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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 3-3-5 의병부대의 개편과 분산 활동 - 독립기념관

civ2 2026. 5. 21. 20:35
*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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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3. 의병부대의 재조직과 항전
 
(5) 의병부대의 개편과 분산 활동
 
홍범도 의병부대가 재기하여 위세를 되찾고 있을 무렵인 5월 7일, 일제에 속아서 일시적으로 ‘귀순’하였던 차도선 의병장이 갑산 헌병분견소에 잡혀있다가 구사일생으로 그곳을 탈출하여 다시 의병 진영에 가담하여 왔다. 이는 매우 고무적 현상이었다. 이 사건은 의병들에게 일본군과 대한제국의 매판적 관료들이 떠들어 댔던 귀순공작의 기만성과 야만성을 올바로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차도선은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범도(홍범도)와 의병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으며 다시 적과 싸우겠다고 맹세하였다.

홍범도는 차도선이 왔을 때 의심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차도선이 진심으로 의병투쟁에 다시 나서려고 했을 때 과거의 신의와 공적을 생각하고 적극 환영하고 지원하였다. 그 결과 차도선은 다시금 의병장으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차도선의 의병진영 가담은 홍범도 휘하 의병들의 사기를 높여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차도선의 활동은 예전만큼 활발히 진행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 때의 실수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차도선은 가끔 홍범도 의병대와 같이 싸우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독자적으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홍범도는 5월 16일 500여 명의 대부대를 인솔하여 장진의 산정개(山亭開)에서 갑산으로 이동하는 장진분견소 일본군을 섬멸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2일에는 200여 명의 휘하 지대가 갑산읍 서방에서 갑산수비대와 교전하였다. 또 그 달 28일에는 갑산군 괘탁리(掛卓里)에서 15기의 적 기병대와 접전하여 전멸시키고 말 다섯 필 등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의병도 3명이 전사했다.

이 무렵 일본군 각 부대의 출동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5월 19일에는 아오또 대위 이하 45명, 21일에는 가따오까(片岡) 중위 이하 45명이 북청을 출발하여 후치령을 거쳐 신풍리로 갔고 또 23일에는 미끼(三木, 삼목) 소좌가 인솔하는 보병 하사 이하 10명과 기병 장교 이하 12기의 기병, 그리고 쓰나시마(莎島, 사도) 포병대가 역시 신풍리로 출동하였다. 같은 날 미야우찌(宮內, 궁내) 중위 이하 45명은 통파령(通坡嶺)을 거쳐 신풍리로 향하였는데, 이들은 앞서 출발한 각대와 신풍리에서 합류하여 미끼 소좌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들 부대와는 별도로 이와다(岩田, 암전) 중위 이하 30명은 이원·단천 방면으로 출동해서 미끼 소좌가 이끄는 토벌대와 서로 협동케 하였다.
    * 후치령 : 북한의 삼수갑산(三水甲山)] 지방인 함경남도 북청군과 함경남도 풍산군을 잇는 높이 1,335m의 고개이다.  
                https://maps.app.goo.gl/mnmPL575gmbMwh6Y6
    * 신풍리 : 갑산군 진동면 신풍리
                https://namu.wiki/w/%EA%B0%91%EC%82%B0%EA%B5%B0

이러한 약 250명 내외의 일본군 보·포·기병 합동의 정예 토벌대 이외에 북청 수비구 산하의 순사대까지 합치면 거의 300명을 넘는 대규모 군경 연합 토벌대가 1908년 5월 하순부터 북청과 갑산·삼수·혜산진 등지의 여러 곳에서 홍범도가 인솔하는 의병부대를 포위하고 끈질기게 파상공격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의병 토벌’을 내세웠지만 가는 곳마다 의병은 말할 것도 없고 무고한 양민에게까지 피해를 주었고 조금이라도 의병들에게 협조하는 징후가 있으면 무차별적인 초토화 전술을 구사하여 온 마을을 불태우는 등 산간 지방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리하여 소위 일제의 ‘비민(匪民)분리’ 정책의 결과 홍범도 의병대는 직접적 투쟁을 전개하는 데에 필수적인 주민들의 협력을 받기가 어려워지고 각종 군수물자가 결핍하여 전에 겪지 못했던 가혹한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 비민(匪民) : 비적(匪)과 백성(民)

