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6547305
梟音則嘯聚白山, 鴟義則喧張黑水.
이 문장만 해도 "효음(梟音)이 백산(白山)에 소취(嘯聚)하고, 치의(鴟義)는 흑수(黑水)에서 훤장(喧張)하였다" 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효음이니 소취니 치의니 훤장이니 하는 말은 모두 한자어라 알아보기 어렵다. 효음과 치의에서 '효'와 '치'는 모두 올빼미, 수리부엉이, 솔개, 이런 맹금류에 속하지만 대체로 '올빼미', '부엉이'로 정의할 수 있다. 고려 태조가 진훤백제에 보낸 표문 내용에도 "흉악함이 걸ㆍ주보다 더하고 인하지 못한 것은 경이나 올빼미보다 못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서양에서 아테네, 미네르바 여신과 연관되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과는 반대로 동양에서는 올빼미가 까마귀와 맞먹는 흉조로 꺼림의 대상이었다. 제 부모 잡아먹는 아주 못된 새라고 생각했다나?(원래는 부엉이지만 부엉이와 올빼미는 닮아서 혼동이 쉽다) 발해를 이야기하는데 '올빼미', '부엉이', '솔개'를 갖다붙였다면 이건 욕도 보통 욕이 아니다. "너는 니 부모도 잡아먹을 놈이야" 이렇게 말하는 거나 같다고 보면 된다.
"만리 벌판에 곡식을 경작하며, 요수(遼水)를 건너는 수레에 여러 번 맞섰다[萬里耨苗, 累拒渡遼之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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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1>후고려기(後高麗記)(4)
2009/04/25 06:22
고려 유민들을 규합한 보장왕이 함께 손잡고 일을 벌이려 했던 말갈족은, 고려 멸망 이후 여러 갈래로 쫙쫙 찢어졌다. 《구당서》에 보면 말갈 7부의 하나인 백산부는 고려 멸망 이후 중국 땅으로 흡수되어 주로 신라와의 전쟁에 동원되었고, 골돌ㆍ안거골ㆍ호실 등의 부족은 그 세력이 약화되어 '종래는 아무 소문도 들을 수 없었다[後無聞焉]'고 할 정도로 부족 자체가 아예 해체되어 흩어져버렸다. 나중에 무왕의 정벌을 받을 때까지 온전하게 자기 세력을 유지한 말갈 부족은 흑수와 철리, 백돌 뿐이었다. 속말은 예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고려를 버리고 당에 가서 붙은 연남생은 거란과 말갈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말갈은 요동 방면에 인접해 있던 속말말갈 부족이라고 했다. 말갈족들은 당에 가담해서 고려와 싸우기도 하고, 고려와 함께 당에 맞서 싸우기도 했는데, 앞서 말했던 당의 장수 이근행 역시 아버지 때에 중국에 투항했던 말갈족의 후손이다.
계속되는 당의 토벌을 견디지 못한 고려 유민들은 말갈이나 신라, 혹은 돌궐로 도망쳤는데, 말갈의 제족 가운데서 유독 속말말갈만이 고려 유민의 항당무장투쟁에 가담한 이유에 대해서는 우선 연남생이 거느린 속말말갈 병사들이 고려 멸망 뒤에 당군에 편입되어 당조에서 속말말갈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 중요한 이유라고 했다. 속말말갈에 대해서는 쉽게 회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臣謹按渤海之源流也. 句驪未滅之時, 本爲疣贅部落鞅羯之屬, 寔繁有徒, 是名栗末小蕃, 甞逐句驪內徙, 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 至武后臨朝之際, 自營州作孽而逃, 輒據荒丘, 始稱振國. 時有句驪遺燼勿吉雜流, 梟音則嘯聚白山, 鴟義則喧張黑水, 姶與契丹濟惡, 旋於突厥通謀, 萬里耨苗, 累拒渡遼之轍, 十年食葚, 晚陳降漢之旗.]
신이 삼가 발해의 원류(源流)를 살펴보았습니다. 고려[句驪]가 망하기 전엔 본시 사마귀만한 부락의 앙갈(鞅鞨) 족속으로서 번영하여 무리가 이루어지자 속말소번(粟末小蕃)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려를 따라 내사(內徙)하더니, 그 수령 걸사비우 및 대조영 등이 무후가 조정에 군림할[臨朝] 때 영주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황량한 언덕이나[荒丘] 냉큼 차지하였습니다. 처음 진국(振國)을 일컬으니, 그때 고려의 유신(遺燼)과 물길잡류(勿吉雜流)가 있으니 이들을 '올빼미같은 목소리로 군사를 백산(白山)에 모으고, 부엉이같은 뜻을 품고 흑수(黑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처음은 거란과 짜고 악을 행하더니[行惡], 이어 돌궐과 통모하여 만리 벌판에 곡식을 경작하면서 여러 번 요수(遼水)를 건너는 수레에 맞서며, 10년이나 오디를 먹다가 늦게나마 한에 항복하는 깃발을 들었나이다.
《동문선》 권제33, 표전(表箋)3,
발해(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
최치원의 글에서 보이듯, 신라 사람들은 평소에는 발해를 고려 후신으로 묘사하다가도, 당에다 신라의 우월함을 과시할 때에는 말갈 떨거지라고 낮춰 불렀다. 유명한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는 발해 사신을 신라 사신의 윗자리에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당에 감사하려고 쓴 글인데, 신라의 우월함을 과시하듯 늘어놓는 과정에서 발해가 형편없이 깎였다.
