초년에는 이들 팽배수의 위력이 얼마나 굉장했던지, 팽배수와 창수를 서로 목검, 목창으로 교전하게 시켰더니 다음날 창수 두 명이 죽고 말았다던가. 이런 식으로 방패를 쓰는 군사가 세종 때까지 7,500명이 있었다.

 

[三十八年, 新羅人襲殺邊將. 王怒, 將擧兵討之. 羅王遣使謝罪, 乃止.]

38년(450)에 신라 사람들이 변경 장수를 습격해 죽였다. 왕은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 하였다.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고려 앞에서는 신하처럼 네네 굽실굽실하던 신라가 조금씩, 고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그것을 행동으로 차츰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고려와 신라의 사이는 그때부터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三十四年, 秋七月, 高句麗邊將, 獵於悉直之原. 何瑟羅城主三直, 出兵掩殺之. 麗王聞之怒, 使來告曰 “孤與大王, 修好至歡也. 今出兵殺我邊將. 是何義耶?” 乃興師侵我西邊. 王卑辭謝之, 乃歸.]

34년(450) 가을 7월에 고려의 변장(邊將)이 실직(悉直)의 들에서 사냥하고 있었다. 하슬라성주(何瑟羅城主) 삼직(三直)이 출병해서 엄습해 죽였다. 고려왕이 듣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 말했다.

“과인은[孤] 대왕과 우호를 닦은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했다. 지금 출병하여 우리의 변방 장수를 죽였다. 이걸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이에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왕이 겸허한 말로 사과하자 물러갔다.

《삼국사》 권제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34년(450)

 

아무리 힘의 차이가 있다지만, 엄연한 신라령인 실직에 고려의 장수가 들어와 사냥하고 있던 것에 대해 신라는 굉장한 반감을 드러내는, 자칫하면 고려와의 충돌로까지 번질 수 있는 '도발'을 감행했다. 아무리 국경 침범이 잘못이라 해도 말로 돌려보낼수도 있었을 것을 죽이기까지 한, 신라의 태도는 예전과는 달랐다. 광개토태왕 시절만 해도 스스로 고려의 노객(奴客)을 자처하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던 신라가, 그것도 변방 하슬라주의 성주가 제멋대로 출병해 고려의 장수를 죽여버린 것을 신라 조정에서 모르지는 않았을테고, 자칫 강국 고려와의 외교문제로까지 번질수 있는 무모한 도발행위를 신라 조정에서는 왜 문제삼지 않았던 것일까? 하슬라 성주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도대체 무엇이 신라로 하여금 고려에 대해 그런 반동적 행동을 하게 만든거지?


<고려의 남방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원고구려비>

 

흔히 우리가 '남방의 광개토태왕릉비'라고까지 부르는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된 것은 진짜, 극적이었다. 1979년에 이 비석이 고려의 비석이라는 것이 알려지기 전까지 이 비석은 마을에서 빨랫돌로 썼다던가? 등산객들이 신발 깔창에 낀 먼지를 털어낼 때에 썼다고도 하고, 아무튼지간에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세월이 세월이다보니 글자라고 남아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고,그래서 이 비석을 언제 누가 왜 세웠는지는 지금 남아있는 명문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 비석을 만든 주체가 고려라는 것이다.

 

五月中高麗太王祖王令▨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亏桓奴主簿貴德○類○安○○去○○到至跪營大太子共○尙望上共看節賜太霍鄒敎食在東夷寐錦之衣服建立處用者賜之隨▨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服敎東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大位諸位上下衣服來受敎跪營之十二月卄三日甲寅東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太使者多亏桓奴主簿貴▨▨▨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疏奴▨▨凶鬼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跓動▨▨▨▨▨忠▨▨于伐城不▨▨▨村舍▨▨▨▨胜▨沙▨▨▨▨▨▨▨▨▨▨刺功▨▨射▨▨▨▨▨節人刺▨▨▨▨▨▨▨▨辛酉▨▨▨▨▨▨▨▨▨▨太王國土▨▨▨▨▨▨▨▨▨▨▨▨▨▨黃▨▨▨▨▨▨▨[安]▨▨▨▨▨▨▨▨▨▨▨▨上右▨▨辛酉▨▨▨▨東夷寐錦土▨▨▨▨▨▨▨袒故▨桓▨沙▨斯色▨太古鄒加共軍至于伐城去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前部大兄▨▨▨▨▨▨▨▨▨▨▨▨▨▨▨▨▨▨▨▨▨▨▨部▨▨▨泊▨▨▨▨▨▨▨▨▨▨▨▨▨▨▨容▨▨▨▨▨▨▨▨▨▨▨ ▨▨▨▨▨▨▨▨▨▨▨▨▨▨▨▨▨▨▨▨▨▨▨▨▨▨▨▨▨▨▨▨守自▨▨▨▨▨▨▨▨▨▨▨▨▨▨▨