이 같은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홍범도는 5월 하순 갑산에 있는 동안 휘하의 김충렬(金忠烈)·조화여 두 사람에게 2만원의 군자금과 여비를 주어 러시아령 연추(煙秋: 크라스키노)에 있는 이범윤(李範允)에게 파견,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그것은 갈수록 탄약과 무기가 부족하여 의병활동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 연추(煙秋: 크라스키노) : 발해 염주.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장소  https://maps.app.goo.gl/sBf6LNjpRH4ssBSi7
     
홍범도는 의병장으로 활동한 일부 동지와 부하들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리한 조건 속에서 일본군과의 싸움이 너무 힘들어서 해산하고 싶어하는 회의에 빠지자, 불굴의 투지로서 그들을 설득하였다. 그는 “임진왜란(1592) 때에도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는 요지의 신념을 역설하여 부하들을 설득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아래의 자료를 통하여 더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당시 같은 의병진에 있던 원석택(元錫澤)이 홍범도에게 원망하여 말하기를 ‘최초에 의병을 일으킨 것은 자네가 아닌가? 그런데 아무런 방침 계책도 없이 다만 가련한 인민을 모아 아무 이익도 없고 쓸데없이 다수 동지를 사상시킬 뿐으로 점차 우리의 세력은 실추하고 이에 반해 일병(日兵)은 점점 강세를 더하니 이제야말로 우리는 살아서 거처가 없고 죽어서 묻힐 곳이 없다. 차라리 일찌감치 전대(全隊)를 해산하여 개인의 생계를 꾀하는 수밖에 길이 없을 것이다.’ 운운하니, 

범도(홍범도)가 말하기를 ‘옛날 임진의 변(變)에서도 의병이란 것이 일어났기 때문에 드디어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다. 금일의 사정은 우리 세력이 날로 불리한 것 같으나 앞서 정일환(鄭日煥)·임재춘(林在春) 등을 보내어 청지(淸地: 淸國)에서 탄약 보급의 길을 강구하고 있으며 또 다른 동지도 서로 만날 사람도 있을 것이므로 얼마 안가 이들 사람과 삼수에서 회합하여 뒤의 계획을 정하고 장래의 방침을 정할 것이다.’ 운운하고 출발하였다.”
    * 청지(淸地: 淸國) : 청나라? 청지평(淸地平)

-1908년 11월 탄약구입차 중국으로 갔던 변해룡(邊海龍)이 검거된 뒤에 진술한 공술서에서

위의 기록에는 원석택의 범도(홍범도)에 대한 약간의 비관적인 불평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변해룡이 일제에 체포된 다음 진술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위의 기록을 통해 홍범도의 의병투쟁에 대한 강한 집념과 의지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김원흥 등이 범도(홍범도)의 위계(僞計)에 의해 섬멸된 뒤 일제는 범도(홍범도)에 대한 귀순공작을 단념하고 이제 철저한 ‘무력토벌’을 감행하고 있었다.
    * 위계(僞計) : 계책

그러나 홍범도와 참모들의 끈질긴 항전의지, 그리고 일제 침략자와 매판·봉건적 관료들의 수탈에 항거하고 있던 하층 민중의 적극적 성원에 힘입어 홍범도 의병부대는 여전히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1908년 4월 말에 500여 명이었고, 5월 중순에는 650∼700명으로 증강되었다. 이렇게 막강한 의병규모를 갖춘 홍범도는 300여 명 대병력의 일제 토벌대와 일대 결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홍범도가 처음에 봉기할 때는 포계의 우두머리로서 연로한 임창근과 자기보다 연장자인 차도선 등을 우대하여 부독(副督)이라는 직책으로 행세하였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범도(홍범도)는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과감히 항쟁하였다.
    * 부독(副督) : 도독(총사령관)을 보좌. 부사령관