한편 이진충과 손만영의 난을 진압한 당은 그 해 6월에 약속대로 회양왕 무연수와 돌궐 카간인 묵철의 딸을 혼인시키려 했지만, 이씨(당 황실의 성씨)도 아닌 무씨와 혼인하기 싫다면서(아마 이건 핑계였을 듯) 8월부터 정주와 조주 등의 하북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돌궐과 당 사이의 혼담이 깨지자, 돌궐 토벌을 위해 측천무후는 그 해 9월에 적인걸과 설눌을 각각 하북도행군부원수와 안동도경략에 임명했다. 이들의 원정은 요동에서 거란 잔당 토벌의 일환으로, 대조영이 이끄는 고려 유민들을 공격하는 이해고에 대한 지원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李楷固窮○度天門嶺 祚榮引高句麗靺鞨兵大破之 楷固僅以身免]
이해고는 천문령을 넘어 끝까지 추격해왔다. 조영은 고려와 말갈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를 크게 쳐부수었다. 해고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천문령 전투. 지금의 혼하와 휘발하 사이에 있는 장령자ㅡ길림성 남부를 가로지르는 용강산의 오도구 근처에서, 대조영이 이끄는 고려 유민들과 말갈족, 그리고 이해고가 이끄는 당의 추격군이 전투를 벌였다. 혼하와 휘발하 두 강을 사이에 끼고 남북으로 뻗어 있는 산이다. 그 동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매복작전에 알맞은 지형이다.
이 무렵 대조영이 이끄는 무리들은 전투원이 몹시 부족했다. 군사훈련을 제대로 못받은 사람들도 있어 험악한 산지에서 필요한 명령체계조차 갖춰져 있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적의 위협을 피해 도망치는 유민 집단의 입장인 그들에게는 많은 관리가 필요한 '말'이 부족했다. 그들은 당과 거란의 연합군이 이끄는 기마전력을 무력화하면서 아군의 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작전이 필요했다. 그것은 당군이 천문령의 협곡을 넘어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기다려 공격하는 것.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에 보니까, 이때 대조영이 택한 전략이라는 것이, 적의 기마전력과 보병부대를 분리한 다음 보병부대를 먼저 각개격파하고, 고립된 기마부대를 습격하는 것이었단다. 그러기 위해 천문령을 빠져나와 오도구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지대ㅡ보병이 이동하기는 편리해도 기병에게는 불리한 이곳에서, 협곡 여기저기에 군사들을 숨겨놓고 당의 기마병들을 수시로 습격해 저격하면서 치고 빠지는(HIT and RUN) 전술을 택했다. 결국 보병들은 지칠 수밖에.
협곡의 출구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협곡 출구에 세워놓은 장애물(기병의 돌진을 막기 위한 장치)을 발견했고, 대조영이 직접 이끄는 유민군들이 당군을 공격했다. 이해고는 주력군인 경기병 대신 갑옷으로 중무장한 중기병을 내세워 밀어붙이고, 대조영은 말갈 궁기병들에게 활을 쏘아 당군 중기병을 막게 하면서 퇴각한다. 중기병들은 화살은 막을지 몰라도 무게 때문에 경기병보다 속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 도망치는 유민군을 당군은 곧바로 경기병을 선두로 하고 중기병들을 그 뒤에 세워서 유민군을 추격해온다.
하지만 당의 경기병들이 말갈 궁기병들을 뒤쫓는 '찰나'가 바로 대조영이 노리던 순간이었다. 대조영은 곧바로 예비로 남겨두었던 군사들을 총동원해, 당의 기병대와 분리된 보병들을 냅다 들이쳐버렸다. 협곡에서 이리치고 저리치고, 쳤다 빠졌다를 반복하는 고려군의 게릴라 전술에 맥이 빠져 이미 지쳐있던 그들을, 대조영은 고려군과 그 양익(兩翼)에 포진한 말갈족들을 이끌고 일제공격해 모조리 궤멸시켜 버렸다. 장애물이 많은 환경에서 보병을 대동하지 않은 중장비는 기습공격에 취약하다나?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말갈의 유인부대를 쫓아다니던 당의 기병들은 결국 기세를 몰아 여기저기서 기습해오는 군사들에게 각개격파당하고, 이해고는 병사 몇 명만을 거느린채 요동성 쪽으로 도망쳐버렸다. 이상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에서 발췌한, 천문령 전투의 전말이다.
[祚榮卽幷比羽之衆, 據○婁之東牟山. 靺鞨及高句麗舊人悉歸之.]
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추슬러서 읍루의 동모산(東牟山)에 거처했다. 말갈과 고려의 옛 사람들이 모두 다 돌아왔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발해고》의 이 문장을 『사불허북국거상표』와 대조하면 이것이다.
[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 至武后臨朝之際, 自營州作孽而逃, 輒據荒丘,]
그 수령 걸사비우 및 대조영 등은 무후가 조정에 군림할[臨朝] 때 영주에서 죄 짓고 도망쳐 황량한 언덕[荒丘] 하나 냉큼 차지하였습니다.
《동문선》 권제33, 표전(表箋)3,
발해(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
누군가 말했었지. "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聖歷中國號震【新唐書作振, 文獻備考曰震朝】 自立爲震國王. 築忽汗城以居, 直營州東二千里.]
