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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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3. 의병부대의 재조직과 항전
 
(12) 연해주 망명과 재기 도모
 
홍범도는 1908년 6월말 다시 장진 연화산에서 막하 의병들을 집합시켜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때는 항일투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의병 가족을 지원하는 한편, 외국에서 탄약과 무기를 구입하는 문제가 주로 의논되었다. 이후 범도(홍범도)는 그동안 의병들이 모집하거나 강제로 압수한 군자금을 의병 가족들에게 150원씩 분배하였고 나머지 돈으로는 간도나 연해주로 부하를 파견하여 탄약과 무기를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또한 여기에서는 다치거나 병에 걸리고 혹은 연로하여 의병활동에 부적당한 일부 의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 장진 연화산 : 자강도 낭림군과 함경남도 장진군, 부전군  https://maps.app.goo.gl/1xF9pfb5f34E2rF8A
 
그가 의병활동시 모집한 군자금의 일부를 전사하거나 부상한 의병 가족들에게 나누어 준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병투쟁의 성격을 활빈당(活貧黨) 등의 활동과 같은 유형, 즉 부의 균등한 재분배 사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도(홍범도)는 안중근 의병부대와의 연합이 실패한 뒤에도 직접·간접으로 많은 의병들을 지휘하며 개마고원 일대에서 줄기차게 싸웠다. 그러나 이제 의병활동은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제의 공격이 더욱 치열해지는 반면에 의병들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은 오히려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8월 초순에 임재춘(林在春)·정일환(鄭日煥)·변해룡(邊海龍) 등에게 군자금과 여비를 주어 간도에 있는 김성서(金成瑞)에게서 군수물자를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하지만 임재춘과 정일환은 자금을 다른데 탕진해 버렸고 변해룡은 홍원에서 9월 14일 일제에 체포됨으로써 범도(홍범도)의 목적하는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5월 하순에 연해주로 보냈던 김충렬과 조화여도 일제의 첩자로 오해를 받아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의병들은 총알이 모자라서 점차 적과의 전투를 회피하지 않을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소수의 부대로써 끊임없이 옮겨다니며 유격전을 전개하였지만…
 
* 변해룡(邊海龍) : 1907년 의병(義兵)에 참여하여 탄약(彈藥) 구입을 위해 여러차례 중국에 왕래하는 등 활동하던 중 1908년 9월 일본 순사대에 체포되어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홍범도는 이러한 난관에 부딪혀 의병 지도자로서 무척 고민하였다. 어떻게 해야 의병들의 손실을 줄이면서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 하고…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상당수의 의병들이 굶주림과 죽음에 대한 공포,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안일한 생활에 대한 동경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도망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범도(홍범도)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1908년 8월 하순경 그는 함흥군 천불산에서 의병들을 소집하였다. 그곳에서 많은 의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후일에 기회를 보아 다시 일제와 싸우기로 하였다. 또 일부 의지가 강한 의병들은 평안도 일대로 진출하여 싸우도록 하였다. 자신은 의병 190여 명을 이끌고 잠시 간도로 건너가 직접 무기를 조달하며 기회를 보기로 하였다. 이 때 의병들이 휴대한 무장은 소총 70여 정에 탄약 1만 1천발 가량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의병들이 해산하면서 남긴 무장을 천불산에 비밀리에 숨겨 놓았다. 그 수량은 총기류 44정과 탄약 1만발 가량이었고 기타 서류와 의복이 약간이었다.
 
* 함흥군 천불산 : 현 함경남도 신흥군 천불산  https://maps.app.goo.gl/kfcxuKhhkLhcDTCHA
 
범도(홍범도)는 잠시 간도로 진출하였으나 활동이 여의치 못하여 한두 달 뒤에 다시 의병들을 데리고 국내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끝내 국내에서 의병항쟁을 지속하지 못하고 1908년 11월 2일경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그러한 사정을 아래와 같이 회상하였다.
 
“…일화(일본돈) 2만원을 정하여 놓고 외국으로 갈 사람을 뽑는데 북청 사는 조화여·김충렬 그 동무들이 러시아 연추에 주둔하고 있는 이 관리(이범윤을 말함)에게 보내면 비똔약(뇌관과 화약)을 몇 십 밀리온 치라도 내올 수 있다고 하길래…보냈더니 이 험한 놈들이 다 잘라먹고 오히려 일본 정탐꾼으로 몰아 가두고…소식이 영 무소식하니 알 수 없어 약철(화약과 총알)이 없어 일본군과 싸움도 못하고 일본군이 온다면 도망하여 매번 꿩이 숨듯이 죽을 지경으로 고생하다가 할 수 없어 중국땅 통화(通化)로 10월 9일(음력)에 압록강을 건너…”
 
* 통화(通化) : 지린/길림성 퉁화/통화시  https://maps.app.goo.gl/8Vuezdrt7fQrKjqu9
 
홍범도는 40여 명의 의병을 데리고 삼수군의 신갈파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 통화로 건너갔다. 11월 중순에는 길림(吉林)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는 영변 출신으로서 중국 길림성의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길성익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며칠 머물 수 있었다. 길림에서 범도(홍범도)는 러시아어에 능통한 김창옥, 열두 살 먹은 아들 용환(홍용환), 의병참모 권감찰 등 3명만 남기고 나머지 의병들은 후일의 재기를 약속하고 국내로 돌아가게 했다.
 