 

이 비석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비석에 나오는 날짜, 그러니까 '12월 23일 갑인'이라는 글자를 갖고 대략 거련왕 37년(449)과 거련왕 68년(480)으로 줄여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전자를 택했다. 비석의 건립목적은 뭐랄까, 고려와 신라 두 나라 사이의 관계 재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선대왕의 명[祖王令]'에 따라 거련왕은 이 비석이 있는 곳 국원성ㅡ지금의 충주의 궤영(跪營)에까지 내려왔다.여기서의 궤영은 충주 지역보다 남쪽에 있던 주라려군(住羅麗軍) 부대이자 두 나라를 이어주는 일종의 연락소였다. 왕이 태자와 신료들까지 이끌고 여기까지 행차하신 것은 선대왕(광개토태왕?)의 명을 환기시켜 다시 행하는 데에 있었고, 신라왕 매금은 고려의 태자며 신료들이 여기 오는 것을 꺼려했다는 것. 그 이유는 위에서 말했다시피 자기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고려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때 거련왕을 수행한 사람 중에는 전부대사자 벼슬의 다우, 환노주부의 벼슬을 가진 귀덕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확인된다. 태왕은 재차 태곽추(太霍鄒)와 신라 매금에게 입을 옷을 줄테니 오라고 불렀고, 신라왕이 못 이기는 척 뒤늦게 궤영에 오자 신라 경내에 있던 고려 신료와 고려의 귀척들까지 모두 와서 신라 매금과 나란히 서서 의복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12월 23일에 신라왕 일행이 벌성에 이르자, 전부대사자 다우를 비롯한 신라땅 안의 고려 당주와 중인 모두가 이 국원성에 모여들었다. 이 시대 의복을 하사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중심국가의 천자가 주변국가의 제후에게 행하는 일종의 복속의례였다. 김춘추가 당에 군사 파병을 요청하면서 당의 의복을 받아와 신라 고유의 복식을 모조리 당풍으로 바꾼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고려 역시 신라에게 그런 제후의 예를 행했다. 무엇보다 『중원고구려비』에서는 고려의 태왕, 즉 장수왕이 다스리는 고려국토(高麗國土)와 신라왕 매금이 다스리는 '신라토내(新羅土內)'의 구분이 나온다. 말하자면 고려왕이 다스리는 지역은 곧 고려의 율령권이 미치는 모든 국토이며, 동이신라의 매금이 다스리는 땅 역시 고려의 변경 관할지역에 불과하다는 것. 즉 신라를 고려의 변방국가 정도로 치부하는 고려의 소중화적 사상이 반영된 것이 이 『중원고구려비』인 것이다.

 