성력(聖歷) 연간(698~700)에 국호를 진(震)【《신당서》에는 진(振)이라 썼고, 《문헌통고》에는 진조(震朝)라 하였다.】이라 하고 자립하여 진국왕이 되었다. 홀한성(忽汗城)을 쌓고 살았는데 곧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리 떨어진 곳이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문무왕의 편지를 갖고 《삼국사》의 기록보충을 하고 수정을 했는데,
난 최치원의 글을 갖고 《발해고》의 보충을 하고 있다.
[始稱振國, 時有句驪遺燼勿吉雜流, 梟音則嘯聚白山, 鴟義則喧張黑水.]
처음 진국(振國)을 일컬었는데, 그때 구려유신(句驪遺燼)과 물길잡류(勿吉雜流)의 효음(梟音)이 백산(白山)에 소취(嘯聚)하고, 치의(鴟義)는 흑수(黑水)에서 훤장(喧張)하였습니다.
《동문선》 권제33, 표전(表箋)3,
발해(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
발해라는 나라의 처음 이름은 진(震)이었는데, 《구당서》에서는 진(震)이라고 적고 《신당서》에서는 진(振), 《문헌통고》에서는 진(辰)이라고 적었다. 《신당서》의 '진'은 뭔가를 크게 '떨치다'라는 의미인데 굳이 여기서는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문헌통고》의 '진'은 중국에서 진한(辰韓)을 표기하던 것과 같은 글자. 단재는 '진'이라는 말은 '크다', '모두', '위', '으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마한의 총왕(천자)이었던 진왕(辰王) 또한 '위대한 군주'라는 뜻에서 그런 호칭을 붙인 것이고 대조영 역시 '크고 위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진'을 국호로 삼은 것이라고 <전후삼한고>에서 주장했다. 홀한성의 '홀한(忽汗)'이라는 말을 '홀(忽)'을 고려에서 '성(城)'을 가리키던 단어로 보고, '한(汗)'이라는 말을 '크다[韓]' 내지는 '간(干)'이라는 수장의 칭호, 아니면 몽골족이나 만주족들이 저들 추장을 부르던 '칸(Khan)'하고 같이 봐서 '성의 으뜸[城王]'이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라고 하면 그것도 갖다붙이기의 하나겠지.
이 무렵 대조영을 따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참여한 집단은 대개 세 부류였다. 하나는 대중상, 대조영 부자와 함께 681년 강제사거되는 와중에 영주에 잔류하게 된 고려 유민 즉 고려별종(高麗別種)이고, 다른 하나는 걸사비우가 죽은 뒤 대조영이 끌어들인 속말말갈 반당세력, 그리고 당에서 이들을 회유할 때에 요동과 요서에서 모여든 고려의 옛 백성들, 고려여종(高麗餘種)이었다. 여기에 천문령 싸움 이후에 참여한 집단과 대조영에게 온 구려유신과 물길잡류가 발해 건국의 핵심이 되었다.
옛날 글이 다 그렇지만 최치원의 글은 유독 압축이 많고 옛날 중국 고사에서 나온 단어를 인용한 것이 많아서, 중국 고사에 지식이 없는 내가 저 문장을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梟音則嘯聚白山, 鴟義則喧張黑水.
이 문장만 해도 "효음(梟音)이 백산(白山)에 소취(嘯聚)하고, 치의(鴟義)는 흑수(黑水)에서 훤장(喧張)하였다" 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효음이니 소취니 치의니 훤장이니 하는 말은 모두 한자어라 알아보기 어렵다. 효음과 치의에서 '효'와 '치'는 모두 올빼미, 수리부엉이, 솔개, 이런 맹금류에 속하지만 대체로 '올빼미', '부엉이'로 정의할 수 있다. 고려 태조가 진훤백제에 보낸 표문 내용에도 "흉악함이 걸ㆍ주보다 더하고 인하지 못한 것은 경이나 올빼미보다 못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서양에서 아테네, 미네르바 여신과 연관되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과는 반대로 동양에서는 올빼미가 까마귀와 맞먹는 흉조로 꺼림의 대상이었다. 제 부모 잡아먹는 아주 못된 새라고 생각했다나?(원래는 부엉이지만 부엉이와 올빼미는 닮아서 혼동이 쉽다) 발해를 이야기하는데 '올빼미', '부엉이', '솔개'를 갖다붙였다면 이건 욕도 보통 욕이 아니다. "너는 니 부모도 잡아먹을 놈이야" 이렇게 말하는 거나 같다고 보면 된다.
소취나 훤장은 네이버 한자사전에 찾아보니까, 소취만 '군호(軍號)로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음'이라고 정의가 되어 있더라. 훤장은 안 나오는데 '喧'이라는 글자에 '지껄이다', '떠들썩하다', '시끄럽다', '슬피 울다'로 나온다. 효음과 치의가 소취하고 훤장한다. 부엉이와 올빼미가 울음소리로 군사를 불러모으고, 또 떠들썩하게 만든다. (한밤중에 부엉이 울음소리 들리면 그날은 꼭 누가 하나 죽는다지 아마.) 그것도 백산과 흑수에서. 즉 이 문장은 우리말로 직역하면 '올빼미같은 목소리로 군사를 백산에 모으고, 부엉이같은 뜻을 품고 흑수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백산과 흑수에서 벌어지던 발해의 군사행동 및 건국활동을 악의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백산에서 군사를 모았다고 한 말은 곧, 《구삼국사》나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에서 "고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해서 나라를 세워 발해라 했다."고 한 문장과도 합치한다. 백산은 곧 태백산이다.
