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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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2. 산포수 의병부대의 결성과 항전 
 
(6) 세곡(細谷) 전투
 
단천을 습격하여 일진회원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한 홍범도 의병부대는 그 해 2월 2일에는 북청의 금창(金昌)에서 약 200의 병력으로 일병과 접전하였고 2월 상순에는 휘하의 한 의병대가 혜산진 방면에서 일본 침략자 9명을 처단하였다. 또 2월 10일에는 장항리(獐項里) 북방에서 장진수비대와 교전하였으며, 이틀 뒤에는 혜산진 경찰서를 습격하여 순사들을 소탕 하였다. 그리고 2월 16일에는 북청군 거산(居山) 북쪽 현국사(玄國寺) 부근에서 일진회원 20명과 김성근(金性根) 외 수명의 순사를 생포하기도 하였다.
 
1908년 2월 21일 일본군 갑산 수비대 26명, 일제 경찰의 갑산 주재소 순사부장 등 4명의 경찰, 도합 30명의 군경 합동 토벌대는 의병을 감히 ‘토벌’하겠다고 의병들이 주둔하고 있던 갑산군 읍사 세동(細洞), 속칭 세골(청지평)로 찾아 들었다. 이에 홍범도가 거느리는 약 200명의 의병부대는 부근의 고지에 매복하여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큰 손실을 입힌 뒤에 패주시켜 버렸다.
 
일제 경찰은 이 전투 직후인 2월 22일에 ‘적과 충돌하여 고전 후 격퇴시켰다’고 허위보고를 하였으나, 3월 5일의 비밀보고에서는 그들이 패퇴하였음을 아래와 같이 솔직히 기록하고 있다.
 
“21일 오전 4시 아베(阿部, 아배) 순사부장과 마루오(丸尾, 환미)·이(李)·고(高) 세 순사는 이리에(入江, 입강) 소위 이하 26명의 병원(兵員)과 같이 강행 정찰로 세동으로 향하였던 바 오전 6시 30분경 속칭 세곡(細谷: 청지평)이라고 하는 곳에서 약 200의 적과 충돌, 즉시 전개 교전하였다. 적은 가옥 및 견고한 지물(地物)을 이용하여 사격을 하였다. 아군은 쌓인 눈 2∼3척, 특히 40∼50도의 경사진 산중턱에 의지하여 간신히 자못 힘썼으나 오전 11시경 휴대한 탄약이 모자라 적을 격퇴치 못하고 철수하지 않으면 안될 경우에 빠진 것은 실로 유감이라고 하겠다. 본 전투 중 오전 9시 30분경 아베 순사부장은 오른쪽 대퇴가 골절되는 총상을 입었고 다른 병졸 2명의 부상자도 났다.”
-일본인 함흥 경찰서장의 통감부 경무국장에 대한 비밀보고에서-
 
위의 보고는 사실과 달리 일제 측의 피해가 축소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세곡 전투에서 홍범도 의병부대는 약 2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토벌대에게 많은 손상을 입혔고 소총 3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이무렵 홍범도와 차도선 사이에는 서서히 의병활동의 전술전략과 투쟁의 방법론, 그리고 투쟁의 계속성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병들의 치열한 항쟁에 접한 일제가 무력진압의 방법만으로는 효과를 얻기가 어렵다고 보고 의병에 대한 회유와 기만이라는 여러 가지 술책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친일파와 일진회원을 동원시켜 의병들에 대한 온갖 유혹과 협박, 기만 그리고 소위 ‘귀순’ 공작을 벌이게 되었다. 1908년 2월 초순에 일제는 차도선에게 ‘귀순’을 권고하였는데, 차도선은 일제의 속셈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타협적이며 동요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홍범도는 일제의 이러한 기만적 술책에 관하여 차도선에게 누차 경고하였으며 단호한 항쟁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무렵부터 홍범도와 차도선은 점차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세곡 전투의 일제보고서에서 다른 때와는 달리 ‘홍범도가 인솔하는 약 200명의 의병’과 교전하였다고 밝히고 있음에 비추어 이 때 홍범도는 차도선과 구별되는 단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홍범도와 차도선 사이에 일제의 귀순공작에 관한 태도의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중대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8년 2월까지도 포수 의병들의 항전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즉 2월 23일과 24일 양일에 걸쳐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는 단천 북방 약 70리 지점의 하농리(下農里)와 상농리(上農里)에서 사꾸마(佐久間, 좌구간) 특무조장이 거느리는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달 28일에는 약 300명의 군세를 유지하며 북청의 교별리(橋別里)에서 스기야마(杉山) 소좌 지휘하의 보병 1개 소대, 기병 1개 소대, 산포(山砲) 3문으로 무장한 대부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또 3월 11일에는 휘하의 한 의병부대가 혜산진 남방 30리 지점의 고거리(高巨里)에서 일본 경찰을 습격, 한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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