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6>제26대 영양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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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年, 夏五月, 遣使入隋朝貢.]
8년(597) 여름 5월에 사신을 수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죽이기 직전의 살벌한 관계 속에서도, 고려와 수의 사이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수차례 수에 사신을 보내다가 갑자기, 대원왕 3년부터 5년 동안 공백을 보이는 것을 빼면....
[九年(春二月),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摠管韋冲擊退之.]
9년(598) (봄 2월에) 왕께서 말갈의 무리 1만을 거느리고 요서를 쳤는데,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冲)이 이를 격퇴시켰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그리고 선수를 친 것은 고려였다. 말갈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직접, 왕이 요서를 친 것이다. 수가 즉각 반발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접 알면서도 왕이 그렇게까지 했다면, 이미 전쟁은 각오하고 있었다고 봐야할 터. 그러면서도 고려군이 아닌 말갈족의 군대를 동원한 것에 대해서, 선제공격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의도, 나라안에 전시체제를 갖추어 귀척들을 국왕의 권한 아래에 편재하고자 했던
시도였다고 볼수도 있다.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積並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夏六月, 帝下詔黜王官爵, 漢王諒軍出臨渝關, 値水潦 墩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疫. 周羅睺自東萊泛海, 趣平壤城, 亦遭風, 舡多漂沒.]
수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을 모두 원수(元帥)로 삼아서, 수륙 30만을 거느리고 치고, 여름 6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빼앗았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臨渝關)으로 나와서 홍수를 만나 군량의 운반이 이어지지 못하자,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또 전염병에 걸렸다. 주라후(周羅睺)가 동래(東萊)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쳐들어오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고 가라앉았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9년(598)
이건 틀림없는 사실 숨기기다. 임유관에서 홍수를 만나 군량 운반이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당시의 항해 방법을 생각한다면 있을수가 없는 이야기다. 당시의 항해술이라는 것은 지금처럼 바다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연안을 따라서 배를 움직이다가 폭풍을 만나면 가까운 항구에 정착해 폭풍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이었는데, 바다를 직접 가로지른 것도 아니고 포구가 바로 코앞에 있는 연안을 따라 천천히 가는데 폭풍 때문에 뱃길이 묶이고, 전체 병력의 8, 9할이 침몰했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나?
수의 육군이 철수했다는 음력 9월이면 해안을 휩쓸 폭풍이나 장마는 이미 다 지나간 때이고 아직 겨울이 다가오기도 전인데 말이다.
뭐 오늘날같은 이상기후가 속출하는 날에도 9월, 12월에 갑자기 비가 내리는 일이 숱하긴 하지만, 날씨에 변수가 워낙 많다고 쳐도
단순히 장마나 폭풍 때문에 군사가 모두 돌아갈 수는 없을 터. 아마 이때에 생각지도 못한 폭풍이 수의 군대를 덮쳤고, 그 바람에 진이 약해진 수의 군대를 고려가 기습해서 깨뜨렸다고 봐야 할 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된다. 우리는 여기서 고려와 수의 전쟁 역사, 그 속에서 잊혀진 한 인물의 이름을 찾아낼 수 있다.
강이식(姜以式). 수의 1차 침공 때에 병마원수(兵馬元帥)로서 고려군을 지휘했던 자. 오늘날 진주 강씨 일족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는 인물이다. 대원왕에게 수 문제가 오만에 가득찬 국서를 보냈을 때, "이런 오만한 국서는 붓이 아니라 칼로 대답할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수와의 일전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듣고 따랐다는 것이다.
