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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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독립군의 형성과 간도에서의 독립전쟁
 
2. 독립군의 형성과 러시아 적군(赤軍)과의 공동투쟁
 
1917년 11월 초 러시아에서는 사회민주 노동당 좌파의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파(다수파란 뜻)가 노동자들을 이끌고 제정(帝政) 러시아에 반대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이 폭발하였다. 흔히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불리우는 이 혁명은 세계 각지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특히 1920∼30년대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등 구미 열강의 식민지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던 식민지 민족에게는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는 혁명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10월 혁명은 1905∼7년 동안에 있었던 러시아 혁명과 연관된 것이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10월 혁명은 대체로 내란이 종식되고 국제간섭군이 철수한 뒤 신경제정책이 시작되는 1921년 3월경을 끝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연해주 지역의 한인 민족운동도 러시아 혁명이 전개되는 3∼4년간은 이와 직·간접으로 연관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홍범도는 이제 막 혁명이 시작되고 있던 1917년 11월 만주 밀산에서 다시 연해주 추풍의 다아재골로 왔다. 추풍은 밀산보다 훨씬 한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밀산에 비축해 두었던 무기를 운반해서 추풍의 의사 최병준(崔丙俊)의 집에 묻어 두었다. 그런 뒤에 한편으로는 병사를 모집하고 또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그곳을 떠나기까지 약 1년 10개월을 거기에 머물렀다.
    * 밀산 : 헤이룽/흑룡강성 지시/계서시(鸡西/鷄西市) 미산/밀산(密山市)  https://maps.app.goo.gl/RRUmhbvhmN8jKfmKA  
    * 연해주 추풍(秋風|秋豊) : 프리모르스키(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Primorsky Krai) 코르사코프카 (Корсаковка,Korsakovka). 러시아 연해주 남부 라즈돌나야강/수이펀강/수분하(Раздольная/绥芬河/綏芬河) 근처 평야지대 4개 한인 마을
    * 최병준(崔丙俊) : 한자 불분명. 중추원 의관/의원 출신. 의사는 오기로 보임. 홍범도의 평생 동지. 홍범도의 아들 홍용환을 키움  https://hongbumdo.org/wp-content/uploads/2024/01/36-2023_%EA%B0%80%EC%9D%84.pdf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63572
 
그가 추풍에 있는 동안 러시아, 특히 연해주의 정세는 크게 변했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 정권이 성립되면서 연해주에서는 소비에트 정권의 지지파(적위파)와 반대파(백위파) 사이에 격전이 벌어지고 또 1918년 8월 혁명을 저지하려는 일본군이 침입하여 매우 복잡한 정세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연해주의 한인 민족해방운동 세력은 혁명의 초기에는 중립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점차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는 적위파(赤衛派)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결국 소비에트 정권과 한인 민족운동 세력 사이의 접근을 의미했고 대일투쟁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는 소비에트 적군으로부터 상당한 원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6월 이동휘는 아무르강변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다. 그 후 한인사회당은 연해주의 민족운동가들을 망라한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 중앙총회’와 협력하여 의용병을 모집하고 시베리아에 출동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설이 있다. 아마도 홍범도는 이 때 직접·간접으로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동휘 : 서북학회 등을 설립 민족계몽운동 전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등 역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4080 
    * 한인사회당 : 1918년 이동휘(李東輝) 중심,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 전로한족회 : 1917년 5월 러시아 니콜스크-우수리스크(Nikolsk-Ussurysk) 시에서 결성된 러시아 거주 한인 자치 단체, 항일 독립운동 단체. 사회주의 성향.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전신.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levelId=tg_004_1760 
 
홍범도는 1919년 3월 중순(일설에는 2월 하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주요 구성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이동휘가 부장을 맡고 있던 선전부(宣戰部: 뒤에 군무부로 바뀜)에서 활동하였다. 이동휘는 나중에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도 역임하게 되는 유력인사이다. 범도(홍범도)는 이 시기부터 부대를 이끌고 간도로 넘어갈 때까지 대한국민의회 및 이동휘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임시정부 성격의 단체. 훗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이어짐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levelId=tg_004_1750 
 
