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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7>제26대 영양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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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놈에 대해서, 단재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我(아)와 非我(비아)의 鬪爭(투쟁)의 記錄(기록)이니라."이고,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라는 역사학자는 또 역사에 대해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다." 이렇게 말했다더라.(참고로 토인비는 고구려를 '한국 토착의 삼국' 가운데 북단에 있었던 나라라고 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워낙 마음에 드는 구절인지라 외고 다닌다. 두 말은 서로 통하는 것이 있어 보인다. 아(我)에 대한 비아(非我)의 도전과, 그 도전에 대한 아(我)의 응전이라. 결국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도전하고 응전하며,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아닌 나는 나를 깨뜨리기 위해, 서로에게 도전하고, 응전하고. 또 그런 삶을 반복하며, 인류의 역사는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투쟁이 시간적으로는 생명의 상속성과 공간적으로는 보편적 영향력을 드리워,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확대되고, 그러한‘심적 활동’인 투쟁에 의해, 무한한 정신과 의식의 투쟁 속에서 역사가 만들어진다. 유구하고 끊임없는 세월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진 우주 속에서, 우리가 해온 상태 그 자체, 비아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결과 상태 그 자체가. 단재 선생이 말한 우리의 역사에 대한 정의다.

 

[潤十月乙亥朔己丑, 高麗僧僧隆雲聰, 共來歸]

윤10월 을해 초하루 기축(15일)에 고려의 승려 승륭(僧隆)과 운총(雲聰)이 함께 내귀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2, 추고기(推古紀, 스이코키) 10년(602)

 

그러한 도전과 응전의 과정 속에서도, 문화의 교류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국경에 상관없이 유유히 흘러가고 얼어붙고를 반복하는 물줄기처럼, 흘러가는 문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소련 땅에도 북한 땅에도 코카콜라는 들어간다. 중국에서도 일본의 아니메를 볼 수 있고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에 우린 이미 일본만화와 아니메를 해적판으로 봤다. 그리고 우리 나라 드라마와 음악을 북한과 베트남, 저너머 남미에서까지도 보고 들을 수 있다. 그게 문화 교류다.

 

[十四年, 王遣將軍高勝, 攻新羅北漢山城. 羅王率兵過漢水, 城中鼓噪相應. 勝以彼衆我寡, 恐不克而退.]

14년(603) 왕은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쳤다. 신라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오니, 성안에서는 북치고 소리지르며 서로 호응하였다. 승은 저들이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므로,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 물러났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대원왕이 장군 고승을 시켜 신라를 친 것은 가을 8월에 있었고, 신라 기년으로는 진평왕 건복(建福) 19년이다. 북한산성은 확실히 비정하기 어렵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북한산성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이곳은 백제의 위례성(북한성)이자 고려의 남평양이었던 곳이다. 대체로 지금의 한강 건너, 서울 동북쪽에 해당한다.

 

고려가 신라에 대해 선제공격한 것은 대원왕이 즉위한 이래로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백제에 대한 보복성 침공을 감행한 뒤에 이루어진 이 침공에 대해서는 혹시라도 수와 싸우고 있는 동안 신라나 백제가 뒤통수를 쳐서 영토 빼앗아가면 가만 안 두겠다는 일종의 경고성 침공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기록을 들여다보면 고려가 별다른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신라의 원병이 이르자마자 바로 빠져버리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고려가 신라와 이렇다 할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듬해에, 문제가 사망한다.

 


<문제의 뒤를 이어 수의 2대 황제로 즉위한 양제. 위 그림은 태자 시절의 모습이다.>

 

문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양제. 휘는 광(廣). 문제의 제2황자로서, 장자 계승의 원칙에서 보면 황제는커녕 태자가 될 가능성도 별로 없어보였던 이 남자가 태자가 된 것은, 모후 독고씨의 도덕적 결벽증과 신하 양소(楊素)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형이었던 태자 용(勇)이, 독고황후가 싫어하는 후궁을 가까이했다는 이유로 모후의 눈밖에 나서 폐태자가 된 뒤, 양소의 도움으로 운좋게 태자가 된 것이다. 문제가 병석에 누워있던 동안, 그는 아버지 병수발 들던 후궁 선화부인에게 추파를 던졌고, 문제가 이것을 질책하자 광은 문제를 죽이고 선화부인과 간통했다.(《수서》나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이 양반 죽고 얼마 안 지나서 수가 망했으니까, 사가들이 양제를 일부러 깎아내리려고 이런 이야기를 써놨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렇단다.