진주 강씨 일족은 우리 나라에서는 명문가 중의 명문가, 족보에 적혀있는 인물관계에 대해서는 부정할 만한 것이 없지만, 인물이 지낸 벼슬 자체는 믿어서는 안 되는 허구의 이야기들이 섞여있다. 이를테면 신라 때에 강이식의 6세손 택인(擇仁)이나 그의 아들 진(縉)이 신라의 과거에 장원급제해 태중대부니 판내의령이니, 진양후(晋陽侯)에 봉해졌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아마도 원래의 조상을 높이려고 후대에 윤색한 것일게다. 어째서냐고? 신라 때는 과거시험으로 인재를 뽑는 제도가 그리 정착되지 못했거든.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라고 과거시험이랑 비슷한 제도가 있긴 했지만, 그게 귀척들에게까지 적용이 될만큼 유교가 신라 사회에서 뿌리를 내렸으면뭐하러 문창후가 당에 유학까지 해가면서 벼슬을 구했겠어? 더구나 밀직제학이니 밀직부사, 태중대부며 판내의령이라는 것은
모두 고려나 조선조 관직인데, 신라 때에 그런 관직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이 안 됐거든.
다만 그 집안의 전승된 기록이고 나름의 근거가 다 있었을 것이기에, 혹은 사람은 실제로 있었지만 그 사람이 받은 관직 자체를 나중에 기록하면서 혹여 잘못 기록한 것이 있을 수도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신라 말년에 전국 각지에서 발흥한 토호들이 일부러 저런 식의 관직을 사칭했는지도 모른다. 진주는 훗날 후백제의 영향권에 놓인 적도 있었으니, 진훤 정권이 진주 토호인 강씨 일족을 포섭하려고 내려준 관직을 고려 때에 족보를 처음 문자로 기록하면서 후백제가 아닌 신라에서 받은 것이라고 살짝 바꿔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후손들이 답답하게 생각해서 이러이러한 관직을 지냈을 것이다 라고, 기록이 또렷하지 않은 것을 임의로 기록해넣었을 수도 있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강이식이라는 이 장군의 존재가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때는 기록보다도 유물이 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진주 강씨 족보 사이트에 들어가서 알아보니까, 요령성 무순(撫順)현 장당향(張堂鄕)에 있는 고려영자촌(高麗營子村)이란 마을에 강이식의 묘소가 있었다고 했다. 심양현에는 원수림(元帥林)이라는 이름을 가진 숲이 있는데, '원수(元帥)'란 곧 '사령관'이라는 뜻으로 이 숲에 '원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 이 숲과 예전 '원수'라는 이름을 지녔던 자와 모종의 연관이 있었다는 의미일 터, 봉길선철도의 정착역 가운데 하나인 원수림역도 이 숲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이 역에서 동쪽으로 700m쯤 가면 그곳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큰 비가 있었고 거북좌대 위에 비석까지 번듯하게 모셔져 있었지만, 문화대혁명(10년동란) 때 홍위병들 손에 깨져버리고 무덤 있던 자리는 옥수수밭이 되어 다만 돌조각과 거북좌대만이 남아있었는데, 진주강씨종친회가 직접 현지에 찾아가 참배하고 그 거북좌대라는 것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왔다고 한다.
<2000년에 현지에서 직접 찍어왔다는 거북좌대. 강이식 장군의 묘비를 받쳤던 것으로 전함.>
거북좌대는 길이가 180cm, 폭이 100cm, 두께가 80cm였다. 원래 비석은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깨져서 파묻혔는데, 거북좌대 길이와 폭이 바로 비신의 길이와 폭으로, 비석의 남은 조각을 맞춰보니 꼭 들어맞더란다. 이것이 정말 강이식 장군의 무덤 앞에 서있던 비석이라면, 오래 전부터 이곳의 지명으로 쓰이던 '원수림'이라는 단어도 강이식의 벼슬이었던 '병마원수(兵馬元帥)'와 얼추 맞아 떨어지며, 강이식이라는 인물의 실재 여부가 확인되는 것이다. 부식이 영감도, 일연 땡중도, 안정복 노인네도 미처 못 적은 또 한 사람의 영웅의 실체가 말이다.