범도(홍범도)가 있던 추풍의 다아재골은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의 근거지가 되었다. 범도(홍범도)는 이동휘와 같이 이곳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훈련시키는데 열중하였다. 권업회에서 나자구에 설치했던 사관학교의 학생들과 범도(홍범도)의 부하들, 그리고 간도 훈춘출신 황병길(黃丙吉)·이명순(李明淳)·최경천(崔敬天) 등이 데리고 온 군인들을 기초로 군무부의 군대가 편성되었다. 이 때의 병력 규모는 400여 명에 달하였는데,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 철도선 수비용병’의 이름을 빌려서 소비에트 적군 ‘에호’영에 가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범도(홍범도)가 추풍에서 가까이 지내던 최병준은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접제원(接濟員)으로 활약하고 이명순은 이후 대한국민의회 훈춘 지회장을 맡게 된다.
    * 권업회(勸業會) : 1911년 6월 설립  러시아 연해주 한인 통합 자치단체. 대한광복군정부 모체. 최재형, 홍범도 주도.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410&code=kc_age_40 
    * 나자구(羅子溝, 나재거우) : 지린/길림성(吉林省) 옌벤/연변조선족자치주(延边朝鲜族自治州) 왕칭/왕청현(汪清县/汪淸縣) 뤄쯔거우/나자구진(罗子沟镇/羅子溝鎭)  https://j.map.baidu.com/2d/r4z https://maps.app.goo.gl/KBMGH4MLQWMrx1FQ7 
    * 황병길(黃丙吉) : 북로군정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등에서 활동하며 군대 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 함북 의병활동. 단지동맹 참여. 지린/길림성 훈춘/혼춘에서 활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149 
    * 이명순(李明淳) : 대한국민회, 대한독립군단 등을 조직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 동만주 총판부 참사, 국민회군 지휘관 등을 역임. 지린/길림성 훈춘/혼춘에서 활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4220 
    * 최경천(崔敬天) : 한자를 최경천(崔慶天)으로 정정. 한족공산당 연해주연합총회 군사부장이 되어 반일무장부대를 창설. 북간도, 지린/길림성 훈춘/혼춘에서 활동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85_1_0026121 
    * 소비에트 적군 ‘에호’영 : 에호(Эхо/Echo)+영(부대). 러시아 내전기(1910년대말~1920년대초) 연해주 및 시베리아 극동 지역에서 활동했던 소비에트 적군(붉은 군대)
    * 접제원 : 자금, 보급 담당
 
볼셰비키 혁명파는 반일·반백위파 투쟁에 동참하고 있던 한인 등 소수민족을 위하여 1919년 3월 올가에 ‘빨치산 제부대(諸部隊) 임시혁명본부’를 설치하고 그 아래 ‘민족부’를 두어 한인 등 무장세력의 활동을 원조하였다. 이러한 상황 전개와 동시에 국내에서 3·1운동(1919)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고무된 범도(홍범도)는 그 해 중반경 이동휘 등과 함께 지속적인 무력투쟁을 통해 국제연맹회의와 같은 국제사회의 여론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는 ‘독립전쟁’ 전략을 논의하였다. 이 때 범도(홍범도) 자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대를 이끌고 국내로 진격,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말하였다. 이 무렵 범도(홍범도)를 비롯한 연해주 지역 대부분의 한인들은 국내에서 줄기차게 전개된 3·1운동(1919)의 소식을 전해 듣고 매우 흥분하였으며 이제야 말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 백위파 : 러시아내전 백군/반볼셰비키
    * 빨치산 제부대(諸部隊) 임시혁명본부 :  1919년 3월 올가(연해주)에 한인 등 무장세력 원조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국민의회 측과 상의하여 8월 8일 마침내 10여 년 동안 오매불망 기다려오던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떨쳐나섰다. 그가 간도로 이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국민의회에서 국내진입 작전을 전개할 독립군의 후원 조직으로 ‘군정사(軍政司)후원회’를 결성하기로 한 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범도(홍범도)는 우선 간도로 가서 그곳의 사정을 보아 병사를 추가로 모집하고 국내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그의 부대는 이미 1919년 7월경 간도 지역 민족운동계의 거두 구춘선(具春先)과 의논하여 그가 주도하고 있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적 지원 등을 받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구춘선은 연해주에 갔다가 그 해 8월 23일 간도로 돌아왔고 ‘군정사후원회’를 조직하여 홍범도 부대를 지원할 준비를 시작했다. 홍범도 부대의 이동은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3·1운동(1919)의 전개,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 대한국민의회 및 볼셰비키파의 지원 등 복잡한 국내외 정세와 관련되어 있었다.
    * 구춘선(具春先) : 조선말 궁궐수비장 출신. 간민교육회. 대한국민회 활동. 무장독립운동에 참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076  :
    * 군정사후원회(軍政司後援會) : 구춘선, 장석함(張錫咸), 유예균(劉禮均) 등과 결성한 군자금 모금활동 기구
 