대조영 휘하의 말갈족ㅡ옛 걸사비우가 거느리던 이들은 따져보면 꽤나 대조영에게 고분고분한 편이다. 걸사비우 사후에도 별도의 행동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대조영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러 떠날 때 그들은 모두 대조영을 따랐다. 그렇게 대조영은 지금의 동모산에 이르러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 진국의 왕으로 섰다. 이것이 당 측천무후 성력(聖歷) 원년, 신라 효소왕 7년, 일황 문무(文武, 몬무) 2년으로 간지로는 태세 무술(698)의 일이었다. 안정복 영감은 《자치통감》과 《문헌통고》 발해전(渤海傳)을 인용해 서기 700년에 측천무후의 명으로 거란의 잔당을 쳐서 평정하던 이해고가 대조영의 군사까지 추격하다가 천문령 너머에서 패전해서 돌아왔다고 한 것을 두고 대조영의 발해 건국이 700년에 있었다고 적었지만, 《속일본기(쇼쿠니혼키)》에 발해 건국을 일황 문무(몬무) 때의 일이라 적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틀린 얘기다.
<발해 제국의 발상지 동모산>
동모산은 지금의 길림성 돈화시 현유향 성산자산에 해당한다. 《구당서》에는 계루고지, 《신당서》에는 읍루고지라고 되어있는 이곳은 발해의 최초 도읍지로 기록에는 구국(舊國)으로 나오는 곳이다. '구국'이라는 건 '옛 나라(수도?)'라는 의미인데, 누구의 옛 나라였다는 거지? 고려? 아니면, 읍루?
이곳은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장백산의 빽빽한 밀림지대, 그 위에는 거란과 돌궐이 있어 당의 침공을 막는 중간방벽이 되어주고, 송화강 일대의 넓은 평야와 두만강 남쪽의 철광지대가 펼쳐져 있어 나라를 세우기에 적합한 땅이었다. 대조영이 당의 추격군을 격퇴하고 정착해서 도성을 쌓기 전에 이미, 건국터로서 군사적 목적뿐 아니라 행정 중심지 즉 임시수도로서 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마치 추모왕이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서쪽에 궁궐 대신 임시로 지었다던 초막처럼, 아직 국세가 안정되지 못하고 당의 추격이 언제 있을지 모르는 군사적 위협 앞에서 수도 역시 대규모의 요새로 지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세기까지도 동모산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는데, 1949년 돈화 부근의 육정산 고분군에서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돈화가 제국의 초기 도읍지였음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다. 그와 동시에 돈화시 서남쪽에 있는 성산자산이 바로 동모산이고, 그곳에 남아 있는 산성이 바로 대조영이 쌓은 성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성산자산은 해발 600m 높이의 작은 산으로, 돈화분지의 평야지대 안에 외따로이 솟아 있다. 그 중턱에 남아있는 산성은 길이가 2km 정도로 돌과 흙, 모래를 섞어 쌓았는데 위에서 보면 타원형에 가깝다. 성벽 높이는 1.5-2.5m, 밑변 너비는 5-7m 정도. 남쪽 벽에 망보는 치(雉)가 세 군데 남아 있다.
바다는 옛 숙신족ㅡ예족의 터전이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저항없이 영역을 넓힐 수도 있고, 연해주를 확보함으로써 일본과 교류할 수 있었다. 당과 신라 양쪽을 가상적국으로 삼은 판에, 진으로서는 어떻게든 자신의 우호를 많이 만들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대상은 서북쪽의 거란족과 해족, 돌궐, 그리고 동쪽 바다 너머의 일본이었다.
[遂遣使交突厥, 略有扶餘沃沮朝鮮弁韓海北十餘國. 東窮海西契丹, 南接新羅, 以泥河爲界. 地方五千里, 戶十餘萬, 勝兵數萬. 學習書契. 俗與高句麗契丹略同.]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돌궐과 통교하며, 부여와 옥저, 조선, 변한, 그리고 해북(海北) 등지의 10여개 국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거란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삼았다. 지방이 5천 리에 호는 10여만, 훈련 잘 된 군사가 수만이었다. 글을 배우고 익혔다. 습속은 고려나 거란과 대략 같았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처음은 거란과 짜고 악을 행하더니[行惡], 이어 돌궐과 통모하였다[姶與契丹濟惡, 旋於突厥通謀]."
최치원이 묘사한 것은 처음 거란의 반란에 동참했던 대조영의 무리가 백산에서 세력을 키워 돌궐과 통모하게 된 사실을 설명한다. 《신당서》를 인용한 《발해고》는 발해가 돌궐과 통모한 뒤, 부여ㆍ옥저ㆍ조선ㆍ변한 및 바다 북쪽의 10여개 국을 공략해 차지했고 동쪽으로 바다, 서쪽으로 거란, 남쪽으로는 이하를 경계로 신라와 접하고 5천리 강토에 10만여 호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마치 한꺼번에 일어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그건 사실과는 어긋난다.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 된 마당에 어떻게 그렇게 넓은 영토를 얻었겠으며, 만약 그랬다면 고왕 사후 10대 선왕까지 평정이 안 된 말갈 제족이 남아있었을 리가 있겠나. 아마 후대의 기록을 마치 개국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끌어올려 적어놨을 것이다.
