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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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2. 산포수 의병부대의 결성과 항전
 
(4) 갑산읍 전투
 
일본군이 삼수에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에게 참패했다는 보고에 접한 일제는 의병들을 진압코자 각 부대 연합의 대병력을 출동시켰다. 즉 일본군 동부수비관구 사령관 마루이(丸井) 소장은 의병진영의 강성함에 크게 놀라서 북청에 있는 일본군 보병 제50연대 제3대대장 미끼(三木, 삼목) 소좌로 하여금 북청 수비대의 장교 이하 보병과 기병 18명, 장항리에 파견된 아오또(靑砥, 청지) 대위 이하 50명, 성진(城津) 수비대장 나까무라(中村, 중촌) 대위 이하 80명, 그리고 함흥에서 북청에 파견된 도요시마(豊島, 풍도) 기병소위 이하 26기(騎) 등 175명으로 ‘대토벌대’를 편성하여 삼수에 있는 홍범도 등의 의병들을 공격케 했던 것이다. 여기에 삼수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각지의 수비대가 합류하였으니 토벌대의 규모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
 
이러한 긴박한 정세에 부응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는 막강한 대병력의 일본군이 출동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홍범도와 차도선은 휘하 의병들을 집결시키고 여러 정탐꾼을 보내 적정을 탐지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의병들을 적극 지지하고 성원해 주는 주민들의 물심양변의 협조하에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한 치밀한 작전계획을 짜기에 이르렀다. 이 때 특기할 만한 점은 정평 지역의 포수들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의병부대가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에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홍범도와 차도선은 1908년 1월 9일 막하의 한 부대로 하여금 삼수군의 중평장 남쪽 약 2킬로미터 지점의 고지인 운봉(雲峰)을 선점하여 일본군의 진로를 차단하며 지연작전을 펴다가 후퇴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삼수성에 있던 주력부대는 재빨리 갑산 방면으로 이동하게 했다.
 
의병대의 이러한 주도면밀한 응전태세를 알 까닭이 없는 일본군은 그 무렵 세 방면에서 삼수성을 포위하여 압축해 들어오고 있었다. 유리한 고지를 미리 차지하여 일본군을 요격하려던 일단의 의병들은 마침내 1908년 1월 9일 아오또 대위가 이끄는 50여 명의 일본군 토벌대와 조우하여 격전을 벌여서 일본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힌 뒤에 예정된 대로 산악의 고지를 타고 갑산 방향으로 잠적해 버렸다. 일본군 토벌대는 의병부대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중평장에서의 전투에 열중한 나머지 그들이 승리한 것으로 착각하고 의병 주력부대의 갑산 이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 뒤 일본군은 같은 날 의병들이 아직 삼수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 아오또 지대는 계속해서 중평장에 주둔하고, 80여 명으로 이루어진 나까무라 대위의 일대는 계속해서 중평 방면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미끼 소좌가 이끄는 한 부대는 삼수 전투에서 패주한 혜산진 수비대와 합세하여 신동(新洞)에 도착했고 도요시마 기병 소대는 삼수성을 정찰하였다.
 
다음 날인 1월 10일에 일본군 토벌대는 3면에서 삼수성을 포위하여 접근하였으나, 이미 성은 고요하고 의병들은 흔적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일본군은 완벽하게 의병부대의 유인작전에 속은 것이었다.
 
한편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주력은 일본군이 일부 의병부대의 계략에 말려들어 삼수로 진입하는 사이에 일본군의 포위망을 교묘하게 벗어나 갑산으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그들은 약 300명의 대병력으로 9일 삼수를 출발하여 1월 10일 새벽 6시에 갑산읍을 불의에 습격하였다. 당시 갑산읍에는 일본군의 수비 분견초(分遣哨)와 일제 경찰의 순사 주재소, 그리고 우편 전신 취급소 등 일제 침략자들의 통치기구 하부조직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경이 의병진압을 목적으로 삼수에 출동하여 갑산에 남은 병력은 불과 십수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의병들은 완전히 적의 허점을 포착한 것이었다.
* 본 부대로부터 파견된 작은 경비 부대 ? 
 