신라에게는 위협이었다. 『중원고구려비』에서야 『광개토태왕릉비』처럼 고려 중심의 천손관, 즉 고려가 이 동방의 중심이라는 우월의식을 보이면서 신라왕을 가리켜 '동이매금(東夷寐錦)' 즉 동쪽 오랑캐 우두머리라 부르고 있지만(백제를 가리켜서 '백제 떨거지들 왕초'라는 뜻의 '백잔주'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이 무렵의 신라는 고려와 백제가 서로 치고받고 하는 동안 착실하게 세력을 다져 제법 나라로서의 구색을 갖춰있던 터다. 470년부터 490년에 걸쳐 신라는 소백산맥 안팎의 서북 변경ㅡ지금의 군위와 상주, 의성은 물론이고 충북 보은과 옥천, 청원에까지 대대적인 축성사업을 벌여 지방 지배에 박차를 가했고, 고려 세력은 이들에게 거의 밀려나는 처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중원고구려비』 비문에는 '국토(國土)'라는 관념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 이는 신라의 팽창에 대한 고려의 위협을 암시한다. 하긴 여지껏 신라 앞에서 종주국이라 뻐기던 고려였으니 부하로만 생각하던 신라가 저렇게 기어오르려는 걸 보고 '어어?'하는 생각은 했겠고, 더구나 신라는 고려의 주적인 백제와 동맹까지 맺어 고려에 맞서던 판국이었으니.신라왕을 만난 자리에서 거련왕과 고려 대신들이 광개토태왕 시대의 고려-신라 관계를 유독 강조하려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옷을 내려주면서 우리가 말이야, 예전 관계가 어떻고 말이야, 하면서 이렇게 강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고려와 신라 사이에는 뭔가가 심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여타의 의문사항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신라에서의 일을 잊어버린 듯 남조 유송과의 외교관계에 제법 신경을 쓰는듯한 태도를 보인다. 빠뜨리고 안 적은 건지, 아니면 안 적을만한 까닭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삼국사》가 빼놓은 유송행 고려 사신의 기록에 대해서 안정복 영감은 일일이 《남사(南史)》 뒤져가면서 《동사강목》에다 적어놓으셨더라. 거련왕 39년(451) 10월과 41년(453) 11월 두 차례에 걸쳐서 고려는 유송에 사신을 보냈다고 말이다.

 

[四十二年, 秋七月, 遣兵侵新羅北邊.]

42년(454)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고려 역시, 그 이후 감정이 몹시 상했던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잘 지내던 신라를 수시로 쳐들어가 휘저어놓는다. 확실히 고려와 신라의 사이에는 처음과는 다른, 광개토태왕 시절의 신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四十三年, 遣使入宋朝貢.]

43년(455)에 사신을 송(宋)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이때 거련왕은 유송에다 장사(長史) 벼슬의 동등(董騰)을 보내 표를 올리고, 선제(先帝)의 이주기(二周朞)를 조문하면서 방물을 바쳤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삼국사》에 보면 이 해 겨울 10월, "고려가 백제를 쳐들어왔기에 왕은 병사를 보내 구해주었다[高麗侵百濟, 王遣兵救之]"고 적고 있다.

 

눌지왕 39년. 신라는 확실히 변했다. 고려의 침공이 있긴 했지만, 여지껏 적국으로 지내던 백제를 도와, 우호국으로 지내던 고려와 맞서 싸우기까지 하는 신라의 태도. 그것은 신라가 고려에 대해 뭔가 '위협'을 느끼고 있는 듯한 모습 같기도 하다. 신라로서는 어떻게든 고려와 우호를 유지해서 백제의 침공을 막아내야 할텐데, 왜 이제 와서 고려를 버리고 백제를 택하려고 하는 걸까? 단지 고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것 때문에? 하지만 따져보면 그것도 하슬라주의 성주가 고려의 장수를 제멋대로 잡아 죽였기 때문에 벌어졌던, 한마디로 신라쪽에서 먼저 선빵 날린 것 아니었던가?

 

고려가 사신을 송에 보내어 석노(石弩)와 호시를 바쳤다.

《동사강목》 신라 눌지왕 42년, 자비왕(慈悲王) 원년,

고구려 장수왕 46년, 백제 개로왕 4년 무술(458)


고려가 사신을 송에 보냈다.