 

재위 기간 동안에 양제는 실로 엄청난 대사업을 벌였는데, 이를테면 문제 때부터 짓고 있던 수의 황성 대흥성을 완공하고 동쪽의 낙양(뤄양)에 또 성을 쌓은 것 하며(훗날 대흥성은 당의 수도로서 장안성이라 불리게 된다) 대운하 사업 같은 것도 벌였다. 황하와 양자강을 잇는 거대한 남북운하를 통해 강남의 물자를 강북으로 유통시킬 수 있었다.(물론 고려 원정을 위한 물자 수송에도 이 운하라는 놈이 톡톡히 한몫 했지) 땅이 넓은 중국이야 타지와의 이질감 해소를 위해서라도 상호간 교류가 필요하고 때문에 이런 운하를 파야만 했겠지만, 이런 조그만 땅덩어리 안에 뭐가 이질감이 있다고 운하를 파려는 건지는 알수가 없다.

 

양제라는 양반, 강남 경관을 특히 좋아했다고 했다. 강남의 주요 도시였던 양주(楊州, 양저우)로 가기 위해서 항상 이 운하를 썼는데, 백성들이야 어떻든 말든 자기 혼자서 즐긴 거지. 물가에다 버드나무 듬성듬성 지어놓고. 왜 진시황제도 지방 순수를 위해서 만든 길에다 소나무를 5리 간격으로 심어놨다잖나. 진시황제 흉내를 내려고 했는지 이 자는 운하를 파는데만 그치지 않고 장정 백만 명을 동원해 만리장성을 증축했다. 서쪽으로는 서돌궐의 땅인 유림, 동쪽으로는 자하까지 이르는 장성을 쌓기 위해 장정 열 명에 여섯 명은 희생시켰다.

 


<만리장성. 이를 경계로 남쪽은 한족, 북쪽은 유목 기마민족들이 지배했다.>

 

[十三年夏四月辛酉朔, 天皇詔皇太子, 大臣及諸王, 諸臣, 共同發誓願, 以始造銅繡丈六佛像各一軀. 乃命鞍作鳥爲造佛之工. 是時, 高麗國大興王聞日本國天皇造佛像, 貢上黃金三百兩.]

13년(605) 여름 4월 신유 초하루에 천황(天皇미카도)은 황태자와 대신 및 여러 왕, 여러 신하에게 조하여 다 똑같은 서원(誓願)을 하기로 하고, 처음으로 구리[銅]와 비단[繡]의 장륙불상을 각각 한 구를 만들었다. 이에 안작도(鞍作島)에 명하여 조불공(造佛工)으로 하였다. 이때 고려의 대흥왕(大興王)은 일본(日本야마토)의 천황(미카도)가 불상을 만든다는 것을 듣고 황금 3백 냥을 바쳤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2, 추고기(推古紀, 스이코키) 13년(605)

 

왜국에서 구호(우마야도) 왕자가 삼보숭상과 '화(和)'의 존중을 설하는 '17개조 헌법'을 반포한 것도, 문제가 사망하고 양제가 즉위할 즈음이었다.

 

가을 7월에 천황(미카도)이 황태자에게 청하여 《승만경》을 강설하도록 영하였다. 사흘 동안 설하였다. 이 해에 황태자는 또 강본궁(岡本宮오카모토노미야)에서 《법화경》을 강설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2, 추고기(推古紀, 스이코키) 14년(606)

 

《승만경》과 《법화경》 말고도 구호(우마야도) 왕자는 《열반경》이나 《유마경》 같은 경전도 빠삭한 사람이었는데, 《열반경》에서 말한 '진리는 본래 영원히 있는 것이다[法身常住]'라는 가르침과 다섯 종류의 불성[五種佛性]의 이치를 깨닫고, 《법화경》에서 말한 삼승(三乘)과 일승(一乘)의 설 및 권지(權智)와 보지(寶智)의 종지를 밝게 열었으며, 《유마경》 불사의해탈(不思議解脫)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했다고 하며, 천평(天平, 텐표) 19년(747)에 발견된 《법화경》, 《유마경》, 《승만경》의 해석서 《삼경의소》의 찬자로도 알려진 인물이다.(사실 여부는 아직 일본 학계에서도 논의중이지만)

 