의병들은 조국을 침략하여 자기 민족을 압박하는 침략자들을 응징하기 위한 항쟁에 과감히 떨쳐나섰다. 그들은 갑산 수비대와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군과 일본인 7명을 살상하는 등 일본군경을 궤멸시키고 다시 갑산 우편 전신취급소를 점령하여 전신·전화선을 모두 절단한 뒤에 우편취급소의 청사를 완전히 소각·파괴하여 버렸다. 이때 일제의 눈과 귀가 되어 주민들과 의병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데에 악용되었던 전신기기도 모두 파괴되었음은 물론이다. 홍범도 등 의병부대는 거의 아홉 시간이나 갑산읍을 점령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앞잡이 기관을 파괴하고 그 주구들을 처치해 버린 것이다. 의병들은 우체국과 일본인을 습격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빼앗았으나 선량한 주민들에게는 거의 피해를 주지 않았다. 오후 세 시경 삼백여 명의 의병부대는 거의 아무런 인명 손실도 보지 않은 채 일제 통치기관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 뒤에 갑산의 이리사(二里社) 방면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 이리사(二里社) : 조선말 행정구역 폐지
 
의병부대가 갑산에 잠시 머무는 동안 갑산군 허천사(虛川社)의 박신강(朴信康)은 소대장으로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또 갑산 전투 직후인 1월 11일에는 같은 군의 진동사(鎭東社)에 사는 김용권(金用權)이 부근에서 의병 60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에 가담하였다. 그는 이 때 동네 주민들로부터 한말씩의 양식을 군량으로 차출하여 가져와서 의병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하게 고양되었다.
* 허천사(虛川社) : 회린사와 병합 회련면이 됨
* 진동사(鎭東社) : 진동면
 
갑산이 기습을 당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은 일본군 미끼 소좌는 매우 당황하여 1월 11일에 아오또 부대에게 삼수 부근의 수색을 위임하고 나까무라 대위가 이끄는 한 부대와 함께 급히 갑산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홍범도·차도선 의병대가 갑산의 이리사 방면으로 잠복해 버린 뒤였다. 이같이 일본군이 갑산읍으로 향하여 의병들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 홍범도 등의 의병부대는 약 60명의 의병 지대를 1월 12일 갑산의 상남사로 파견해서 그곳의 악질 일진회 회원 원길학(元吉學)·박중형(朴仲兄) 등 48명을 몰살시켜 버렸다. 그 조치는 일제의 앞잡이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냉엄한 민족의 심판이었으며 또한 주변의 주민들에게 의병들의 투쟁에 동참하라고 요구하는 암묵적 위협과 경고이기도 하였다.
* 상남사 : 수상사와 병합 천남면
 
의병대의 일진회원에 대한 이러한 준엄한 숙청은 북부지방의 주민들에게 지대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즉 의병들의 과감한 행동은 일제의 주구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여 도주케 하였으며 더 이상의 매국적 행위를 감행할 수 없게 하였고, 일반 촌민들도 일제에 대한 협조를 일체 거부하는 상황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개마고원 일대의 산간에서 일진회원은 거의 사라져버렸고 일제 군경들은 거의 주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정찰에 나선 일본인 경관들은 숙박마저 거부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이 무렵 북부지방에는 다음과 같은 ‘일진회가’가 유행하여 친일매국단체 일진회를 조소·야유하였다.
 
회야 회야 일진회야
삼춘화류 좋다더니
사절 명절 다 지났다.
오색 잡놈 모여들어
육조 앞을 지나가니
칠국거지 너 아니냐.
팔자도 기박하나
구구히 사잤드니
10월 치성 가련하다.
모자 벗어 코에 걸고
천리원주 네가 할제
상투생각이 너 안나더냐.
 