"만리 벌판에 곡식을 경작하며, 요수(遼水)를 건너는 수레에 여러 번 맞섰다[萬里耨苗, 累拒渡遼之轍]."
다만 이 짧은 문장, 최치원이 묘사한 이 문장은 발해를 건국한 뒤 대조영이 자신의 영토 안에서 행했던 정책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도와준다. '만리'라는 거리가 대조영의 영토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조영의 거점과 당의 수도 사이의 거리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전자라면 건국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만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넓은 세력권을 차지한 대조영의 수완에 다시금 감탄하게 되고, 후자라면 당이 함부로 발해를 공격하지 못했던 이유ㅡ'길이 멀다'는 단어에 대해 되새기게 된다. 영주(조양)에서만 2천리 되는 거리라지 않던가.
[時奚契丹皆叛唐, 道路阻絶, 武后不能致討焉.]
그때에 해(奚)와 거란 둘 다 당에 반기를 들어 길이 막혔으므로 무후는 이를 토벌하지 못했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동사강목》에 보면, 대조영은 나라를 세운 뒤 곧장 신라에도 사신을 보냈다.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에 이른바
[初建邑居, 來憑隣援, 其酋長大祚榮, 始授臣蕃第五品大阿餐之秩.]
그들이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고 와서 인접(隣接)을 청하기에, 그 추장 대조영에게 비로소 신번(臣蕃)의 제5품 벼슬인 대아찬(大阿餐)을 주었습니다.
《동문선》 권제33, 표전(表箋)3, 발해(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당 소종 건녕 4년(897)에 최치원이 당 조정에 올린 글인데, 발해 사람으로 당의 빈공과에 합격한 적이 있는 발해의 재상 오소도가 자신의 아들 광찬을 신라의 최언위보다 윗자리에 있게 해달라고 소종 황제에게 청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었고, 이에 최치원은 신라 조정을 대신해 당에 글을 올리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진에게 신라가 대아찬 벼슬을 줬다는 것은 신라 쪽에서 과장한 것이고, 그냥 신라가 진과 서로 수교했다, 속된 말로는 얼굴마담끼리 서로 '너도 있었냐?'하고 살짝 스쳐지나가는 정도로 한번 만났다 이 정도로 해석하면 되리라.
중요한 건 이때 신라가 당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신라와 당 사이에 벌어진 나ㆍ당 전쟁(676)이 끝난 뒤, 발해가 건국되기까지 신라는 두 번(686년과 699년), 당은 세 번(681년과 692년, 693년) 서로에게 사신을 보냈다. 더구나 692년에는 그 유명한 '묘호 논쟁'도 있었다. 신라에서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에 당조에서 항의한 사건(이라고 해봐야 당의 사신 독단으로 벌인 헤프닝 정도였겠지만) 신라가 당과 사이가 좋지 않은 만큼 그들에게 사신을 보내 수교해놓자고 대조영은 생각했을까. 그럼에도 신라는 바로 이듬해에 사신을 당에 보내버렸다. 그리고 효소왕이 죽은 뒤 성덕왕 때에 이르면 당에 43차례나 사신을 보낼 정도로 두 나라 관계는 가까워진다.
이게 뭐냐면 옛날 금화다. 발해통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대진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발해의 화폐라며 공개한 것이다. 3*5, 개당 무게는 30g. 앞에는 '발해통보'라는 네 글자와 함께 '천통팔년(天統捌年)'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천통(天統)은 즉 '하늘을 통일한다'라는 뜻을 가진 말로 《규원사화》나 《발해국지장편》에도 나오는 대조영의 연호다.
이걸 공개한 교수는 이 화폐에 대해서 대조영이 자신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서 본인이 쓰던 천통 원호를 적어넣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인지는 난 모르지. 천통 8년이라고 했으니 대조영이 진을 세운 698년을 기준으로 하면 서기 705년인데, 이 화폐가 발행된 때는 아직 '진'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을 때의 일로 '발해'란 국호를 쓰기 8년 전의 일. 더구나 발해 사람들은 본인들 스스로가 고려의 후신이라고 자처하면서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까지 자국 왕을 고려왕이라고 했는데, '고려'나 '진'이라는 이름을 놔두고 뭐하러 '발해'라는 이름을 썼겠어.
대조영의 아들 무왕 이후로 발해의 국왕들은 대대로 연호를 썼고 그것이 중국의 《구당서》나 《신당서》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정작 대조영이 어떤 연호를 썼는지는 기록에 안 나와서 모른다. 고로 이 금화가 발해의 것인지도 의심스럽지만 대조영이 정말 '천통'이라는 연호를 썼는가 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태씨족보》가 대조영의 연호를 천통(天統)이라고 적은 것은 아마도 《발해국지ㆍ장편》에 따른 것 같다. 만주 랴오둥[遼東] 지역의 학자였던 학자 김육불이라는 사람이 지은 책인데, 중국 본위로 엮어졌기 때문에 발해를 보는 관점과 이론에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발해사 연구에 크게 기여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김육불 역시도 대조영을 고려 출신으로 보고 발해가 고려 문화의 연장선에 놓여있음을 강하게 주장했었다.)
[中宗卽位, 遣侍御史張行○, 慰撫之. 王亦遣子入侍.]
