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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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3. 의병부대의 재조직과 항전
(1) 일제의 의병 회유공작
1907년 후반기에서 1908년 전반기에 함경도 지방에서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가 맹위를 떨치고 있을 무렵 전국의 의병항쟁은 매우 치열하고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 때는 바야흐로 의병의 봉기가 절정에 달한 의병운동의 일대 고양기였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의병들의 투쟁은 전국연합 의병부대라고 할 수 있는 ‘13도 창의대진소(13道倡義大陣所)’ 체제의 성립과 그에 의한 서울 진격 및 탈환작전의 전개였다.
연합 의병부대의 서울 진격 및 탈환 작전은 전국 각지에서 일제와 싸우고 있던 의병들이 한 장소에 집결하여 대부대를 형성하고 일제 통감부와 한국 주둔 일본군을 몰아내서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서울을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실행되었다. 이인영(李仁榮)을 총대장 허위(許蔿)를 군사장으로 하는 13도 창의대진소 연합 의병부대는 1907년 12월경 경기도 양주에서 성립하였다. 이 때 전국 각 지방의 주요 의병장들을 망라한 부대가 결성되었으나 영남지방에서 활약하고 있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와 호남지방에서 싸우고 있던 문태수(文泰洙) 의병부대는 그 지역의 일본군경과 투쟁하느라고 실제로 연합 의병부대에 가담하지는 못하였다. 이리하여 서울에서 가까운 중부지역에서 일제와 항쟁하고 있던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13도 창의대진소라는 연합 의병부대가 조직되어 1908년 1월 말에서 5월 말까지 두 차례에 걸친 서울 진격작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이 작전은 한 때 거의 1만여 명을 헤아릴 정도의 대규모 의병부대가 참가할 정도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여기에 참가한 주요 의병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관동 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교남(영남) 창의대장 박정빈(朴正斌)
관서 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호서 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진동(해서) 창의대장 권중희(權重熙)
관북 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
관북 지방의 의병장에 정봉준이 지명된 것은 그가 1905년부터 의병을 일으켜 투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명도가 높았고 또한 이인영과 허위 등 유생 출신 의병장들에게 알려졌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홍범도와 차도선 등은 13도 창의대진소 체제의 결성 논의가 있은 뒤에 의병항쟁에 나섰으므로 서울 근처까지 이들에 관한 소식이 전달되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은 삼수·갑산 등지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므로 중앙이나 남부지방까지 함경도의 포수 의병들에 관한 상세한 소식이 알려지기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또한 실제로 이들 의병부대가 전국 연합조직에 포함된다고 해도 수천리 되는 먼 거리까지 갈 수 있었는가는 의문이라고 하겠다. 또 홍범도가 함경도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는 차도선이 귀순공작에 말려들어 투항한 뒤인 1908년 4∼5월부터였기 때문에 전국 연합 의병부대의 결성에 홍범도 의병장이 빠져있다고 해서 그의 명성에 손색이 간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3도 창의대진소 연합 의병부대는 1908년 1월과 동년 4월 말에서 5월 말에 걸쳐 두 차례의 서울 탈환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허위가 인솔하는 선봉대가 일본군과 동대문 밖에서 싸운 뒤에 본격적 작전을 전개하기 직전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별세를 이유로 귀가함으로써 1차 탈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 의병부대들은 1908년 4∼5월에 다시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하며 서울의 외곽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제2차 서울 탈환작전이었다. 이때 의병항쟁은 그야말로 치열하게 전국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가 함경도 지역에서 투쟁하고 있을 무렵 전국의 정세는 위와 같은 상황이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가 식량과 탄약의 결핍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인 1908년 2∼3월경은 13도 창의 대진소 연합 의병부대의 서울 진공작전이 일단 실패하였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당시는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시적으로 침체해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일제는 1907년 후반기에서 1908년 전반기까지 거국적으로 의병봉기가 전개되자 온갖 술책을 다 동원하여 이를 탄압하려 했다. 즉 한편으로는 무력진압 작전을,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관리들을 표면에 내세워 기만적이며 야비한 회유 및 귀순 투항공작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무력 진압의 구체적인 책동을 보면 야만적인 초토화 전술로서 의병과 농민을 분리시키는 한편 일련의 교란 작전으로서 일정한 지역을 포위하여 교통을 차단하고 반복하여 의병을 추격, 의병으로 하여금 기진맥진하여 투쟁을 계속할 수 없게 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투항 귀순 공작으로는 ‘의병은 귀순하여 해산하라’는 순종 황제의 칙명을 내세워 선유사(宣諭使)를 각 도에 파견하였고 각 군에서도 각종 유화술책을 총동원하도록 지시했다.
