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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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3. 의병부대의 재조직과 항전
(3) 의병부대의 재조직
차도선 등 많은 의병들이 일본군에 속아서 피체되거나 피살되고 혹은 해산하여 귀가해 버린 뒤 함경도 지방의 의병투쟁은 실로 막대한 타격을 받아 험난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홍범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에 대한 줄기찬 항쟁을 계속하였다.
홍범도는 봉기 이후 1908년 3월 중순까지 차도선 등과 같이 공동으로 싸웠지만 이제 스스로 대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며 부대를 재편성, 항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는 그해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사이에 삼수·갑산·무산·북청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아직 의병부대에 가담하지 않은 산포수와 농민·광산노동자·청년들을 권유하여 의병에 참가시켰다. 또한 의병 부대들을 소부대로 나누어 함경도 산간의 각 마을에 가서 남은 무기를 수집하고 식량과 금품을 기부 받아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 결과 4월 중에는 다시 의병대의 규모가 400여 명으로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주목되는 사실은 홍범도 의병부대가 자체 무기조달 노력의 일환으로 스스로 무기를 제작했다는 점이다. 즉 갑산의 동점(銅店)에서 나는 구리를 재료로 해서 화승총 탄환은 물론 일부 신식무기의 탄환을 제작하기도 했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구식 대포도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것이다(박원희의 증언에 의함). 하지만 그러한 자체 조달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지속적으로 진행되지도 못하였다.
1908년 4월 12일 홍범도 의병부대는 오족리(吾足里)에서 일제의 순사대 10여 명과 교전하는 것을 기점으로 재차 활기찬 의병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4월 20일에는 삼수 서방 지점에서 약 100명의 병력으로 일제 헌병대와 접전하여 큰 손실을 입혔다. 같은 날 다른 휘하 의병대가 함흥을 기습했는데, 이들은 일본군 포병대의 숙소를 방화하여 2개동을 완전히 태워 버리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이 사건은 일제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함흥까지 대담무쌍하게 기습한 작전이었다는 측면에서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함흥 일대에 홍범도 의병부대의 명성은 널리 퍼져갔고 반대로 일제는 대경실색하게 되었다.
홍범도는 4월 27일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평안북도 강계의 평남진(平南鎭)으로 진출하여 강계수비대의 일병과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5월 2일에는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사이의 구름물령(雲波嶺)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일병 32명을 저격하여 전멸시키고 소총 30정, 군도 두 자루, 탄환 300개, 권총 네 자루를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 평남진(平南鎭) : 평안북도/자강도 강계시 용림/룡림군에 있음
* 구름물령(雲波嶺) : 양강도 풍서군 약수노동자구 소재지의 서쪽 굴움물(운담?)마을로 넘어가는 영. 함경남도 장진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통과하고 있어 장진령이라고도 한다. 양강도 김형권군 평산노동자구와 함경남도 부전군 문암리와의 경계에 있는 영
https://maps.app.goo.gl/McTd5WPpKZc2hGgo6 (지도 중심의 하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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