《동사강목》 신라 자비왕 2년, 고구려 장수왕 47년,

백제 개로왕 5년 기해(459)

 

우리 나라와 중국의 조공-책봉관계사를 보면 희한하게도 중국과 우리나라를 두고 조공을 언제 보낼 것인지 그 시기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부분이 나온다. 조선조 초기만 해도 명의 홍무제는 조선이 보내는 조공기한을 3년에 한 번으로 했는데, 조선은 1년에 세 번으로 박박 우겼다. 조공을 가는 측은 보통 많은 조공품을 '상국'에 바쳐야 했지만, 상국은 원칙적으로 그 받은 조공의 몇 배에 달하는 '사여'를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소위 '중화사상'에서 천자는 '힘'이 아니라 '덕'으로 사방을 아우르고 천하를 다스려야 하는 존재로 설정이 되어있다. 그리고 제후들도 천자의 힘이 아니라 덕을 사모해서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악스럽게 '왜 조공 안 바쳐'라는 식으로 협박성 멘트를 날리지는 않는다. 쪼잔해보이니까. 춘추전국시대만 해도 조폭 두목이 수하들한테 상납금 거두듯이 일방적으로 '갈취'하는 식의 조공이 허다했고, 이후로도 그런 식의 조공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는, 그렇게 천자가 제후에게 일방적으로 '갈취'하는 식의 조공은 역사에서 조금씩 줄어들었다. 천자는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제후들에게 조공에 보답할 '회사품' 내지는 '하사품'을 주어야 했다.(심지어는 조공 사절이 국경만 넘었다 하면 그때부터 드는 비용은 모조리 중국 조정에서 부담했다.)

 

조공-책봉이라는 중화사상 속의 국제질서는 유교이념에 근간을 두고 있고, 유교에서는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한다. '천자의 권한은 신성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천자에게 예(禮)를 지키는 것이 곧 하늘에 대해 예를 지키는 것이다'라는 명분이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정권의 기득권을 정당화해주는 것이다. 그들에게있어 실리적 손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었다. 명분을 위해 천자의 '덕'을 과시하는 동시에, 실질적으로는 주변세력이 그러한 명분놀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조치가 바로 조공품 시중가격 몇 배에 달하는 회사품 제공이었던 것. 사정이 이렇다보니 주변 국가에서는 물건 하나 갖고 가면 몇 배 받는 조공을 어떻게든 바치려고 하고, 중국에서는 정반대로 조공 시기를 좀 줄이라고 거꾸로 압력을 넣게 된다. 그러면 조공 바치는 입장에서는 할 말이 있다. "예(禮)에 어긋나는 짓입니다."

 

[五十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50년(462) 봄 3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이 무렵, 고려에서 요동으로 구법의 길을 떠난 한 승려가 있었다. 이름은 승랑(僧朗). 고려의 승려로서 중국에서 활약하면서 삼론종 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던 인물로 평가받는 자다.

 

평양 천도를 전후해서 고려의 불교교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었다. 중국 남조의 동진 말기와 유송에 걸쳐서 구마라습이 전한 공관불교와는 다른 새로운 경전, 비로자나불과 불성을 설하는 《화엄경》과 《열반경》이 전해지면서, 공 사상의 수용을 위주로 하던 중국 불교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뒤 법신과 불성의 수용과 이해를 중심으로 중국 남북조 불교계에서 연구가 이루어졌고, 도안과 담시를 거쳐 고려에까지 그러한 새로운 불교 사상이 전해지게 된다. 승랑은 그런 시대를 살았던 승려였다.

 

천황(天皇, 오오키미)가 즉위한 이래, 신라국이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은지 8년. 그리고는 중국(中國)의 마음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수호하였다. 이때문에 고려왕(장수왕)이 정예 병사 1백 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게 했다. 얼마 뒤에 고려의 한 군사가 잠깐 동안 귀국하였는데, 그때 신라인을 마부[典馬]<이를 우마가히(于馬柯比)라고 한다>로 삼았었다. 몰래 말하였다.

"너희 나라가 우리나라에 패할 날이 머지 않았다."<어떤 책에서는 『그대의 나라가 우리 땅이 될 것이 오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 마부는 듣고서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는 흉내를 내며 물러가 뒤처지더니, 마침내 나라(신라) 안으로 도망쳐서 그 말을 전했다.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고 있다는 걸 알고, 사자를 보내 국인들에게 달려가 고하게 했다.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모조리 죽여라."