홍범도가 처음 추풍을 떠날 때 거느린 대원의 숫자는 106명이었다. 국민의회 군무부 소속부대 전체 규모가 400여 명에 달하였으니 그와 비교하여 1/4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기 직속 부하만을 추려서 출발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중에 나머지 병력의 대부분이 간도로 옮겨 오게 된다. 간도로 이동하면서 부대 규모는 점차 커지지만 초기의 구성원 가운데는 러시아 백위파가 내린 강제 징집령에 반대하여 홍범도 부대에 참가한 귀화 한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는 적극 수용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범도(홍범도)도 이미 이동휘를 통하여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고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때문에 이 부대가 간도로 이동한 뒤에 그곳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사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난 지 거의 2년이나 된 시기였으므로 당시 간도에 있던 한인들도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여 일부는 알고 있었고 그 사상을 수용한 사람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형성된 홍범도 부대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범도(홍범도) 자신은 의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 형편에 비추어 ‘빨치산(의용병)’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 활동무대인 간도로 가기 전 러시아령 안에서의 과도기 단계에서는 투쟁 목표나 작전 방침이 확실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발 당시부터 이미 조국의 광복(독립과 해방)을 위한 명분이 뚜렷이 있었으므로 ‘독립군’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범도(홍범도) 자신은 그 해 12월 ‘노령(露領, 러시아령) 주둔 대한독립군’이라는 명칭을 썼지만 출발 당시 부대의 명칭에 대하여는 일체의 언급이 없다.
 
홍범도 부대는 추풍을 떠나서 간도 방면으로 향했다. 그 도중에 이들은 국경 부근의 아인덕이라는 곳에서 제정 러시아 측의 백위파군과 싸우는 소비에트 적군(赤軍)을 만나게 되었다. 백군(白軍)과 싸우다 패전한 적군 패잔병 6명이 홍범도 부대에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범도(홍범도)는 러시아인들의 싸움에 말려들어 본래의 임무인 간도로의 이동과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는데 차질이 생길까 걱정하여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 아인덕 ?
 
하지만 홍범도 부대는 적·백(적위파·백위파) 양군의 전투 현장에 이미 들어섰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서 서로 싸우는 양 진영의 투쟁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부대는 일본 간섭군을 반대하여 싸우는 적군 측에 가담하여 백군과의 전투를 개시하였다. 전투는 러시아인들의 제분소인 물방아간에서 벌어졌다. 치열한 전투 끝에 홍범도 부대는 백군 13명, 말 세 필을 사살하고 적을 패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 뒤부터 약 1년간 홍범도 부대에는 러시아 적군 출신 장교 3명이 같이 행동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이바노비치 와씰네·꼬싸·까리멘니츠라고 했다. 이들은 홍범도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때로는 홍범도의 참모 역할을 하며 부대원들을 러시아식으로 훈련시키기도 하고 그의 작전 구사에 충고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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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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