여담인데, 진주강씨 족보에 기록된 대로 굳이 따지면 강이식 장군은 순수 고려인은 아니다. 원래 중국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해 병마원수 벼슬을 받았다는데 그건 조작이다. 고려가 멸망한 뒤 고려의 적국이었던 당은 물론이고 신라에서조차 골품제의 영향으로 고려계를 차별하던 시대의 흔적인 것이다. 지금이야 귀화인에 대해 차별하는 것이 많이 줄었고,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굳이 그 출자(出者) 따질 필요없이 업적만 보면 된다지만, 고려 유민이라는 딱지를 달고서 고려의 적국이었던 당과 신라를 떠돌아다니며 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보면, 고려인인 강이식 장군을 직설적으로 고려인이라고 말하지 못했던 사연을 짐작할수 있다. 장군이 그냥 고려 사람이고 고려에서 병마원수로서 수에 맞서 싸웠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한 사람이니 어쩌니 둘러대야만 했던, 망국의 유민들이 당해야 했던 설움이 족보 속에도 녹아있는 것이다.
嬰陽大王(영양대왕)은 이 모욕의 글을 받고 대노하여, 군신들을 모아 회답할 문자를 보내려 하더니, 姜以式(강이식)이 가로되
“이 같은 侮慢無禮(모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글이라”
하고 開戰(개전)함을 주장하니, 대왕이 이를 樂從(낙종: 기꺼히 따름)하여 강이식을 兵馬元帥(병마원수)로 삼아, 하여금 정병 5만을 發(발)하여 臨楡關(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濊兵(예병: 隋書의 靺鞨) 1만명으로써 遼西(요서)를 侵擾(침요)하여 隋兵(수병)을 誘(유)하며, 契丹兵(글안병) 수천명으로써 바다를 건너 今(금) 山東(산동)을 치게 하니, 이에 양국의 제1차 전쟁(戰爭)의 개시되니라.
《삼국사기》에는 姜以式(강이식) 三字(삼자)가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이는 隋書(수서) 만을 抄錄(초록)한 문자인 까닭이거니와 《大東韻海(대동운해)》에는 강이식을 薩水戰爭(살수전쟁)의 兵馬都元帥(병마도원수)라 하고 《西郭雜錄(서곽잡록)》에는 강이식을 臨楡關戰爭(임유관전쟁)의 兵馬元帥(병마원수)라 하여 兩書(양서)가 不同(부동)하다. 그러나 살수전쟁에는 王弟(왕제) 建武(건무)가 해안을 맡고 乙支文德(을지문덕)이 육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의 강이식이 있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을 좇노라.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사>를 지으면서 강이식 장군의 이름을 언급하고, 또 그 참고 자료를 말하면서 《대동운해(大東韻解)》와 《서곽잡록(西郭雜錄)》 두 책의 이름을 말하셨는데, 16세기 정경세(1563∼1633)의 문집인 《우복집(愚伏集)》언행록에 겨우 '야사 서곽잡록에서 보고 쓴다[出野史西郭雜錄]'고 해서
[白沙北謫時, 或問卽 "今國事如此, 又有北憂, 大監家事, 托誰而去也." 公悽然答曰 "吾有二友, 一則已死, 一則在遠. 未及相別云." 蓋指漢陰與愚伏也.]
백사(白沙)가 북청에 유배가 있을 때[北謫] 누가 묻기를
“지금 나랏일이 이러합니다. 북쪽에서 상을 당하시게 되면 대감의 집안일[家事]은 누구에게 맡기고 가시렵니까.”
공이 처연하게 대답하였다 한다.
“나에게 두 벗이 있었는데 한 명은 이미 죽었고 한 명은 멀리 있다. 서로 떨어져서 만나지도 못한다.”
이는 대개 한음(漢陰)과 우복(愚伏)을 가리킨 것이다.
라는 몇 줄을 실었을 뿐, 《서곽잡록》은 전하지 않는다. '서곽(西郭)'이란 단어는 '서쪽 성곽'이라는 뜻이고 '서쪽 성곽의 잡록'이라는 뜻이 책 제목에 담겨있음을 보면 우리 나라 서쪽 일대의 민간전승이라던지 그런 얘기들을 모은 책이 아니었나 하고 추측해본다. 평양을 조선조까지도 고려 때의 이름을 따라 서경(西京)이라 불렀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것과 '서곽'이라는 이름이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지간에 《서곽잡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대동운해》는 지금도 남아 있다.