사람들은 그 뜻을 알고 나라 안에 있던 고려인을 모두 죽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웅략기(雄略紀, 유랴쿠키) 8년(463) 봄 2월조

 

이 기록 속에서 신라인들은 분명 고려인을 가리켜 수탉이라고 불렀다. 고려 사람들이 머리에 쓴 관모에 주렁주렁 꽂고 다니는 깃털이 마치 수탉의 볏처럼 보인다고 생각을 것이고, 그것을 암호로 삼아서 신라 경내에 있던 '깃털 달린' 고려의 수탉(병사)들을 모두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신라에서 일어난 대규모 고려군 학살 사건. 《일본서기》 자체가 자국 내에서도 계체기(게이타이키) 이전에 대해서는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데다, 아무리 올려잡아도 웅략(유랴쿠) 20년(476) 이전까지는 우리나라 《삼국사》의 기사와는 연대도 맞지 않고(한 120년 정도 차이가 난다), 이 기록도 뒤로 넘어가면 고려가 격분해서 쳐들어오고 임나의 일본부(?)를 통해 왜왕이 신라에 군사를 보내서 도와주는 어쩌구저쩌구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이어지고 있기에. 왜왕의 마음이 어쩌구 하면서 신라가 그걸 두려워했다고 했지만, 《송서》에 기록된 대로라면 이 무렵 왜왕 무가 송에 올린 상소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로 거론한 것이 그들을 압박해오는 고구려였다. 신라가 아니라 왜가 고구려를 무서워한 것이다. 신라가 백제의 팽창에 위협을 느껴 고려와 손을 잡고, 백제 중심의 동맹체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려에게 저자세를 취했던 실제 사실을 단지 《일본서기》는 자기들 중심에서 신라가 왜왕의 마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하고 갖다붙여버린 것 뿐이고. 그래서 이걸 액면 그대로 믿을수는 없겠지만, 만약 이때 신라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사태가 사실이라면, 신라에 퍼진 소문(고려에서 신라를 무너뜨리고 땅을 병합할 것이라는 것)이 헛소문이었든 사실이었든, 고려에 대한 신라의 우려가 실로 상당했음을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정말 고려가 신라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같은 것. 모든 것이 평양 천도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五十一年, 宋世祖孝武皇帝, 策王爲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

51년(463)에 송 세조(世祖) 효무황제(孝武皇帝)가 왕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책봉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유송 대명(大明) 7년. 간지로는 태세 계묘. 《송서》에는 6월 무신의 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에 효무제가 장수왕에게 보낸 국서가 《해동역사》에 실려 있다.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都督) 영평이주제군사(營平二州諸軍事)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고려왕인 낙랑공(樂浪公) 고련(高璉)은 대대로 충의로 섬겨 바다 밖의 번병(藩屛)이 되었다. 본조에 충성을 다하여 포악하고 잔인한 무리를 없애는 데 뜻을 두었고, 사막의 나라와 교류하여 짐의 덕화를 크게 떨쳤다. 벼슬을 더해 주어 절의를 드러내야 마땅하기에, 이에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로 삼고, 지절(持節), 상시(常侍), 도독(都督), 왕(王), 공(公)의 칭호는 전과 같이 한다.

 

꼴에 천자라고 폼 엄청 잡으셨구먼.

 

[五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53년(465)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으니 고려는 중국의 속국이고 중국사의 일부라고 하는 짱깨들 주장에 대해서도, 같은 시대에 존재한 두 개의 왕조에 저리도 나란히 왕복 피스톤 운동마냥 번갈아 교대로 사신을 보내고 있는 고려는 과연 누구를 종주국으로 모시고 속국의 예를 바쳤다는 말인지 묻고 싶다. 북위와 동진, 그리고 유송, 여러 나라가 새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중국 대륙 내에서도 북조와 남조가 서로 나뉘어 으르렁거리고 싸우던 그 시대에, 도대체 그 정통은 누구이고, 그 많은 왕조들이 사라지는 동안 7백년이나 그 자리 지키고 섰다가 새 왕조 서면 하나든 둘이든 셋이든, 기다렸다는 듯이 가서 닥치는대로 '조공'이랍시고 바치는 고려는 도대체 누구를 주인으로 섬겼다는 건가. 티벳을 먹을 때처럼 고려도 집어삼키려는 저 짱깨들에게 한번 물어나 봤으면 좋겠는데. 중국 놈들은 워낙 논리가 안 통하는 놈들이라서 말해봤자 소용도 없겠지만 말이다. 위진남북조 열 개 넘는 왕조가 일어났다 죽었다 하는 그 와중에도 7백년을 꿋꿋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고려가 대체 어떻게 저들 속국이 되고 저들 역사가 된단 말인가.