중종이 즉위하자(705)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을 보내어 위무했다. 왕도 아들을 보내어 궐에 들어가 천자를 알현시켰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10년이나 오디를 먹다가 늦게야 한(漢)에 항복하는 깃발을 들었다[十年食葚, 晚陳降漢之旗]."
발해와 당의 수교를 최치원은 이 문장으로 압축해 읊었다. 이 문장도 참 얄궂은 게 뭐냐면 처음에 발해가 백산과 흑수에서 말갈 제족을 통합하던 과정을 두고 뭐, 부엉이니 올빼미니 하고 안 좋은 이미지 갖다붙여서 불렀잖아.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가서 '오디', 그러니까 뽕나무 열매 검색을 해봤더니 《학봉집》(학봉 김성일 문집)에 상효(桑鴞)라는 단어가 나오대? 어디서 나온 말인가 밑에 해석 달아놓은 걸 보니까 《시경(詩經)》노송(魯頌)편에 이런 노래가 있단다.
翩彼飛鴞 이리저리 나는 저 올빼미
集于泮林 저 반궁의 나무숲에 모였네.
食我桑黮 우리 뽕나무 오디 먹고
懷我好音 고운 소리로 날 부르네.
상효라는 이 단어는 '교화에 감화를 받아 지난날의 흉포함을 고치고 착하게 되었다'는, 한 마디로 손 씻고 개과천선했다 뭐 이런 뜻이다. 이게 뽕나무 '상'에 올빼미 '효'를 쓰는데 올빼미하고 부엉이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것이 오디를 먹으면 목소리가 고와진다나. 발해를 가리켜서 '올빼미'라고 해놓고 '10년간 오디를 먹었다'는 건, 내심으로는 당의 문화를 찬탄하고 또 두려워하면서도 겉으로는 표현을 못하고 끙끙대면서 10년이나 찌질댔다는 그런 식으로 발해를 깎아내린 거야.
《당서》에 보면 이때에 대조영이 당에 보낸 것은 왕자 문예, 대조영의 둘째 아들이자 훗날 2대 무왕으로 즉위하는 대무예의 동생이다. 당과 진 사이의 분쟁과 갈등을 해소하고, 정보를 빼내는 것이 그의 역할. 이 무렵 측천무후가 중종에게 다시 제위를 돌려줌으로서, 당은 다시 이씨 왕조를 회복하고 신룡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정해 반포했다. 그리고 장행급을 파견해 진을 위무한다. 당이 겁내는 것은 진과 돌궐의 연합이었다. 만리장성 끝자락 연산줄기를 넘어 돌궐족과 진이 연합해 당에 쳐들어온다면 그것은 골칫거리다.(실제로 당은 돌궐과 화친을 맺은 이듬해에야 진과 정식으로 국호를 수립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고려 멸망 이후 흩어졌던 옛 세력들을 대조영은 하나하나 수습해나가며, 고려 부흥이라는 원대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나갔다. 당으로서는 이진충-손만영의 난 이후 거란족에게 빼앗긴 영주 지역을 탈환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로 부각되었고, 어차피 돌궐이나 거란, 해족들에게 후방을 공격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진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진도 당과 사이가 계속 나빠 봤자 좋을 것 없었기에, 711년 11월에 먼저 사신을 당에 보냈고, 2년 뒤 돌궐과 화친을 맺은 당은 진에 사신을 보내 화답했다.
[玄宗先天二年, 遣郎將崔忻, 冊王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 以所統爲忽汗州, 領忽汗州都督.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自是以後. 世朝獻唐, 餘幽州節度府相聘問.]
현종 선천(先天) 2년(713) 낭장(郎將) 최흔(崔忻)을 보내어 왕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였다. 통솔하는 곳을 홀한주(忽汗州)라 하며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직위를 받게 했다. 처음으로 말갈의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고만 했다. 이때부터 대대로 당에 조공했는데 유주절도부(幽州節度府)와 더불어 서로 예를 갖춰 방문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4년 전인가, 2006년이니까 4년 전이다. 우리 나라에서 『북관대첩비』 반환된다고 한창 들떠있던 때였지? 그때 중국에서도 일본에 문화재반환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북관대첩비』처럼 일본 황궁에 정원석처럼 놓여있던 『홍려정비』가 그것이다. 러ㆍ일 전쟁 때 일본 해군이 뤼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1905년에 뤼순을 함락시켰는데, 그곳에서 이 비석을 발견하고 일본으로 가져와 1908년 메이지 덴노에게 전리품으로 바쳤다.(뤼순이면 안중근 장군이 숨을 거둔 그곳인데...) 이 『홍려정비』를 세운 것이 바로 최흔이다.
높이 1.8m에 폭 3m로 『광개토태왕릉비』나 『진흥왕순수비』에 비하면 '애기'정도밖에 안 되는 이 비석이 세워지게 된 것은 최흔이 돌아오는 길, 이곳에 들러 우물을 파고 그 기념으로 새긴 데에서 연유한다. 뭘 뜬금없이 우물은 팠는지 목 말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뤼순시에서 비석기념관까지 세울 정도로 눈에 불을 키고 있는 이 『홍려정비』의 내용은 이렇다. 진짜 별거 아니다.
[勅持節宣勞靺鞨使, 鴻臚卿崔忻井兩口永爲. 記驗開元二年五月十八日.]
칙지절선무말갈사(勅持節宣勞靺鞨使) 홍려경(鴻臚卿) 최흔은 우물 두 개를 파서 영원히 남기노라. 개원 2년(713) 5월 18일에 기험(記驗)하노라.