조선조의 학자 권문해가 지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 바로 그것이다.
[<晋州> 高句麗時, 姜以式, 爲兵馬元帥, 以禦隋師.]
<진주> 고구려 때 강이식은 병마원수가 되어 수(隋)를 막았다.
《대동운부군옥》 성씨조 中
지금 진주의 사당에 모셔진 위패에도 '고구려병마원수강이식지위'라고 써놨는데, 강이식이 1차 고수전쟁 때 활약했다는 것도 이 《대동운부군옥》을 따른 것 같다. 단재 선생께는 죄송하지만 《서곽잡록》이라는 책을 본 적이 없으니까. 여기서는 《대동운부군옥》을 갖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어쨌거나, 고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수의 1차 고려 침공은 '때아닌 폭풍'을 틈타 병마원수 강이식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주라후가 이끌던 수송선이 침몰당하고, 그로 인해 보급이 끊어진 상황에서 때아닌 장마와 기근으로 열의 여덞, 아홉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한채 실패로 돌아간다, 는 전개 그리고 이때 난데없이 일어난 때아닌 폭풍과 장마, 그리고 영양왕이 올렸다는 표문을 빌미삼아 수는 이 쓰라린 패배를 역사 기록에서 감추었다.ㅡ라고만 해두겠다.
[秋九月, 師還, 死者十八九.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某』 帝於是罷兵, 待之如初.]
가을 9월에 (수의) 군대가 돌아갔으나 죽은 자가 열 명 중 여덟 아홉이었다. 왕도 역시 두려워하셔서(?)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를 올려 ‘요동 더러운 땅의 신하 모(某)’라고 칭하였다. 황제가 이리하여 군진을 풀고 처음처럼 대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9년(598)
수와 고려 사이의 1차 전쟁은, 일단 고려의 승리로 끝이 났다.
[百濟王昌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諭以,『高句麗服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王知其事, 侵掠百濟之境.]
백제왕 창(昌)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서 군대의 길잡이[軍導]가 되겠다고 청하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고려가 죄를 자복하여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벌할 수 없다.』
고 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왕께서 그 사실을 알고는 백제의 변경을 쳤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9년(598)
허나 고려로서도 마냥 이러한 승전을 기뻐할수만은 없는 것이. 남쪽에도 수만큼의 골칫거리, 백제와 신라가 있다는 것. 백제까지 이러는 판이니 신라야 말해서 뭘 하겠나. 이러한 백제의 협공 제의를 받긴 했지만, 이 무렵에는 워낙 깨지고 퇴각한 다음이라 어쩔 바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그냥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왕은 군사를 내어 백제 변경을 친다. 정말 그랬다간 고려로서도 정말 방법이 없다. 수와의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전 병력을 그 전선에 투입해서 싸워야할 판인데, 고려로서는 그렇게 할 정도까지는 못 되니까. 실로 고려는 혼자서 저 거대한 적을 상대로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쪽의 잔챙이 두 마리까지 합쳐서.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大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11년(600) 봄 정월에 사신을 수에 보내 조공했다. 대학박사(大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옛 역사책을 요약해서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유기(留記)》라고 했다. 이 때에 와서 깎고 고쳤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이때에 이르러 단 한번 나올 뿐인 이름 이문진. 고려의 태학박사를 지냈고, 이때에 이르러 왕명으로 고려의 역사책 《유기》 1백 권을 간추려 다섯 권의 《신집》을 완성했다는 인물. 오늘날 익산 이씨 일족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는 인물이다. 익산이씨 일족의 족보로 가장 오래된 것은 1825년과 1850년에 집결된 《을유구보》와 《경술구보》가 있다. 《을유구보》에서는 "이씨의 관향인 익산은 처음은 경주로부터 옮겨 봉해졌다[李氏之貫益山者旣本自慶州移封也]"고 했다. 경주 이씨의 지파로 본 것 같다. 신라에도 이씨가 있었으니까. "백제에 있어 휘는 문진(文眞)이라 하였으니, 백제의 공주와 식읍을 익(益)에 보상(甫尙)하였다. 이런 이유로 관향으로 삼았다[甫尙百濟公主食采於益. 故因以爲貫]."고 하면서, "즉 이씨의 경주ㆍ익산, 윤씨의 파평ㆍ해평, 유씨의 문화ㆍ진주[則李之慶州益山與尹之坡平海平柳之文化晋州]"라고 하고 "有何異哉傳之"라고 적은 것은 무슨 뜻인지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발문에서는 또 "신라 말에 부마공이 백제 공주에게 장가들어 익산에 식채(食采)했다. 여기서 성과 관향을 삼았다[○于羅末駙馬公尙百濟公主食采于益山. 因爲姓貫]."고 했다.