 

[五十四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魏文明太后, 以顯祖六宮未備, 敎王令薦其女. 王奉表云 “女已出嫁, 求以弟女應之.” 許焉. 乃遣安樂王眞·尙書李敷等, 至境送幣.] 

54년(466) 봄 3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위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의 육궁(六宮)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므로 왕에게 교서를 내려 딸을 보내라 했다. 왕은 표를 올려 말하였다.

“딸이 이미 출가하였으니 아우의 딸로써 응하겠습니다.”

허락하고 이에 안락왕(安樂王) 진(眞), 상서 이부(李敷) 등을 보내 국경에까지 폐백을 보내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육궁이란 주변의 여섯 나라에서 뽑혀온 여자들을 말한다. 중국이 이민족들을 무마하는 방법 가운데는 '미인계'도 있었는데, 황실의 여자를 이민족의 왕에게 시집보낸다던가, 아니면 이민족의 왕녀를 중국 황실에 들여 후궁으로 삼는다던가 하는 일종의 '정략혼인'이다. 돈만 바치는게 아니라 여자까지 갖다 바쳐가면서까지 평화를 구걸해야 했을 정도로 중국은 이민족들 앞에서 맥을 못 추었다. 북위를 세운 선비족은 중국 한족이 그러는 것이 참 재미있게 보였던지 한족이 하던 걸 또 따라한다고, 주변의 여섯 나라로부터 각기 왕녀 한 명씩을 받아서 황제의 후궁으로 삼았다.(여자가 무슨 아이템도 아니고, 여섯 명 풀세트 갖추겠답시고...) 뭐 굳이 보낸다고 체면 깎일 것이야 없겠으나, 후궁으로 가는 것이 조금 그렇긴 하지. 거련왕의 공주는 마침 시집간 뒤여서, 대신 조카딸을 보내기로 했고, 북위에서도 그걸 받아들여서 고관을 시켜서 값진 폐백을 보내왔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或勸王曰 “魏昔與燕婚姻, 旣而伐之. 由行人, 具知其夷險故也. 殷鑒不遠, 宜以方便辭之.” 王遂上書, 稱女死. 魏疑其矯詐, 又遣假散騎常侍程駿, 切責之 “若女審死者, 聽更選宗淑.” 王云 “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 會顯祖崩, 乃止.]

어떤 사람이 왕에게 권하여 말하였다.

“위는 예전에 연과 혼인하고도 얼마 안 되어 정벌하였습니다. 사신을 통해 그 나라 지형의 평탄하고 험함을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은감(殷監)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적당히 구실을 만들어 거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왕은 마침내 글을 올려 딸이 죽었다고 핑계를 댔다. 위는 그 말이 거짓이라 의심하고서,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심히 꾸짖었다.

“정말 영애분이 죽었다면, 종실의 딸을 다시 뽑아서 보내시오.”

“천자께서 이전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명을 받들어 따르지요.”

마침 현조가 죽자 중지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54년(466)

 

이렇게 북위와 고려의 국혼은 무산되었다고, 《삼국사》는 전한다. 그런데 이 기록에 대해서,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라는 책에 보니까, 중국측의 '기록 은폐'의 가능성이 짙단다. 왜냐면 현조 헌문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문제의 황후 문소황후(文昭皇后) 고씨(469~519)는, 다름아닌 고(高)씨로서 고려 출신이기 때문이다.