* 함경남도 삼수군 신갈파진 : 현 양강도 김정숙군 김정숙읍
* 길성익 : 대한정의군정사 외교과장
 
그 후 홍범도 등 일행 4명은 유수현(楡樹縣) 등 북만주 지방을 굶주리며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12월 말경 만주 홍더허즈(橫道河子)의 한인촌에 도착하였다. 거기에서 6일을 묵은 뒤 일행은 동포들의 도움으로 기차를 타고 1909년 1월 초에 마침내 러시아의 소왕령(蘇王領: 우수리스크)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였다. 일행은 또 소왕령(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서 6일을 머문 뒤에 12월 하순 연해주 민족운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게 되었다. 범도(홍범도) 등 일행 4명은 당시 동포들이 해삼위(海參威, 블라디보스토크)라고 부르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 달간 있으며 그곳의 실정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 유수현(楡樹縣) : 현 지린/길림성 위수/유수시(榆树/楡樹市)  https://maps.app.goo.gl/dZXFqPiPDQQm53Sj9
* 홍더허재(橫道河子) : 헤이룽장/흑룡강성 무단장/목단강시 하이린/해림시 헝다오허쯔/횡도하자진(横道河子镇) https://maps.app.goo.gl/oaFpp3BVhVTRk5446
* 소왕령(蘇王領: 우수리스크) :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는 옛이름 https://maps.app.goo.gl/y5WvgnzKnUYdz5P16 
* 해삼위(海參威, 블라디보스토크)  https://maps.app.goo.gl/2UrvWN6grX1MtYX29
 
말할 것도 없이 홍범도가 연해주로 건너온 이유는 그곳에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가고, 또 연해주 지역의 의병부대와 공동보조를 취하며 더 나아가 남한지역의 의병부대와도 연계하여 대대적 의병전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의도는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연해주 지역의 상황과 관련하여 어려움에 부딪혔다.
 
당시 연해주의 한인 사회는 1908년 7월 국내로 진입작전을 전개하였던 안중근 의병부대가 패전하자 이에 큰 충격을 받고 의병들의 무력항쟁을 무모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특히 최재형과 같은 민족운동계의 유력 인사는 노골적으로 의병운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운동과 산업진흥운동 등의 점진적 방법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 측도 의병들의 항전을 저지하려 하였다. 실제로 250여 명의 러시아 군대가 1909년 1월 1일 연추에 있는 안중근 의병부대의 연락사무소에 들어와 모든 총기와 탄약을 압수하고 해산을 명령하였고 러시아 영토 안에서의 무장투쟁 준비를 저지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1909년 경의 연해주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홍범도가 구상한 대로 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 최재형 : 일제강점기 때, 러시아로 귀화하여 한인중학교를 설립하고, 교포 단체 신문인 『대동공보』를 인수하여 언론투쟁을 벌였으며,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의병장·군인·독립운동가.
 
홍범도는 1909년 2월 초순 연추에 있는 이범윤을 찾아갔다. 그것은 그를 만나 독립운동의 방법을 의논하고 가능하다면 그의 원조를 받아볼 생각에서였다. 범도(홍범도)는 이범윤을 만나서 의병투쟁의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으나 이범윤은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범도(홍범도)는 이범윤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상당히 실망하게 되었다.註4)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연추를 거쳤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이에 굴하지 않고 6월에 블라디보스토크 동북의 수청(水淸: 노우니콜라에프카)으로 가서 군자금 및 의병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는 이 무렵 동의회(同義會)라는 민족운동 단체의 젊은 동지들과 함께 의병부대를 재조직하여 대규모 국내 진격작전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며 동의회의 모임에 참석해서 국내 진입작전의 요령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 수청(水淸: 노우니콜라에프카) : 파르티잔스크 (Партизанск, Partizansk). 새로운 니콜라예프카 라는 뜻  https://maps.app.goo.gl/yp7npLvjzdzyjNvFA
* 동의회(同義會) : 러시아공사 이범진 주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257
                 
홍범도는 동의회 회원인 안중근을 연추에서 만났다. 안중근은 홍범도와 같이 적극적 무장투쟁론자였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의병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교포사회의 지원이 끊겨서 조직적 의병항전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의회에 참가하여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만들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앞장설 것을 동지들과 함께 맹세하였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는 의거를 단행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조직적 투쟁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그 활로를 개척하고자 자신의 개인적 희생을 무릅쓴 것이었다. 안중근은 후일 일제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1909년 홍범도를 만난 사실이 있다고 고백했으며 홍범도를 “함경도 의병의 거물”이라고 술회하였다.
 