여기서 《열반경》 같은 경우는 의연에 의해서 소개된 이래 고려 안에서 '불성'에 대한 관심과 논의를 키워주었으며, 고려 불교가 가장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경전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국내성의 구귀척에 맞서는 평양 귀척들의 사상적 뒷배경을 제공해준 경전이 바로 《열반경》인데, 여기서 다루는 '불성(佛性)'유무의 논쟁, 평원왕 이후 국내성파와 평양성파를 각기 지지하는 불교 세력들이 중요한 쟁점으로 지목했던 '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위고하 상관없이 인간이면 다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선택적이고 국한적인 것인가' 라는 명제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는 점은 《법화경》이나 《유마경》, 《승만경》 등의 불경들과 공통되는 사상이기도 하다. 더욱이 《유마경》과 《승만경》은 '성속(聖俗) 차별', 즉 출가했느냐 안 했느냐의 여부를 가리지 않고 다 똑같이 부처님의 제자라고 가르치는 대승불교의 재가주의 사상이 담겨 있는 경전이다. 재가신도들을 위한 '맞춤형(?)' 경전인 셈인데, 구호(우마야도) 왕자 이전에 혜자가 이러한 불경들을 알고 있었고 이 경을 가르쳐준 것이 혜자 본인이라고 가정할 때, 고려에서는 평원왕 시기를 전후해서 점차 불교가 수도를 벗어나 지방에까지 교세가 확장되고, 그에 따라 재가 신도들도 점차 늘어나면서 신도들 사이에서도 그 '불성 유무'의 명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화경》은 특히 왕권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구호(우마야도) 왕자가 관심을 보였을 법도 하다. 물론 구호(우마야도) 왕자의 불교에 대한 그 방대한 지식을 혜자 한 사람에게서 이만큼 배웠을리는 없지만, 그래도 혜자라는 사람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준 영향이라던지, 이 무렵 고려의 불교 동향에 대해서는 나름 저 속에서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十八年, 初, 煬帝之幸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隱, 與之見帝. 黃門侍郞裴矩, 說帝曰 “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漢晋皆爲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 但楊諒不肖, 師出無功. 當陛下之時, 安可不取, 使冠帶之境, 遂爲蠻貊之鄕乎? 今其使者, 親見啓民, 擧國從化. 可因其恐懼, 脅使入朝.” 帝從之, 牛弘宣旨曰 “朕以啓民誠心奉國, 故親至其帳. 明年當往涿郡, 爾還日, 語爾王, 宜早來朝, 勿自疑懼. 存育之禮, 當如啓民, 苟或不朝, 將帥啓民, 往巡彼土.” 王懼藩禮頗闕, 帝將討之. 啓民, 突厥可汗也.] 

18년(607) (가을 8월 을유), 처음에 양제(煬帝)가 계민(啓民)의 장막에 행차했을 때, 우리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다. 계민은 감히 숨기지 못하고 함께 황제를 뵈었다.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황제에게 말하였다.

“고려는 본래 기자(箕子)에게 봉해진 땅으로, 한(漢)과 진(晉)이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노릇을 하지 않고 따로 이역(異域)이 되었으므로, 선제께서는 오래도록 정벌하려고 벼르셨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불초해서 군대가 출동하고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어찌 폐하의 때를 맞아 취하지 않고, 예의의 땅을 오랑캐 고을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지금 저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들어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해서 위협하고, 고려왕을 입조시키십시오.”

황제가 그 말에 따라 우홍(牛弘)에게 명하여 칙명을 내리게 하였다.

『짐은 계민이 성심껏 나라를 받들기에 친히 그 장막으로 왔노라.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涿郡)으로 갈 것이다. 네가 돌아가는 날, 너의 왕에게 '마땅히 빨리 와서 조회하고, 혼자서 의심하고 떨지 말라'고 아뢰라. 위문하고 양육하는 예는 마땅히 계민의 경우와 같게 하리니, 만약 조회하지 아니하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너희 땅으로 순행할 것이야.』

왕은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황제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카간[可汗]이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계민 가한. 돌궐 추장 사발략(沙鉢略)의 아들이며, 원래 이름은 염간(染干)이다. 이 무렵 동서로 쪼개져 있던 돌궐 가운데 동돌궐이 문제 때(597년)에 수에 귀부했고, 계민 가한은 그때 동돌궐의 추장으로서 문제의 딸 의성공주와 혼인하고 '계민'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양제 자신도 그를 많이 총애하던 편이었는데, 이때는 많이 놀랐을 거야. 이거 믿고 있었는데 뒤로 몰래 고려하고 놀고 있었단 말이지, 괘씸한 것.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요거 잘 됐구나 싶어서 사신편으로 협박을 한 마디 날리시는데...

 

말하자면 그런 거지. "계민을 봐라. 나한테 굽실거리니까 이렇게 좋은 대접 받고 있지 않니? 너도 말만 잘 들으면 얘보다 더한 대접을 내가 해주마. 그러니 고려왕아, 혼자서 떨지 말고 와서 나한테 한 번만 절하거라. 나는 이래뵈도 관대한 황제야."

