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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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3. 의병부대의 재조직과 항전
(2) 홍범도 가족의 수난
일본군은 그 뒤 홍범도를 ‘귀순’시키기 위하여 1908년 3월 20일경 후치령 아래 노은리 인필골에 있던 처가를 습격하여 범도(홍범도)의 아내 이씨와 양순(홍양순)·용환(홍용환) 두 자식들을 붙잡아서 억류해놓고 홍범도를 위협하며 투쟁을 중단하고 투항하도록 강요하였다. 이 공작에는 일진회원으로서 일본군 북청 수비구 산하의 제3순사 대장인 임재덕(林在德), 그리고 종전에 구한국군 참령(參領)으로서 북청 진위대의 대장을 역임한 뒤 일본군 휘하에 들어가 경시(警視) 직책을 맡고 있던 김원흥(金元興), 기타 밀정 최정옥 등이 주요 책임자로 참여하여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범도(홍범도)의 처자를 불법으로 구속하여 홍범도를 위협하고 유인하는 수단으로 악용하였던 사실은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이 4월 30일 임재덕에게 보낸 다음의 명령을 통하여 직접 확인할 수 있다.
* 후치령 : 삼수갑산 지방인 함경남도 북청군, 풍산군을 잇는 고개
* 홍양순 : 1908년 6월16일 (향년 16세)
* 홍범도 부인 단양이씨 : 1874~1908. 3. 이옥녀/이옥구
“목하 구류중인 차도선의 일군(一群) 김기학(金基學)·김좌봉(金佐鳳) 및 홍범도의 처자 등은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사용할 것을 허용한다. 단 도망하지 않는 확증이 없는 한 그들을 함부로 석방하면 안된다.”
* 목하 : 바로 지금
이에 따라 일제의 앞잡이인 임재덕이 거느리는 순사대는 일제에 투항하지 않고 남은 홍범도 등 의병들이 잠복해 있는 갑산군 동인사(同仁社) 부근의 창평리(蒼坪里)라는 마을에 일본군과 함께 들어와 주둔하였다. 그 뒤 이들은 범도(홍범도)의 아내 이씨가 한때 절에 있어서 글을 안다는 사실을 탐지하고 그녀를 협박하여 남편에게 펀지를 쓰도록 강요하였다. 특히 임재덕은 이씨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범도(홍범도) 모자를 어육(魚肉)으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며 이씨로 하여금 아래와 같은 요지의 펀지를 쓰도록 윽박질렀다.
* 동인사(同仁社) : 동인면
“당신이 일본 천황에 귀순할 것 같으면 천황께서 당신에게 공작 벼슬을 주려고 하니 항복하십시오. 항복하여 공작 벼슬 하게 되면 나도 좋겠고 당신 자식도 귀한 사람의 자식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씨는 억지로 강요하는 주구의 말을 완강히 거부하며 버티었다. 이씨는 말했다.
“나 같은 계집이나 아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 뿐인데, 내가 글을 쓴다고 해도 영웅호걸인 내 남편은 나 같은 아녀자의 말을 곧이 듣지 않는다. 너희놈들은 나와 말하지 말고 너희 마음대로 해라. 나는 절대로 글을 맡지 않는다.”
그러자 임재덕과 김원흥 등은 이씨의 발가락 사이에 불을 달군 심지를 끼우고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씨는 반죽음을 당하는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친일 매국적과 일본군은 이씨와 양순(홍양순)·용환(홍용환) 등을 갑산읍으로 후송시키고 마치 범도(홍범도)의 아내 이씨가 쓴 것처럼 해서 편지 한통을 작성했다. 그러고는 한인 순사로 하여금 그 편지를 홍범도 부대가 머물고 있는 용문동 산간에 전달케 하였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그 편지를 보고 일제에 귀순하기는커녕 오히려 격분하여 펀지를 가져왔던 주구를 처단하여 버렸다.