일본 궁내청에서야 이 비석이 국유 재산인 만큼 반환은 물론 공개도 안 하고 있다고 그래서 사진은 찾지 못했다. 아사히신문에서 이걸 보도할 때에는 중국이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하는 역사전쟁에 이 『홍려정비』를 이용하기 위해서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고, 우리 나라에서도 '발해의 유물'인 『홍려정비』를 중국측에서 반환을 요구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비석을 중국이 우리 나라와의 역사논쟁에서 “발해는 당의 지방정부로 중국 역사에 속한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할 유력한 물증이 될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과연 이 비석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공식활동이 있었고 그 결과로 세워진 비석도 아니고, 최흔 자신이 독단으로 우물 파고 그걸 기념하기 위해 독단으로 여기에다 세운 비석 아닌가. 지절선무말갈사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발해에서는 이미 '진(震)'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었는데 굳이 '말갈'이라고 쓴 것에서 이 비석을 쓴 사람의 '정신상태'가 이미 중화사상에 찌들어 있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발해와 당나라가 우호를 맺으려는 상황에서 그렇게 발해의 자존심을 건드릴 소지가 다분한 '말갈'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적어넣어 놓으면 발해 사람들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뒀을까?
[屯勁兵於扶餘府, 以備契丹.]
부여부(扶餘府)에는 강한 군사를 두어 거란에 대비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부여부는 옛 북부여성주. 당에 맞서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있던 11개 성의 하나다. 고려 때에는 조리비서(助利非西)라고 불리며, 고려의 대사자로서 이곳의 수사(守事) 벼슬을 지냈던 모두루가 '고려 천하에서 가장 성스러운 땅'이라며 자부심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발해가 들어선 뒤, 발해 조정은 이곳을 거란과 대치하는 최전방 군사기지로 삼았다. 부여부가 발해의 군사기지가 되었다면, 부여부 주변의 신성이나 요동성 같은 곳도 부여부 관할로 고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간혹 해봤다. 압록강 북쪽 11개 고려성 가운데 안시성(안촌홀) 같은 것은 결국 당에게 함락당했으니 11개 성이 모두 발해의 수중에 들어갔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안시성과 함께 항복하지 않고 버티던 북부여성주가 발해의 부여부가 되었다면 부여성과 멀지 않은 신성(구차홀)도 당에게 함락되지 않고 발해가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발해에게 귀부했다, 즉 고려의 옛 방어선 가운데 일부가 회복되어 발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오동성터>
육정산고분군 바로 서쪽으로 약 2km쯤 되는 곳에 영승(永勝)유적이 있는데, 이곳이 동모산에 이어 건설된 발해의 도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곳이다. 그 전에는 한동안 돈화 시내에 있는 오동성(敖東城) 터를 발해의 첫 번째 도성 즉 '구국'으로 봤었는데, 이곳의 회(回)자형 유적이 요(遼) 시대의 것으로 간주됨과 동시에 육정산고분군 일대가 발굴되면서 영승유적이 동모산 다음으로 갖춰진 발해의 도읍지라는 것이 거의 유력해졌다. 영승유적에서 한동안 머무르다가 오동성으로 옮겨갔을 수도 있다.
<오동성 실측도.>
오동성 성벽 밖으로는 해자를 둘러파고, 북쪽과 남쪽에 통구령산성과 성산자산성을 위성으로 두고 주변에다 온갖 방어성들을 쌓아서 갖추는 등 방어체제를 갖추었다. 훗날의 일이지만 문왕이 수도를 상경으로 옮겼을 때에 상경과 구국 사이가 3백리가 된다고 기록에 나온다. 상경용천부가 있던 영안현 발해진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3백리쯤 된다나. 성 안에는 구들을 갖췄던 흔적도 있고 도자기류나 철제품 같은 것도 나왔단다.
딴에는 자료를 이것저것 찾는다고 찾는데, 아무래도 책상다리 지식이다보니 실제와 다른 부분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건 내가 결코 바라지 않는 최악의 사태다. 책상 앞에서 책만 뒤적거리고 쓰는 이야기니 그 정도 한계야 어쩔수 없겠지. 하지만 어찌 됐든 난 사관(자칭)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왜곡'이니 '엉터리'니 하는 말보다 더한 욕설이 있을까. 적어도 지금까지 들은 욕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자존심이 상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더이상은 욕을 듣고 싶지도 비난을 받고 싶지도 않다. 되도록이면 '사실(Fact)'을 더 많이 반영하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 심정이다.
대조영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구국'에 대해서 뭐라 말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단순하게 '구국'이 '발해의 옛 수도'라는 뜻으로 쓰인 것은 아닌 듯 하다. 대조영의 손자인 문왕이 '구국'에서 '상경'으로 옮기는 가운데 '현주'라는 곳을 수도로 삼은 일이 있는데, 만약 '(발해의)옛 수도'라는 뜻으로 '구국'이라는 이름을 썼다면 왜 동모산에만 '구국'이라고 부르고 현주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은 걸까. 수도 차별도 아니고. 대조영의 첫 도읍을 '계루고지'라고 부른 《구당서》의 기록을 생각할 때, '구국'이라는 말은 대조영이 딴 길로 안 새고 고려 옛 땅을 제대로 잘 찾아갔다는 반증이 아닐까 한다. 그곳에서 당의 공격이 언제 계속될지 몰라 저런 식으로 철저한 방어요새를 쌓고, 주변 세력을 포섭하면서 나라 복원에 힘쓰다가 당과의 교섭이 이루어지고서야 비로소 군사요새같은 비좁은 수도에서 벗어날 마음을 먹었을 대조영의 마음을 생각하면 참, 나라를 새로 만드는 것도 부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말갈(촌놈)을 데리고.