(이건 뭐... 지가 무슨 300에서 나오는 크세르크세스 황제도 아니고....)

 

부식이 영감이야 뭐 《수서》만 보고 적어서 영양왕이 양제가 쳐들어올까봐 두려워했다지만 과연 사실일지 어떨지.(어쩌면 300에서 레오니다스 왕이 했던 것보다 더 멋진 멘트로 맞받아쳐주셨을 지도 몰라) 배구의 말ㅡ양량(수 문제의 아들로 1차 고려침공 때에 수의 군대를 이끌었음)이 못나서 군대를 이끌고도 성공하지 못했다ㅡ고. 고려와 수가 임유관에서 처음 붙었을 때 양량이 잘못해 군사가 패했다는 말인데, 이상하네? 틀림없이 그때는 폭풍과 홍수 때문에 '어쩔수 없이(?)' 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체 양량이 뭘 잘못 지휘했다는 건가? 쟤네들 참 이상해.

 

사실 고려가 백암성에서 돌궐과 맞붙어 싸운 것은 백 년도 채 안 된,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고려 사신이 돌궐 추장의 장막에 있었다는 것은, 대원왕이 돌궐과 연계해서 수와 맞서고자 했음을 암시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가 저마다 수에게 고려를 토벌해줄 것을 요청하는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수와 맞서고 있는 북방의 돌궐이나 거란과 동맹을 맺고 수와의 일전을 준비한다는 거지. 고려 사신이 돌궐 추장 계민가한을 만난 것이 영양왕 18년(607). 계산해보면 저번 2007년이, 우리 나라가 돌궐(터키)과 수교한지 꼭 1400주년이 되는 해였더라.

 


<7세기 돌궐계 왕조의 중심지였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그려져 있는 고려 사신(가장 오른쪽 두 사람). 고려는 돌궐과 연합해 수의 침공을 막고자 했다.>

 

이때에 고려가 기자지국이니 어쩌니 하면서 양제의 침략본능을 부추겼던 황문시랑 배구는 훗날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학자면 학자답게 양심을 지켰어야지 양제에게 부화뇌동해서 괜히 아부나 하려고 했다고, 《도서편(圖書編)》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려는 본디 미천해서 논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수와 당의 흥망은 모두 이 고려와 관계가 있다. 수 문제가 새로 천하를 통일했는데, 그 당시에 돌궐은 이미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했다. 양제가 순시하다가 친히 돌궐의 장막에 이르러서 우연히 고려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는 것을 봤는데, 배구의 한마디 말 때문에 결국 이런 화를 불렀다. 배구는 천하의 대세가 이미 합쳐진 것을 보고는 역시 고려에게도 조공을 바치게 해서 천하를 얻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했지만, 천하대란의 단서가 여기에서 발단될 것은 알지 못했다.

 

결국 자만심 때문에 망했다는 건가. 새겨 들어야 될 말이야. 특히 어떤 나라 대통령님은.

 

[夏五月, 遣師攻百濟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還.]

여름 5월에 군대를 보내 백제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석두성(石頭城)으로 옮겨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18년(607)

 

《수서》를 뒤져보면 계민 가한의 장막에 와있던 고려 사신이 양제와 만난 것은 가을 8월의 일이고, 고려가 백제를 친 것은 이보다 석 달은 앞서서 일어났다. 수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고려는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박도 멈추지 않았다.

 

[十九年, 春二月, 命將襲新羅北境, 虜獲八千人. 夏四月, 拔新羅牛鳴山城.]

19년(608) 봄 2월에 장수에게 명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습격해 8천 명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시켰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신라의 승려 원광이 수 양제에게 글을 올려 고려를 벌해줄 것은 이 때의 일이다. 이른바 걸사표.(내용 전문은 없지만 고려를 좀 때려주세요 하고 SOS치는 내용) 계속되는 고려의 침공 앞에 진평왕이 수와 연계하고자 승려 원광(화랑들에게 세속오계 지어준 그 양반)에게 글을 지어 수에 바치라 했고, 원광은 또 "대왕의 땅에서 살면서 대왕의 물과 풀을 먹는 자"로서 명을 감히 어길수 없다면서 수에게 글을 올린 거지. 혜자나 혜총은 각기 나라가 다르기는 했어도 불교를 매개로 해서 비교적 잘 지냈으니 승려로서도 원광의 행위는 조금 인지상정에 어긋나는 일인데...

 

신라는 수에게 고려를 멸해줄 것을 청했고, 백제는 이제 어떻게 되려나 뒷짐지고 관망하는 상황. 이제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저 통일 왕조와 맞서 싸워야 할 수밖에. 그것이 고려에게 주어진 가혹한 도전이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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