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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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3. 의병부대의 재조직과 항전
 
(4) 일제 주구배의 응징
 
잠시 침체에 빠져 있던 홍범도 의병부대는 국경지대인 삼수·갑산 일대는 물론 함흥지방까지 출몰하며 다시금 크게 활약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 중좌는 홍범도 의병대의 눈부신 활동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여전히 홍범도를 ‘귀순’시키려는 헛된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수비구 산하의 제3순사대장 임재덕 등이 활동하는 곳으로 경시 김원흥 등 11명을 추가로 파견하여 홍범도의 귀순공작을 강력히 추진하라고 독촉하였다.
 
그 무렵 임재덕은 범도(홍범도)의 아들 양순(홍양순)을 보내서 홍범도를 귀순시키려고 했으나 양순(홍양순)이 돌아오지 않아 범도(홍범도)를 귀순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원흥이가 새로 상관의 지시를 받고 와서 홍범도에 대한 귀순공작을 다시 추진하려 하자 여기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김원흥은 11명의 일·한인(일본인·한국인) 군경을 이끌고 임재덕 등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 합류하였다. 김원흥은 5월 1일 북청을 출발하여 후치령을 넘고 황수원(黃水院) 신풍리를 거쳐 4일에는 임재덕과 일본군 등이 머물고 있는 창평리에 도착하였다. 그 후 임재덕과 김원흥 등은 약 300명의 홍범도 의병부대가 창평리 서북 약 30리 지점의 도하리(都下里)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뒤 이들은 도하리의 더덕장 거리에 있는 김치강의 집에 와서 주둔하고 부근의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홍범도 의병부대에 전하도록 하였다.
 
* 후치령 : 북한의 삼수갑산(三水甲山)] 지방인 함경남도 북청군과 함경남도 풍산군을 잇는 높이 1,335m의 고개이다.  
 
* 황수원(黃水院) : 양강도 풍산군 황수원리로 되었다가, 1990년에 풍산군이 양강도 김형권군으로 개칭되면서 양강도 김형권군 황수원리로 되었다.
 
* 도하리(都下里) : 본래 함경남도 갑산군 장평면의 지역으로서 갑산군 송암리에 편입되면서 폐지. 갑산면 도하리. (아래 지도 한 가운데)
* 창평리 : 진동면 창평리 
* 신풍리 : 진동면 신풍리 ? 
 
“싸움할 것 같으면 싸움하고 귀순하기 원하거든 3시간 내에 계약을 체결하자.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속사포로 너희 군대를 모조리 없애버리겠다!”
 
이 소식이 의병부대에 전해지자 온 부대는 자못 떠들썩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군은 위력 있는 최신식 무기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의병부대는 대부분이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탄환이 모자랐고 식량도 넉넉지 않았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이러한 분위기를 일신하고 의병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기계(奇計)로서 적을 유인하여 섬멸하기로 작전계획을 썼다. 이에 따라 그는 5월 4일에 의병 가운데서 가장 사격을 잘하고 체력이 좋은 사람 70여 명을 선발하여 도하리 근처의 더덕장 거리 흙다리(土橋)에 매복시켰다. 그리고는 자기가 귀순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작성하여 변장하고 잠시 이름을 바꾼 뒤 김치강의 매제 집에 가서 김원흥에게 직접 그 편지를 전달했다.
 
김원흥은 홍범도가 이름을 숨겨서 변장하고 찾아온 줄도 모르고 그 편지를 보고는 씩 웃으면서 “너의 소원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여주마!”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일본군과 파수보는 경찰 15명을 김치강의 집에 남겨 놓고 일본인 및 한인 순사 20여 명을 인솔하여 범도(홍범도)가 유인하는 대로 흙다리목에 도착하였다. 김원흥 등이 의병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장소에 이르자 총소리가 콩볶듯하며 사방에서 모진 광풍이 얼어난 듯 의병들의 기습적이며 집중적인 공격이 재빠르게 단행되었다. 결국 범도(홍범도)의 위험을 무릅쓴 과감한 작전으로 의병들은 김원흥 등 6명을 사로잡고 이들을 따라온 일본인 경찰과 한인 보조원 등 5∼6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범도(홍범도)와 가까운 노은촌 출신 의병 고응렬(高應烈)이 전사했고 조인각이 부상당하였다.
 
홍범도는 김원흥을 체포한 후 더덕장 거리의 여러 사람과 의병들이 보는 앞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꾸짖었다.
 
“김원흥 이놈! 네가 수년을 진위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원이나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 산간에서 감자 농사하여 먹고 지내는 것이 도리이거늘 7조약(한일신협약, 1907)·9조약에 참여하여 나라의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될 것이다.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 처한다. 조선 사람들아 들어보아라! 당신들이나 나나 다 조선 사람인데 무슨 이유로 나 같은 의병들을 해치고자 하느냐? 일본놈은 남의 강토를 제 강토로 만들자 하니 그럴 수 있다 하자! 김원흥·임재덕 너희 같은 역적놈은 네 아비·어미 다 너와 같이 씨를 없애야 되겠다.”
 
범도(홍범도)는 김원흥을 의병투쟁의 제물로 삼아 공개 처형함으로써 온 동네 사람들에게 의병들의 활약상을 알리고 일제의 침략에 앞장서는 부일배들은 살아날 수 없다는 엄중한 사실을 알렸다. 김원흥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될 최소한의 양심을 유지하기는커녕 일제의 주구로 변신하여 겁도 없이 홍범도를 ‘귀순’시키려다가 도리어 철석같이 강인한 투쟁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던 범도(홍범도)에게 마침내 응징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귀순 권고의 목적으로 김원흥 등 한국인 주구들을 파견하였던 일본군 수비대에서는 이들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홍범도 의병부대에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결과적으로 의병들의 기세만을 크게 올려준 셈이 되었으므로 매우 당황하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 북청 수비구 사령관 하세가와는 홍범도 의병부대의 ‘토벌’에 광분하며 관구 휘하의 부대를 총출동시켜 의병대의 진압에 필사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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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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