상(尙)이라는 것은 대체로 '장가가다'라는 뜻도 담겨 있고, '식채(食采)'라는 건 '식읍을 받다'라는 뜻인데 풀이하면 "백제 공주에게 장가들어 익산에 식읍을 받았다"고 한 것으로 기존의 알려진 익산 이씨의 계보와 같지만, 발문에서는 분명 "나말(羅末)" 즉 '신라 말기'라고 했다. 익산 이씨의 조상 문진이 백제 공주에게 장가들고 식읍을 하사받은 것이 '신라 말기'라는 것이다. 《경술구보》에서는 이문진이란 이름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고 고려 때에 복야를 지냈다는 이주연(李周衍)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익산 이씨 일족들도 자기 선대인 이문진의 존재를 아예 몰랐거나 알았다고 해도 신라계인 경주 이씨와 같은 집안으로 여겼다는 증거다. 《을유구보》가 《경술구보》보다 25년 먼저 나왔으니 《을유구보》를 따라 이문진이라는 인물이 익산 이씨의 '시조'이고 '백제'의 부마가 되었다는 것은 일단 믿어보겠지만(사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믿기 어렵다) 그가 정말 고려의 기록에 나오는 이문진과 동일인물인가 하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이문진과 고려의 관계를 좀더 명백하게 밝힌, 《을유구보》보다 더 오래된 족보가 나오지 않는 이상은 이문진이 익산 이씨 일족의 시조라는 말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발음상 '나말(羅末)'과 '려말(麗末)'이 비슷해서 착각이 있었다면 다른 족보라고 착각이 없었을까. 굳이 익산 이씨만 족보 기록을 착각해서 '고려(고구려) 말'을 '신라 말'이라고 적어놨을 리가 없다. 익산이씨대종회 사이트에 들어가서 찾아본 《을유구보》와 《경술구보》에는 '?'로 표시된 탈자가 있어서, 그걸 볼수 있다면 좀더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익산 이씨가 고려계라고 보기는 힘들겠다. "이씨는 대부분 경주에서 나왔다[李氏蓋出慶州]"고 적어놓은 기록을 본다면. 익산 이씨 중에 깐깐한 사람이 있어서 경주 이씨와 익산 이씨는 다르다고 유전자검사라도 의뢰한다면 이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겠지만 아직까지 그런 사람은 찾아보지 못했다.
<정릉사터에서 발견된 벼루>
이때의 《신집》은 아마, 백제 근초고왕이 박사 고흥에게 편찬하게 했다는 《서기》나, 신라 진흥왕이 대아찬 거칠부에게 명해서 편찬하게 한 《국사》와 같은 성격의,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빛나는 업적을 후세에 전하고자 한 왕의 자부심이 깔려있을 것이다. 통일 제국 수의 군대를 격퇴한 자부심. 하지만 앞으로 더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기엔, 《신집》 5권은 너무도 분량이 적었다. 진짜 '알짜'는 바로 뒤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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