괘탁리(홍범도에 의하면 능구패택이) 전투에서 일본군 기병부대를 무찌른 홍범도 의병부대는 5월 말에 장진 방면으로 진출하여 의병 진영을 새로이 개편하게 되었다. 범도(홍범도)는 이 때 장진 연화산(높이 2,355 미터)의 병풍바위골에서 직접 인솔하던 의병 이외에도 함경남도 지방에서 자신의 영향력 아래 활동하고 있던 군소 의병부대를 소집하여 통합, 자기 휘하에 재편성하였다. 병풍바위골 의병대 모임에는 함경도 남부의 고원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윤동섭(尹東涉) 부대와 영흥·덕원·안변 등지에서 싸우고 있던 노희태(盧熙泰) 부대가 참가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의병부대가 참가하여 700∼800의 많은 숫자를 헤아렸다. 이 병풍바위골은 범도(홍범도)가 해외로 건너가기 전의 상당기간 동안 홍범도 의병부대의 거점 및 병참부가 되어 의병들의 비밀스런 회합장소가 되었다.
    * 괘탁리 : 함경남도 갑산군 위치
    * 능구패택이 전투 (1908년 5월18일)

홍범도는 이제 명실공히 함경도 지방의 의병대장으로서 여러 의병장과 의병부대를 지휘하거나 혹은 같이 연합하여 일제와 다시 치열하게 싸우게 되었다. 연화산에 집결된 의병부대를 그는 11명의 중대장과 33명의 소대장 편제로 재편성하였다. 이 때 범도(홍범도)는 다음과 같이 각 중대에 명령을 내렸다.
    * 연화산 : 자강도(평안북도) 낭림군과 함경남도 장진군 경계. 높이 2,355m.
                https://maps.app.goo.gl/uiVJ5VEim1wY5wNVA

“제1중대장 원창복[일명 元基豊(원기풍)]은 장진의 청산령(높이 2,084미터)을 지키면서 아침·저녁으로 (일본군의) 장진 군대가 삼수로 넘어오는 놈을 목잡고 있다가 불시에 쏘고 몸을 피했다가 비밀리에 군사 먹을 것을 걱정하라고 시키시오!
    * 청산령(靑山嶺) : 장진군과 삼수군 사이 고개. 높이 1,782m

제2중대장 최학선(崔學善)은 응덕령(鷹德嶺)을 지키고 갑리로 드나드는 (일본)놈과 앞에서 시킨대로 하소!
    * 응덕령(鷹德嶺) : 함경남도 갑산군과 풍산군 사이에 위치
                            https://maps.app.goo.gl/KxBFZJWXBqLTKEon6

제3중대장 박용락[다른 자료에는 林用洛(임용락)으로 나옴]은 안장령을 지키고 함흥·장진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와 같이 하소!
    * 안장령(鞍裝嶺) : 함경남도 신흥군 위치. '기르마재'라고도 불림.

제4중대장 조병용은 조개령을 지키고 삼담(삼수?), 단천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와 같이 하소!
    * 조개령(曺介嶺) : 함경남도 단천군(현 단천시)과 삼수군 사이

제5중대장 유기윤[일제 측 자료에는 劉基云(유기운)]은 새일령을 지키고 통피장골·북청을 넘나드는 놈과 (앞에서 지시한 대로) 그대로 좇아 하시오!
    * 새일령 : 북청군과 함흥시(또는 영흥군) 방면을 연결

제6중대장 최창의는 (북청의) 후치령을 지키고 앞서와 같이 시행하시오!
    * 후치령 : 북한의 삼수갑산(三水甲山)] 지방인 함경남도 북청군과 함경남도 풍산군을 잇는 높이 1,335m의 고개.
                https://maps.app.goo.gl/mnmPL575gmbMwh6Y6

제7중대장 송상봉(宋相鳳)은 (장진의) 부걸령(부전령: 높이 1,445미터)을 지키되 너는 꼭 내가 명으로 시키노라! 남시령을 지키고 길주로, 갑산 허리로 드나드는 놈과 싸움을 하되 남을 10명 죽이지 말고(죽이기보다는) 내 군사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이므로 너를 극력 주선으로 부탁하노라!
    * 부걸령(赴傑嶺) : 현재 부전령(赴戰嶺) 해발 1,445m. 함경남도 신흥군과 부전군 사이, 개마고원 입구에 위치.
                             https://maps.app.goo.gl/9yWhV6SmjEs1oQ2UA