[十二月, 大赦, 築開城.]
12월에 크게 사면하고 개성(開城)을 쌓았다.
《삼국사》 권제8, 신라본기8, 성덕왕 12년(713)
성덕왕 12년에 쌓았다는 개성, 훗날 태조 왕건의 수도가 되는 이곳은 신라에게 편입되기 이전에는 옛 고려령으로 동비홀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한주에 속한 군의 하나로 주변의 덕물현과 임진현을 거느렸는데, 덕물현은 훗날 최영장군의 사당이 들어서는 덕물산이 있는 곳이고, 임진현은 고려 부흥운동의 수장이었던 검모잠의 고향이라는 연고가 있었다.
[開城郡, 本高句麗冬比忽. 景德王改名. 今開城府.]
개성군(開城郡)은 본래 고구려의 동비홀(冬比忽)이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개성부(開城府)이다.
그런데 왜 이제와서 개성까지 가갖고 성을 쌓는 거야? 라고 물어볼 수는 없지. 자기네들도 나름 이유가 다 있었으려니 할 뿐이지. 지금은 신라가 북쪽 진출ㅡ정확히는 옛 남부 고려령인 패강 이남에 대한 개발을 진행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발해의 팽창을 들고 있다. 발해는 그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서 이제 새롭게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冬十月, 流星自昴入于奎, 衆小星隨之. 天狗隕艮方. 築漢山州都督管內諸城.]
겨울 10월에 유성이 묘(昴)에서 규(奎)로 들어가니,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뒤따랐다. 천구(天狗)가 동북방[艮方]에 떨어졌다. 한산주도독 관내에 여러 성을 쌓았다.
《삼국사》 권제8, 신라본기8, 성덕왕 17년(718)
묘에서 규로 들어가는 유성을 따라 여러 작은 별들이 들어가고, 동북쪽에는 천구성이 떨어진다. 천구성은 유성이나 혜성을 두루 일컫는 말이지만, 민속에서는 일종의 '요성(妖星)',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곤 한다. 신라의 동북쪽 변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조짐들(발해의 팽창과 성장)이 일련의 천문상의 흉조와 맞물려, 신라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인 메시지로 다가왔을 지도 모르겠다.
<무장사지 3층 석탑. 문무왕은 당군을 축출한 뒤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뜻으로 병장기를 이곳에 파묻었다.>
백제도 고려도 모두 망했고 당도 물러간 상황에서 두 번 다시 전쟁 치를 일 없겠지 생각하고 병장기도 땅에 파묻었는데, 동북쪽에서 또다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 것을 보고 신라 사람들은 또다시 침공당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더구나 발해는 처음 건국할 때부터 짙은 고려 계승성을 드러낸 나라. 고려를 멸한 신라나 당에게 결코 호의적일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도 당에 빌붙어 고려를 무너뜨린 신라에게는 더더욱.
[玄宗開元七年王薨. 三月丙辰赴唐.]
현종 개원 7년(719)에 승하하였다. 3월 병진에 당에 고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발해라는 국호 말인데, 그 이전에 쓰던 '진(震)'이라는 이름도 이 '발해'라는 이름도, 모두 당에서 붙여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예맥조선(濊貊朝鮮)이라는 이름이 고대 중국의《관자》라는 책에서는 '발조선(發朝鮮)'으로 표기되는 것처럼, 발해도 원래는 '예맥해(濊貊海)'라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니혼쇼키》에서는 백제 사람들이 《백제기》와 《백제본기》에서 고려를 '맥(貊)'이라고 불렀다고 그랬으니 '예'자는 떼고 '맥', '맥해'라고 불렀을 터다. '예'는 당연히 말갈(촌놈) 차지지. 중요한 게 뭐냐면 발해 사람들이 당으로부터 국호를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들을 불렀다는 것이고, 거기서도 우리는 발해 사람들이 가졌던 '자주'지향적인 요소를 찾아낼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영주 탈출과 천문령의 싸움, 그리고 발해의 건국과 당과의 수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업적을 남기며 발해의 창업군주로서 우뚝 서신 대조영은, 재위 21년만에 가셨다. 《구당서》에 기록된 바 그것은 당 현종 개원 7년 기미(719) 3월 정유일. 그가 죽은 뒤 내려진 시호는 고왕(高王). 당의 고조(高祖)처럼, 한 나라를 일으킨 시조왕께 발해 사람들은 그들만의 묘호를 바쳤다. 그들이 생각하는 발해의 대조영은 뛰어나고도 위대한 영걸이었다. 그런 영걸마저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무덤 자리가 어디였는지 확인되지 않으니, 세월이라는 것은 그래서 무상한 것인가보다. 자신의 무덤을 따로 만들지 말고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라던 문무왕의 말이 떠오른다. 그것은 유조라기보다 차라리 인생무상을 읊은 시에 가까웠다.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산과 골짜기는 변화하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아가니,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오왕의 북산무덤에서 어찌 금오리 향로를 볼수 있을까.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위주가 묻힌 서릉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전할 뿐.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지난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나뭇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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