 

실제 《위서》 정준열전에 보면 "연흥 말엽(475년께)에 고려국왕이 액정의 여자를 헌납하기를 원하니 현조(헌문제)가 허락했다."고 적었다. 정준은 당시 고려와 북위 양국간 국혼 문제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고려에 와서 거련왕에게 "만약 여자를 보낼 경우 태후 풍씨(문명태후)와 다르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라고 말한다. 문명태후 풍씨는 어린 효문제를 섭정하면서 25년 동안이나 북위 황실의 실권자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이 외에도 여러 차례 고려에 왔고, 거련왕은 그를 시종하는 사람에게 음식도 주지 않고 핍박하고 욕보이려고 했다고 했다.) 475년께는 고려 거련왕 63년, 북위 효문제 즉위 5년의 일로 처음 북위와 고려 사이에 오갔던

소위 '국혼'이 '무산'된지 9년만의 일이다.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고, 선비족 고유의 옷과 말을 버리고 한족의 말과 옷을 취하며 강력한 한화(漢化) 정책을 추진하던 효문제. 그리고 그의 후궁으로 들어간 문소황후. 그녀의 이름은 조용(照容)이다. 이름에 빛날 '조(照)'자가 들어간 것과 관련해 《위서》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어려서 집안에 있는데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 그녀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이리저리 비추었다나? 이런 일이 수차례나 반복되는 것을 보고 아버지 고양이 민종이라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그는 "앞으로 말할수 없이 귀하게 될 서조"라며,"햇빛이 여인의 몸에 비치면 반드시 은명이 미친다"는 해석을 해주었다고 한다. 유화가 추모왕을 낳기 전에 햇빛이 따라와 비추었다는 내용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다. 

 

선비족, 한족 여자에게 어떻게 고려 건국 신화의 대목이 나올수 있으며, 그걸 해석한 민종은 하필 고려(요동) 사람이었을까? 그녀가 고려의 왕실에서나 쓰던 '고(高)'라는 성씨를 가진 이유는? 더구나 문소황후의 선대, 《위서》에서 말하는 고씨 일가는 본래 '발해인'이라고 했다. 5대조 고고 때에 난을 피해 고려로 들어갔다고 적고 있지만, 그 무렵 고씨라는 성씨를 쓰던 것이 고려 왕족들밖에 없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이 고려계 사람이었음은 틀림없는 부분이다.(문소황후의 오빠 고조 역시 '발해수인勃海蓚人'으로 나온다.)

 


문소황후의 묘지명에 보면, 그녀는 효문제의 귀인(후궁)으로서 각(恪)과 광평왕, 두 아들과 장락공주를 낳았다. 이중 원각 즉 탁발각은 탁발씨만이 태자가 될수 있다는 북위 황실의 관례를 깨고 태자로 책봉된다. 그것도 이미 선출되어 있던 태자를 제치고서. 그리고 그는 훗날 북위의 세종 선무제로 즉위한다. 고려계 소생이 북위라는 이민족 왕조를 다스리는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태화 20년(496) 북행궁에서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급사했다. 북위에서는 황후나 후궁이 황자를 낳으면 그 황자를 낳은 황후, 그리고 후궁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외척이 득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세종은, 즉위한 뒤 어머니에게 '문소황태후'라는 존호를 바쳤고, 손자 효명제는 효문제가 묻힌 장릉 근교로 할머니의 시신을 이장해 영릉을 조성하기에 이른다.

 

뭐 고려인 출신이 북위의 황후가 되었다니 감탄할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 역사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인지라 더이상 설명을 부기할 생각은 없다. 

 

[偽東萊太守鞠延僧數百人據城, 劫留高麗獻使. 懷珍又遣寧朔將軍明慶符與廣之擊降延僧, 遣高麗使詣京師.]

위(僞)의 동래태수(東萊太守) 국연승(鞠延僧)이 그의 무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에 웅거하여 공물을 바치러 오는 고려 사신을 억류하였다.이때 유회진(劉懷珍)이 동해(東海)에 있으면서 영삭장군(寧朔將軍) 명경부(明慶符)와 용양장군(龍驤將軍) 왕광지(王廣之)를 보내어 국연승을 쳐서 항복시키고 고려의 사신을 경사(京師)로 보냈다.

《남제서(南齊書)》권제27, 열전제8, 유회진

 

남제 명제(明帝) 태시(泰始) 3년(467). 위(僞)는 '거짓 위'로 송에서 북위를 지칭할 때면 꼭 이 글자를 써서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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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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