* 선유사(宣諭使) : 나라에 병란(兵亂)이 있을 때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에게 훈유(訓諭)를 알리던 임시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 훈유(訓諭) : 가르쳐 타이름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기가 불가능하고 오히려 일본군경의 희생만 늘어가는 곤혹스런 상황에 직면하고 있던 일본군 북부 수비관구 사령부에서는 이러한 정세에 부응하여 대응전략을 변경해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회유하는 선무공작을 펴기 시작했다. 일제의 회유공작은 1908년 2월 초순부터 본격화하였다. 즉 대한제국의 관리들인 갑산 군수와 장진 군수 등을 앞세워 치밀한 공작을 펴기 시작했고, 특히 2월 5일 일본군 북청 수비대의 신풍리 분견소장 무라야마(村山, 촌산) 중위는 부근의 각 사(면)장들을 시켜서 직접 차도선 등의 의병들에게 ‘귀순’을 교섭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때 일제는 신사적인 귀순공작만을 추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인한 항전의지를 굳히고 있던 다수의 의병들을 무력화시키는 ‘효과적’ 방책으로서 처·자식 등 가족을 납치하여 협박하는 수법, 그리고 귀순하는 의병장에게는 고위 관직을 주며 보통 의병들은 집에 와서 무사히 살 수 있게 하든지, 아니면 지식정도에 따라서 지방관청의 하급 관리로 등용한다는 등의 유혹을 자행하였다. 또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는 매수공작 등 다양한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이 같은 일제의 유화적 술책에 상당수의 의지가 굳지 못한 의병들은 동요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홍범도의 동지들인 차도선과 태양욱(太陽郁) 등은 일본군의 기만전술에 속아 넘어가게 되었다. 차도선 등은 황제가 보증하는 일본군의 회유책이 단지 의병과 일본군이 ‘상화(相和)’하는 것, 즉 일종의 휴전 상태에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과 그들의 앞잡이인 한국 관리들은 의병부대와 일본군이 전투를 중지하고 ‘상화’하는 조약을 체결하자고 차도선·홍범도·태양욱 등에게 북청군 낙생사(樂生社) 사장을 보내서 교섭하게 했다. 당시 의병부대들은 탄약 및 식량의 결핍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으므로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이 부족하고 뜻이 강하지 못한 의병 가운데는 이 기회에 투항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 상화(相和) : 서로 잘 어울림, 서로 화합함
* 함경남도 북청군 낙생사(樂生社) > 함경남도 풍산군 안산면 > 양강도 김형권군 안산면
홍범도는 이러한 경향을 우려하면서 일본군과의 협상을 단호하게 반대하였지만 차도선과 태양욱은 의병항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태에서 일본군과 타협해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차도선은 의병의 사기가 저하되고 얼마 있지 않으면 춘궁기가 도래하여 지방민들의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질 형편에 처하여 일제의 회유책을 역이용해서 잠시 일제와 휴전한다면 후일 다시 기회를 보아 재봉기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차도선은 1908년 2월 12일 일단 협상할 뜻이 있음을 일본군에게 알렸으나 일본군의 진의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주저하며 시일을 끌었다. 그러다가 그해 3월 6일 동료 의병장 양혁진(梁爀鎭)과 함께 자기 휘하 의병 250여 명을 인솔하고 일본군 수비 분견대가 있는 북청군 신풍리(新豊里)에서 약 10리 떨어진 구신풍리에 가서 주둔하였다. 그리하여 다음날 신풍리에서 의병 측에서는 차도선·양혁진·고운학(高云鶴: 중대장)·이성택(李聖澤: 서기) 외에 4명의 의병장이 참가하고 한국관청 및 일본군 측으로는 갑산 군수와 낙생사장, 일본군 분견대장 무라야마(村山, 촌산) 중위, 미야자끼(宮崎, 궁기) 군의관, 통역 등이 참석하여 회담이 열렸다.
일본군 측은 종전에 보낸 서신에서 요구한 대로 ‘귀순’할 의병의 연명부(連名簿) 제출을 요구하였으나 차도선은 “전원 귀순에 대해서는 확실히 조약을 하고자 하므로 2∼3일 체재하여 수속을 명료히 하려한다. 그러므로 오늘밤 중 연명부를 만들어 제출하기로 하겠다.”고 말했다.