한편 의병부대의 갑산 점령 직후 갑산에 출동했던 미끼 소좌 등의 일본군 수비대는 갑산에서 의병을 추적하는 데 실패한 뒤에 의병대의 주력이 갑산군 이리사 쪽에 있음을 알아채고 각 지대를 그곳으로 급거 출동시켰다. 즉 아오또 부대는 신풍리 동쪽에서부터, 나까무라 대는 갑산읍으로부터 이리사 방면을 향하여 협공케 하고 미끼 자신은 상당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리사로 쫓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약 1주일 동안 갑산군 부근에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수색하였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1월 19일 다시 갑산읍으로 낭패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갑산읍 기습과 점령, 그리고 주둔 일본군경 및 일제 통치기관에 대한 대타격은 의병부대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전술에 의한 신출귀몰의 대승이었다. 갑산읍 전투에서 일본군은 의병부대의 유격전에 말려 들어서 의병의 추적과 토벌에 완전히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농락당할 정도로 당황하고 갈팡질팡 했던 것이다. 이 전투 이후 한국 북부지방에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명성은 널리 퍼졌고 특히 홍범도는 적군인 일본군마저도 그를 ‘날으는 장군(飛將軍)’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 갑산읍 전투 직후인 1월 중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다시 부대를 약간 개편하였다. 그 주요골자는 의병대의 소부대 단위 재편성과 지휘부내 참모진의 강화였다. 이러한 개편의 배경에는 당시의 몇 가지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즉 일제의 대규모 병력 동원에 의한 토벌이 강화되는 시점에서 의병들이 많은 병력으로 한꺼번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기동하는 것은 작전상 불리하였다. 그러므로 의병들이 각지에 분산되어 효과적으로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적의 배후와 허점을 불의에 기습하는 등 유격 전술을 전개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정은 삼수·갑산 등지의 산골에서 많은 의병들이 집결하면 당장 식량문제의 해결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의병들의 보급문제 해결과 보다 효과적인 적정탐지 및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부대의 분산활동과 정보 및 보급문제 해결을 위한 참모기능의 강화가 요청되고 있었다.
 
이에 홍범도와 차도선은 수백 명에 달하는 전체 의병을 4개 대오로 재편성, 그들의 지시하에 각지에서 분산하여 활동하게 했다. 비록 의병부대가 비교적 소규모로 분산되었지만 경우에 따라 지시를 받고 각 대오가 연합하여 공동작전을 수행할 수도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때 각 대오에는 참모(參謀)·유사(遊士)라는 직책이 신설되어 의병들의 원활한 작전수행을 돕게 되었다.
 
참모는 이무렵 전국 각 지방에서 활약하던 다른 의병부대의 조직에서 볼 수 있는 모사(謀士)와 같다. 그는 의병부대의 작전계획 수립과 그 집행을 맡아 의병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중·남부 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각 의병부대의 모사가 주로 유생들이어서 실질적 전투력의 확보에 미흡했던데 반하여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참모(모사)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의병 가운데서 선발된 사람이 맡았기 때문에 실제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유사 역시 의병부대원 중에서 책임감이 강하고 동작이 민첩하며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인물이 뽑혔다. 유사는 간혹 참빗장사, 물감·실장사 또는 담배행상 등으로 변장하고 부락에 들어가 적정을 탐지하였으며 의병들의 진격과 퇴각 시각의 결정 및 주둔, 휴식 장소의 물색 등을 담당했다.
 
이 때의 개편시 특기할 만한 사실은 기존의 군량도감을 정식편제에서는 폐지하고 의병부대가 장기간 일정한 장소에서 주둔할 경우에는 임시로 임명해서 식량조달을 책임지게 했다는 점이다. 그 대신에 의병부대가 유격전을 전개하기 유리하도록 산간 곳곳의 민가에 비밀리에 병참부를 두어 식량 등을 저장·보급케 하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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