제8중대장은 삼수(군의) 신파(신갈파진) 목재(가) 압록강으로 내려가는 것을 쏘아 넘기시오!
    * 삼수군 신파 : 현 량강도(함경남도) 김정숙군
    * 신갈파진(新乫坡鎭) : 함경남도 삼수군 신파면의 압록강 변에 있는 항구

제9중대장은 (북청의) 통팔령(높이 1,445미터)을 지키고 홍원·북청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 계약한 대로 꼭 그대로만 하면 우리의 성공이 잘될 것입니다!”
    * 통팔령(1,445미터) : 북청군(현재 일부가 덕성군) 이곡면 소재. 북청군과 풍산군(양강도 김형권군) 사이 고개.

이를 통해 우리는 재편성한 의병부대의 진용과 주된 작전구역 및 활동 방침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다. 각지에 분산시켜 활동케한 9개 중대의 배치를 보면 함경남도 개마고원 일대의 중요한 길목이나 험준한 요새지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제8중대가 압록강 방면을 경계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제가 목재창을 설치하고 압록강을 통해 목재를 약탈해 가는 것을 저지하려는 의도로 분석할 수 있다. 이로 보아 홍범도는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우리 나라의 이권이 외세에 침탈당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그러한 경제적 침략도 저지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각지에 흩어져서 활동케한 병력 이외의 나머지 의병들은 주력부대로서 범도(홍범도) 자신이 직접 통솔하여 사방으로 옮겨다니며 일본군과 접전하고 경우에 따라 위에서 열거한 각지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싸우기로 하였다. 일개 중대에는 보통 2∼3개 소대가 있었고 한 소대는 일정하지는 않지만 40∼50명의 의병으로 구성되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때 홍범도의 아들인 양순(홍양순)이 1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나란히 중대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각 중대는 독립적으로 활동하지만 홍범도 의병부대의 주력부대와 수시로 연계를 취하며 일정한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경도 남부의 개마고원 각지의 전략 전술적 요충지에 의병들을 분산배치하여 유격전을 벌이도록 한 것은 의병부대의 병력이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집결되어 있으면 일본군의 추적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고 또 산골에서 보급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홍범도가 직접 이끌었던 의병대의 조직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의병장 밑에 부의병장·검사·유사(遊士)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전투단위는 분대·소대·중대의 체계로 조직되었으며 독립부대로 대포령(大砲領)이 있었다. 특히 각지의 중요한 곳에 흩어져 활동하는데 효과적인 연락과 일정한 지휘체계의 확립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이 일은 유사대라는 특수한 조직을 따로 두어 각 의병중대의 감독과 작전에 따른 연락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

이러한 의병부대의 분산과 주요 험로를 거점으로 한 의병의 재배치는 일본군 토벌대의 공세에 부응한 자구책의 일환임과 동시에 장기적 항전인 지구전으로 전환하게 되는 준비단계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이제 의병부대는 여기저기에서 신출귀몰하며 기동하여 게릴라식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과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의병부대를 개편 배치한 홍범도는 중대장 등 주요 간부에게는 임명장을 수여하여 엄격한 명령 수행을 당부하였고 또 의병장 및 의병들로 하여금 의병의 선서문을 낭독케 하여 의병으로서의 짜임새 있는 격식을 갖추었다. 이후 범도(홍범도)는 강택희[姜宅熙: 일명 姜澤基(강택기)]·원석택(元錫澤)·정도익(鄭道翼) 등의 본부 참모진과 직속 의병을 거느리고 장진 부근이 관할구역인 다른 중대의 의병부대와 함께 장진군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 때 연합의병대의 군세는 약 350명이었다. 나머지 약 300∼400명의 의병대는 원기풍(元基豊)·최학선(崔學善) 등의 지휘를 받게 하여 북청 등 각 방면의 지정된 작전구역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홍범도가 일본군의 기만전술과 회유공작에 빠져 귀순하기는커녕 대규모 의병부대를 재조직하여 곳곳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의병들을 규합하며 새로운 작전을 개시하게 되자, 일본군은 크게 낭패하여 북부수비관구와 동부수비관구 병력을 총동원하며 6월과 7월에 걸쳐 홍범도 의병부대에 대한 ‘대토벌’을 전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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