차도선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앞에서 보았듯이 당시의 정세에 순응하여 부대를 소부대로 개편한 뒤에 막하의 의병들이 몇 개의 단위부대로 분산되어 활약하고 있었으므로 집결시키는 데에만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고 또 홍범도와 같이 일본군과 협상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병장도 있어서 신풍리로 올 때 연명부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도선은 결국 그의 부하 의병 537명의 명단을 제출하였고 일본군 측은 537매의 ‘가면죄증(假免罪證)’을 주면서 귀순시에 정규의 ‘귀순증’을 발급해 주어 귀순증을 소지한 의병은 처벌하지 않고 본래의 직업에 종사할 것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 의병이 갖고 있는 무기에 대해서는 귀순증을 받고 1개월 간의 격납(格納) 유예기간을 준 뒤에 의병들이 약속한 장소의 민가에 무기를 집어 넣어 두기로 합의했다. 차도선은 이러한 협상이 이루어지자 홍범도와 태양욱도 ‘귀순’하라고 권유하기로 하고 3월 9일 신풍리를 떠나 의병의 본대로 돌아갔다.
* 격납(格納) : 집어서 수납해 둠
* 신풍리 : 함경남도 단천시 신풍리
일본군의 간교한 술책에 빠진 차도선은 홍범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양욱과 함께 부하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이미 일본군과 약속한 대로 3월 17일 신풍리에 있는 일본군에 ‘귀순’하였다. 일본군은 이들이 ‘귀순’하자 무장해제 기간 1개월의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즉시 전 의병들을 위협하여 무기를 압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저항하는 태양욱을 총살하고 차도선·이성택·김덕순(金德順) 등은 홍범도를 ‘귀순’시키는 데에 쓸 미끼로서 체포하여 구속해 버렸다. 차도선과 태양욱 등은 일본군에게 완전히 속은 것이었다. 이날 의병들이 일본군에 빼앗긴 무기는 화승총이 136정, 일본군에게서 노획했던 총으로서 30년식 총이 3정, 단발총이 9정, 10연발 총이 1정으로 도합 150자루나 되었다.
차도선 등 상당수의 의병들이 이 시기에 일제와 협상에 임하게 된 배경은 의병투쟁을 계속하기에 너무 어려운 현실적 어려움 이외에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일제 측의 집요하고도 기만적인 포섭 공작, 예컨대 의병과 그들의 가족에 대한 협박과 회유, 또는 금전의 살포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는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핵심을 이루는 포수들의 의병진영 투신 동기가 유생이 주축이 된 의병진영보다 강고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즉 포수 의병들의 봉기 동기가 반외세적 입장에 서서 일제를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철저한 사명의식과 애국심에서 발로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자위권 수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요소가 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은 일제 측이 강압적으로 그들의 생존권을 짓밟을 때는 보수적 유림 출신의 지도자가 이끄는 의병부대보다 훨씬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협박이나 금품제공, 혹은 좋은 조건의 제시 등 기만적인 회유책으로 나올 때는 적전에서 쉽게 분열될 수 있다는 약점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구성원 들은 대부분이 산포수와 농민·광산 노동자 등 평민 계층으로 이루어져 충군애국(忠君愛國)을 강조하는 주자학적 전통의 학문적 소양이나 깊은 지식도 없었고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에 의해 자신들의 직접적 생계가 위협받게 되자 이에 크게 반발해서 과감히 일본군과의 항쟁에 나섰다. 그러나 일제가 무력탄압의 수단 대신 유화책을 쓰게 되자 그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동요하는 자세를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차도선 등의 의병들이 이 때 단순히 일제에 투항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한 사실은 일제 측의 다음과 같은 자료로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갑산·삼수 부근 폭도의 수괴(首魁) 차도선·태양욱 및 그 부하 약 200을 각종 수단을 다하여 3월 17일 신풍리에 초치하고 귀순의 성의에서 나온 것인가 아닌가를 취조한 바, 신풍리 분견대장 무라야마(村山, 촌산) 중위의 열심한 귀순 권유의 목적으로 우선 차도선과 친선을 맺고 누차 왕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귀순의 성의가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일본군대와 상화(相和)하는 것으로 알고 무기를 쉽게 납부할 의도가 없고 부하들 (역시) 일본군과 화약(和約)하고 한국 인민 특히 일진회원을 참살, 혹은 금전·양식을 약탈할 생각이었으므로, 그날 차도선 및 태양욱에게 무기의 납부에 대하여 말로 잘 타일러서 이를 압수하기로 했다. 이때 태양욱은 저항하므로 참살하고 차도선은 그를 이용하여 동료 홍범도 등에게 귀순을 권고시킬 목적으로 당분간 신풍리에 억류키로 하였다. 이후 홍범도가 신풍리 부근에 이르른다면 그 정황에 따라 해당 지점 부근에 출장하여 임기의 처치를 취하고자 한다.”
-일본군 제13사단 참모부의 1908년 4월 6일자 한국 내부(內部)에 대한 통보에서
* 화약(和約) : 화목하게 지내자는 약속
우리는 위 문서를 통하여 차도선 등이 일본군을 접촉한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가 홍범도·차도선 등을 속임수로서 대응하여 처치하겠다는 야비한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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