임재덕과 김원흥 등은 보냈던 사람에게서 소식이 없자 그 편지가 범도(홍범도)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으로 착각하고 다시 다른 사람을 의병진영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들이 간 뒤에 소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모두 홍범도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억류되고 있었다. 일제와 그 주구들은 1908년 5월 초 며칠 사이에 여덟 명을 파견해서 여덟 통의 편지를 홍범도 의병진영에 보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그들이 의병들에게 잡혔거나 피살된 것으로 단정하고 이번에는 새로운 흉계를 짜기에 이르렀다. 범도(홍범도)의 아들 양순(홍양순)을 동원하여 범도(홍범도)를 귀순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임재덕과 김원흥, 그리고 일본군 측에서 양순(홍양순)을 범도(홍범도)에게 보내려고 했던 데는 그들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즉 이들이 홍범도를 귀순시키고자 하는 공작을 집요하게 추진하였지만 무작정 한정없이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양순(홍양순)이를 보내서 추후 그들의 방침을 결정하는데 지표로 삼고자 했다. 이들은 양순(홍양순)이가 일단 가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대신에 그가 가져간 편지는 틀림없이 범도(홍범도)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다. 또 양순(홍양순)의 어머니와 동생을 구속하고 있으므로 범도(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가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하리라고 보았다. 일본군과 친일 매국적들은 만약에 양순(홍양순)이 범도(홍범도)에게 가서 소식이 없으면 그것은 양순(홍양순)이 홍범도의 의진에 가담한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제는 범도(홍범도)가 귀순하리라는 희망을 거의 포기하고 무력진압의 수단을 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 의진(義陣) : 의병의 군진
양순(홍양순)은 편지를 갖고 아버지에게 가기를 단호히 거부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머니와 동생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일제의 협박을 못이겨 결국은 아버지가 있는 용문동으로 향하였다. 특히 순사대장 임재덕은
“너도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것을 알고 또 이 편지가 네 아버지가 있는 군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방해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네가 가면 너의 아버지가 반가워 할 것이다. 그리고 네게서 편지가 나오면 네 아버지가 탄복할 것이다.”
하고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양순(홍양순)은 수소문 끝에 아버지 홍범도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범도(홍범도)는 잡혀 갔다던 큰 아들이 찾아 왔다는 보고를 받고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본군과 그 앞잡이인 주구들이 쉽게 양순(홍양순)이를 풀어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범도(홍범도)의 그런 짐작은 적중했다. 특히 범도(홍범도)는 양순(홍양순)이 가져온 편지를 읽고 대노하였다. 자기에게 귀순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어떻게 의병장의 아들이라는 녀석이 뻔뻔스럽고 태연하게 가져올 수 있단 말인가?
범도(홍범도)는 양순을 크게 꾸짖었다.
“이놈아! 네가 전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만 네가 일본감옥에 3∼4삭을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주자고 하는 놈이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 하겠다!”
* 삭 : 매달 음력 초하룻날, 달을 세는 단위
하고는 평소에 갖고 다니던 소총으로 양순(홍양순)이를 향해 분노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이 때 범도(홍범도)의 옆에 있던 부관이 붙잡아서 양순(홍양순)은 겨우 목숨을 부지했지만 귀의 일부가 총에 맞아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나중에 양순(홍양순)이는 어머니와 동생에 관한 소식을 전하고 일본군과 임재덕 등의 위협에 못이겨 찾아오게 된 사연을 말하여 겨우 범도(홍범도)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범도(홍범도)의 이러한 단호하고도 결연한 항쟁의지는 다른 부하 의병들에게 전해져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양순(홍양순)은 그 뒤 범도(홍범도)의 의병진영에 가담하여 다시 초급 지도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홍범도는 일본군과 한국 관변의 온갖 유혹과 협박, 기만적 계략과 탄압을 철저히 배격하고 끈질기게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차도선과 태양욱 등이 일본군의 회유책에 속아서 일본군에 일시적으로 투항하게 된 뒤 함경도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포수의병 진영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실제로 차도선 등이 3월 중순에 일본군과 ‘상화’ 조약을 체결하려고 했을 때 17명의 의병장과 약 200명의 의병들이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도 무장해제되고 말았던 것이다
* 상화 ?
한편 이 무렵 갑산읍으로 끌려갔던 범도(홍범도)의 아내 이씨는 일제에 대한 협력을 거부한 대가로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 숨지고 말았다. 나중에 이씨를 고문치사케 하는 등 온갖 행패를 부렸던 김원흥 등은 범도(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 이끄는 의병들에게 잡혀 처단되지만 이씨의 옥중투쟁과 순국은 의병장의 아내다운 의연한 모습과 장렬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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