* 연추 (煙秋) : 현 추카노보(Цуканово, Tsukanovo). 러시아 연해주에 있었던 한인 마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267 위치 :  https://maps.app.goo.gl/SmrX8opc5yNRsBfP9
 
범도(홍범도)는 1909년 10월에는 연해주 보리스읍의 자피거우라는 곳에 머물며 군자금과 의병 모집에 열중하였다. 그가 연해주에 온 지 거의 10개월이 되었지만 의병투쟁을 위한 재기사업은 지지부진하였다. 그에 따라 범도(홍범도)는 내심 무척 초조하였고 아직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을 동지들이 걱정되었다. 동지들과 헤어질 때 틀림없이 다시 국내로 들어와서 적을 몰아내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 보리스읍 : 보리소프카(Борисовка,Borisovka)? https://maps.app.goo.gl/MAd41pgBbNsXSjBD7
* 자피거우(재피거우,재피구,梓皮溝) : 사라진 옛 한인 마을 말루지노(Malyuzhino). 프리모르스키(Приморский,Primorsky)주 하산스키군(Хасанский, Khasansky), 비노그라드나야(Виноградная,Vinogradnaya)강 근처. 지신허 동쪽 6-7km  https://maps.app.goo.gl/Hgunyfpmqgb4pDgp7
 
연해주에서의 재기도모가 이렇게 순조롭지 못할 때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돌파구가 안중근의 의거로 마련되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처단은 연해주 동포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범도(홍범도)가 1909년 가을에 연해주 추풍(秋風: 코르사코프가) 허커우에 와서 별다른 성과없이 국내로 돌아가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소왕령에 있던 애국청년 최원세가 홍범도를 찾아왔다. 그 청년은 국내로 귀환을 서두르는 범도(홍범도)에게 기회를 봐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자기가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아 보겠다고 말했다.
 
* 추풍(秋風: 코르사코프가) 허커우(河口) : 프리모르스키(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Primorsky Krai) 코르사코프카 (Корсаковка,Korsakovka)  https://maps.app.goo.gl/uxRA6GBV9zsd7WA68
 
범도(홍범도)는 그 말을 듣고 그곳에서 기다렸다. 그랬더니 그 해 겨울에 최원세는 연해주 각처로 돌아다니며 무려 4,980루블의 자금을 마련해 오는 것이 아닌가?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던 범도(홍범도)는 감격했다. 그 돈으로 범도(홍범도)는 군인 모집과 무기의 구입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10년 4월 초순(42세) 때 러시아에서 구입한 총기로 무장한 30여 명의 부하와 함께 추풍을 출발, 국내로 향했다. 거의 1년 반 만에 낯익으며 그리운 강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재기한 홍범도 의병대는 1910년 4월 중순에 간도를 거쳐 함경북도 무산에 진입하였다. 거기에서 홍범도 의진은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치렀으나 처음 의병으로 참가한 사람들이 많았고 또 병력이 소수여서 패전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달 하순에는 갑산에서 오는 일군과 교전한 결과 적 40여 명을 섬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일군 소총 40정, 권총 4정, 신호용 나팔 두개, 수류탄 14개, 군량 세바리, 탄환 7천발 등을 전리품으로 빼앗았던 것이다. 그 뒤 홍범도 의병부대는 1910년 5월 초순 함경북도 무산과 종성 일대에서 적과 수차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은 의병들 다수가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지리멸렬 상태로 빠지고 말았다. 마침내 홍범도는 재기의 꿈을 잠시 유보한 채 5월 중순에 백두산 건너편 중국의 안도현과 길림을 거쳐 또 다시 러시아로 망명하게 되었다.
 
* 안도현 : 중국 지린/길림성 옌벤/연변 조선족 자치주 안투/안도현(安图县/安圖縣)  https://maps.app.goo.gl/gygv3c7h1tErCyYKA
* 길림 : 중국 지린/길림성 지린/길림시(吉林市)  https://maps.app.goo.gl/Kc5S9Uu9qqT6KR1s7
 
지금까지 출판된 대부분의 책에서 1910년 3월에 홍범도가 비로소 만주 장백현 왕개둔(汪開屯)으로 망명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수정 되어야 할 것이다.
 
* 장백현 : 중국 지린/길림성 바이산/백산시 장백조선족자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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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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